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이제 두 달 여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아내와 함께 걷기를 시작한지가. 일과를 마치고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 정도는 강제동에서 이마트까지 조성된 둘레 길을 걷기 시작한지가 벌써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고인이 된 황수관 박사께서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자가용을 본인이 타게 될 영구차라고 말하면서 걷지 않고 문명의 이기인 차량을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 건강에 치명타인지를 설명해 주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내가 어느 날 걷기를 제안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는 운동이 있어 운동량이 만만치 않지만 아내가 건강을 위해 제안하는 것을 마다할 리 없어 그렇게 함께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제 건강을 위해 시작한 걷기지만 건강은 물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곁들인 혜택을 받게 되어 배의 기쁨이 있습니다. 둘레 길가에 펼쳐져 있는 각종 들꽃들이 너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꽃들이 자아내는 향기는 시끄러운 매연에 찌들려 있는 심신을 위로해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곳에서 나지막하게 소리 내는 풀벌레 소리도 고즈넉한 감동을 줍니다. 잘 다듬어 놓은 내(川)로 흐르는 물소리는 도시의 숨 막히는 콘크리트 담벼락에서 탈출한 자만이 들을 수 있는 시입니다. 그러기에 어느새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시인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여유로운 시간을 갖게 되어 행복하기 그지없습니다. 오고가는 길에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마주칩니다. 그들과 마주치며 오늘 하루 저들은 또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냈을까를 생각하게 되자, 왠지 모를 그들을 위한 화살기도까지 나오게 합니다. 열심히 뛰는 젊은 청년들도 보입니다. 젊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가를 느끼며, 나에게 남아 있는 이 땅에서의 여백의 시간동안 결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지 하고 다짐도 해봅니다. 그 무엇보다도 걸으면서 얻는 또 다른 기쁨은 흙을 밟는다는 점입니다. 오래 전, 평론가이자 여류 작가인 리베카 솔닛이 쓴 ‘걷기의 인문학’(반비 간, 2017년)을 읽다가 무릎을 쳤던 적이 있습니다. “흙이 성스럽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낮고 물질적인 것과 가장 높고 정신적인 것이 연결된다는 뜻이요, 물질과 정신의 거리가 좁아진다는 뜻이며, 전 세계가 성스러운 곳이 될 수 있고, 성스러움이 하늘이 아닌 땅에 있을 수 있다는 지극히 전복적인 생각이다.”(p,88) 걷기를 시작한 둘레 길의 많은 부분이 흙으로 되어 있는 곳이라 솔닛이 말했던 이 엄청난 생각의 전환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행복도 맛보고 있습니다. 목사의 사명 중에 하나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걸으면서 이 기도를 다시 삶에서 느끼게 해주신 주군의 은혜를 맛보니 감사의 질을 높이게 해 준 것이 걷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내와 걷는 걷기 중에 함께 나누는 이런저런 대화는 끝까지 인생 마라톤을 완주하려는 동역자와의 보폭 맞추기라는 점에서 육체의 건강보다 더 소중한 영적 건강의 통로로 진입하는 또 다른 선물을 줍니다. 그러기에 전술한대로 걷기는 배(培)의 배(培)입니다. 그러고 보니 걷는 것이 목회였습니다. “조금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걸” 하자 아내가 이렇게 되받습니다. “더 늦지 않고 알게 된 것에 감사해요.” 걷기는 목회요, 행복입니다. 교우들도 이 행복에 많이 참여해 보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