셀 사역

제목2016.01.01 셀 사역2024-04-22 16:06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제비뽑은 말씀을 근거로 새로운 해에 소망하는 기도 제목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잠시 세상에 (찬송가 492장)
●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복음송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베드로전서 1:1-2
● 제목: 나그네의 정체를 밝힙니다.
1)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인 ‘흩어진 나그네’에 대하여 베드로가 갖고 있었던 정체성을 고넬료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입장을 대입하여 설명해 보자.
● 보자기 환상(만나기 이전): 사도행전 10:9-16절
● 이방인들에게 임한 성령 강림과 세례 사건(만난 이후): 사도행전 10:44-48절  

2) 베드로가 AD 63년 즈음 로마에서 쓴 본문에서 선포하고 있는 ‘흩어진 나그네’에 대해 견고해진 정의는 무엇이었는가?
● 본문 2절을 참고: ①                      ②                        ③
● 결론적 정의(테마를 기억하자.)  

3) ‘흩어진 나그네’의 2016년의 적용을 그리스도인 나에게 적용해 보자.
● ①②③을 기억하면서:
●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이든 토저 목사의 글을 참고하자.)
● 2016년 교회 표어와도 맞물려 나누어 보자.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제 8회 사무총회를 위하여
2) 치유기도
3) 헌금기도
4) 광고
5)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6년 1월 3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베드로전서 두 번째 강해)
본문: 베드로전서 1:1-2
제목: 나그네의 정체를 밝힙니다.

  본서에서 베드로가 언급한 ‘흩어진 나그네’란, 천국을 본향으로 삼고 이 땅에 잠시 사는 자이며 그 영적 정체성은 ‘하나님 아버지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본문 2절). 베드로의 시각에서 볼 때 흩어진 나그네들은 변방의 사람들이요 외인이었으며 그가 고넬료를 만나기 이전이었다면 같이 앉아 식사를 하는 것도 불편하게 여길 정도로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은 안디옥에서의 사건을 볼 때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이 선포는 엄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세운 뒤에 3차 전도여행을 통해 이방 사역을 원활하게 감당하다가 아주 유감스러운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든든히 서가던 갈라디아 교회가 걷잡을 수 없는 교리적 붕괴를 가져오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 율법주의를 맹종하던 자들이 갈라디아 교회까지 내려와 구원의 조건을 충족하려면 이방인들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방 선교의 모델케이스가 될 정도의 모범적인 교회인 갈라디아 교회가 혼란에 빠졌고 교회가 급격히 와해되고 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바울은 급한 데로 갈라디아서를 써서 교회를 다시 든든히 하고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 이 문제 즉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거짓 가르침이라는 것을 공회 차원에서 선언하도록 하기 위해 예루살렘 총회 소집을 요청합니다. 이로 인해 열린 제 1차 종교회의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총회는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쐐기를 박아줌으로서 바울의 의견이 승리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총회의 결론은 이방인 형제들의 영적 혼란의 문제를 해결해 준 셈이 된 것입니다. 이 때 율법을 사수하려던 즉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일거에 잠잠하게 했던 자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이 종교회의의 논란 때 이방인의 주장 즉 바울이 강조하는 할례무용론에 대하여 찬성하였습니다. 이방인 형제들도 할례가 필요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한 것입니다.(사도행전 15:6-11절).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베드로의 이 변증의 근거는 그가 욥바에 거주할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경험한 보자기 같은 그릇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 안에 담겨 있는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먹으라는 환상에 있습니다(사도행전 10:9-16절). 이 환상 뒤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나 가이사랴로 이동한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족들을 만났고 그곳에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고넬료의 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있었던 또 다른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는 광경을 직접 보았고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사도행전 10:44-48절).
  그런데 안디옥에서 바울이 베드로를 만났던 일(갈라디아서 2:11-14절)을 상기하면 베드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이렇게 이방인 형제들에 대한 옹호와 응원을 해주었던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 형제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어간, 마침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할례주의자들 즉 율법주의자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고 그 식사 자리를 피하여 물러갔다는 바울의 보고는 베드로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당시 초대교회의 수장과도 같은 베드로의 외식에 대하여 단호하게 영적 권위를 가지고 그를 책망했음을 갈라디아서의 보고를 통해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삶으로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형제들에 대한 고질적인 선입관과 의식이 유대인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던 한계가 무서울 정도로 깊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였기에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고백과 선언은 대단히 혁명적이고 놀라운 선언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AD 63년경에 로마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당시 AD 64년에 있었던 로마의 대 화재로 인해 누명을 쓰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할 때 베드로도 함께 순교를 당한 것이 정설이라면 이 편지는 베드로의 유언과도 같은 편지일 것입니다. 그의 인생 말년에 이제는 천방지축 날뛰던 혈기 왕성할 때의 베드로가 아니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 영적 성숙의 전성기에 베드로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 즉 그렇게도 심정적으로 가까이하기에 너무 멀었던 이방의 형제들을 지칭하는 정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들의 정체를 본문 2절에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진정성이 있게 선포한 나그네들의 정체성입니다. 베드로의 이 선포는 이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흩어진 나그네들을 향하여 이렇게 180도 돌아서서 이방 형제들 역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근거는 세 가지 이유 때문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미리 그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② 성령께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AD 63년경에 베드로에 의해서 지칭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나그네’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몰랐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몰라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알고 계셨기에 아들을 보내주셨고 그를 죽이시기까지 하심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우리들의 형편과 처지를 너무나 잘 아셔서 성령을 보내주셨고 보내주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셨습니다. 착각하지 맙시다. 내가 거룩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심으로 나를 거룩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은혜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혜 즉 보혈의 은혜를 공급받아 구원의 은혜를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신 흩어져 있는 나그네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정체는 대단한 위상인 것입니다. 절대로 세상이 깔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베드로전서 2:9-10절). 이런 대단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거나 세상에게 눈치 보지 말고 담대하게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용기 있는 나그네들이 됩시다.
  아이든 토저 목사는 “과거에 세상이 교회를 따랐던 적이 있었다.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앞서 나갔으며, 세상은 교회를 뒤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반대이다. 지금은 교회가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 내고 있다. 과거의 교회는 어린양의 아름답고 혈색 좋은 신부였으나, 지금 교회는 쪼글쪼글한 늙은 걸인 같다. 지금 교회는 세상의 거리로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동전 한 닢을 구걸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한 때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교회는 ‘제발,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면에서 당신들과 똑같습니다.’ 라고 말한다. 오늘날 그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적 기독교와 세상을 섞어놓은 기독교, 혼혈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가? 명심하라. 십자가의 기독교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첨하지 않는다. 과거의 교회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오니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다. 교회는 자신의 성경적 원리위에 우뚝 서서 세상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올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세상과 충돌하라’). 우리교회의 기초가 되는 이 촌철살인을 기억합시다. “세상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교회가 되어야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살려달라면 되겠는가!”
  고 옥한흠 목사님의 어록을 기억합시다. “교회만 제대로 서면 교회를 만난 사람들이 제대로 서고, 그들이 갖고 있는 거룩한 삶의 능력을 발휘하면 사회가 살아나고 국가도 살아날 것입니다. 위기가 없으면 인물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오늘의 위기는 하나님이 목사와 성도들을 다시 쓰기 위한 위대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문득 당신이 그리워 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오래 살지 않을 것입니다.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는 동안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특별히 선택한 위대한 나그네들임을 명심하고 세상에 움츠리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말씀을 갖고 제대로 구원 그 이후의 우리들의 삶을 살아내 세상이 살려달라고 손을 내미는 능력의 종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