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인터넷 저녁 예배 시간에 아내가 휴대폰을 열고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막 시작된 터라 아내의 행동이 무슨 일인가 알 수 없었는데 예배가 끝난 뒤 그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몇 연로하신 교우들을 위한 지극 정성의 섬김이었다는 것을. 인터넷의 ‘인’자도 모르는 교회 어르신 권사님들은 3주 전부터 목사가 시작한 인터넷 실시간 방송 예배에 대해 소리 없는 가슴앓이를 했다. 실시간 방송을 휴대폰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목사의 말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질을 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전화를 하고 받는 용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당신들의 휴대폰을 통해 주일에 드려지는 예배를 볼 수 있다는 말은 적어도 그 어르신들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남의 나라 일이기 때문이다. 셀 리더들에게 담당하고 있는 어르신들의 예배를 도우라는 담임목사의 추상같은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리더들 자체도 현실적으로 직접 현장에 찾아가 함께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는 높은 담인 것은 매일반이기에 인터넷 실시간 예배드리기는 몇 몇 어르신들에게는 말 그대로 예배를 도둑맞은 기가 막힌 아픔임에 분명하다. 이런 아픔을 안 아내가 고민 끝에 고안해 낸 방법은 어르신들도 전화는 받을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실시간 예배 때, 어르신들을 섬기는 지체들을 정해 그들에게 전화를 드려 스피커폰을 열게 해서 소리라도 듣게 함으로 실시간 예배 설교를 경청하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해서 이런 취지로 지난 수요일 실시간 예배 시간에 여느 집사님과 아내가 시험을 해 본 것이 수요일 예배 행동 이유다. 수요 예배를 마치고 대상자인 권사님들에게 아내가 일일이 전화를 드렸다. “권사님, 9시나, 11시 둘 중에 좋은 시간이 언제세요? 그 시간에 맞추어서 전화를 드릴게요. 꼭 전화 받으세요.” 듣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 진다. 젊은 아이들 말대로 쌩 쇼를 하며 지극정성으로 어르신들을 섬기는 아내의 모습이 따뜻한 감동으로 여울져 내게로 돌아온다. 지난 주간, 현장 목회자들이 주일 예배 사수를 운운하는 것은 예배 결벽증과 다를 바 없음이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쓸데없을 정도로 과도한 영적 해석을 부여해서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얻어내고, 예언자 노릇을 하는 일이며, 이를 통해 교회의 방향을 자기가 의도한 대로 이끌고 가고 싶어 하는 무의식 세계 속에 내재된 목사들의 욕망을 발현하는 행위라고 비수를 꽂은 어떤 글을 읽었다. 가히 쌩 쇼 수준의 아내의 행위를 욕망의 발현이라고 공격한다면 그렇게 해석하는 자들과 더 이상 무슨 인격적 소통이 필요할까 싶어 여기서 멈추려고 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코로나 19 사태에 맞물려 주일 예배를 강조하는 목사들을 무슨 괴물인양 인식한 바로 그 지성적 그룹에 속해 있는 당신들의 오늘을 만들기 위해 톱밥 난로가 겨울 난방의 전부였던 그 가난했던 시절, 고향 교회 새벽 예배에 나와서 오늘의 당신을 위해 엎드렸던 어머니들이 바로 예배를 도둑맞은 그 분들임을. 영하 20도로 수은주가 곤두박질치고 매서운 칼바람과 눈보라가 쳐도 교회 예배당에 발걸음을 옮겨 오늘의 당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던 그 분들이 당신들의 어머니임을. 기도했던 그 자리에 떨어진 그 눈물의 액체가 얇은 얼음으로 바뀌는 그 추위의 고통 즈음이야 아들의 승리를 위해라고 머금었던 분들이 당신의 어머니임을. 그 분들이 이 땅에 숨을 쉬고 있는 한 예배는 드려져야 한다. 그 분들이 원하는 예배는 날카로운 기계음과 영상으로 보여 지는 온 라인예배가 아니라, 지난 주간, 함께 삶의 지난함 속에서도 같이 중보하고 울어주었던 지체와 손을 맞대고 드리는 공동체 예배다. 더불어 타나 남아 검게 그을려서 볼품없기 짝이 없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한 번 따뜻하게 불러주는 이 말이 있는 공동체 예배를 그들은 드리고 싶어 한다. “권사님, 잘 지내셨지요.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권사님!” 오프라인 예배가 단절된 오늘, 나의 교회 때문에 나는 운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한다. ‘권사님, 전화 꼭 받으세요!’ 가 아니라 ‘권사님, 사랑해요!’ 라고 면전에서 격려할 그 예배가 다시 열리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