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주의자의 무례는 더 아프고 아프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부득이 몇 주간 주일 공 예배를 못 드리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아쉽고 불편한 상황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요사이 이곳저곳의 기독교인들 전용 커뮤니티에서 이번 예배 중단에 무슨 하나님의 대단한 뜻이나 섭리가 담겨 있는 것처럼, 과도하게 영적인 해석을 부여하는 글들이 유포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의 호응을 얻는 현상에 대해서는 적잖게 아쉽고 불편한 마음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들은 이번에 예배가 중단된 것에 대해 한국교회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음모가 숨겨져 있고, 현 정권이 그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글들을 퍼 나르기 바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번에 예배가 중단된 것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그릇된 예배를 드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회개를 촉구하는 글들을 열심히 퍼 나릅니다. 물론, 어느 쪽 글이 되었든 간에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이런 영적인(?) 글들에 대해 열렬히 호응하는 것만은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아마 이런 글들을 작성하거나 또는 열심히 유통시키는 분들은, 본인들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영적 비밀을 깨달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그런 자부심이나 사명감은 일종의 영적 나르시시즘일 뿐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쓸데없을 정도로 과도한 영적 해석을 부여해서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얻고, 예언자 노릇을 하며, 이를 통해 교회의 방향을 자기가 의도한 대로 이끌고 가고 싶어 하는, 무의식 세계 속에 내재된 욕망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이 글을 우연히 접했다. 이 글의 저자는 우리나라 메이저급 기독교 출판사 CEO로 있는 아무개 목사의 글이다. 읽어보니 요 근래 몇 주 동안 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에서 설왕설래 하는 주일 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리는 것이 맞는 것인가, 아니면 오프라인을 끝까지 사수하며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는 것인가에 대한 뜨거운 담론에 대하여 그가 갖고 있는 개인적 인 답변을 한 성격의 글이었다.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알다시피 이 글을 쓴 저자는 진보적인 색채를 갖고 있는 목사이기에 보수적인 스펙트럼에 있는 교단과 목회자들에게는 블랙리스트에 올라갈 정도로 유명인사(?) 그룹에 속할 정도로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인사다. 개인적 소견 하나, 그럼에도 나는 아무개 목사를 정서적으로 지지했다. 더불어 또 그가 말한 부분에 대해서 동의해왔다. 내가 진보적인 성향이기 때문인가? 결코 아니다. 내가 나를 평가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을 알기에 상당히 낯설지만 굳이 내 성향을 나에게 말해보라고 말한다면 난 보수성(지금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전 아무개가 내뱉는 보수주의는 아름다워야 할 보수가 아니라 수구적인 근본주의다.)이 다분한 사람이다. 아무개 목사가 토해 냈던 말 중에 상당수를 동의했던 것은 가장 상식적이고 지성적인 목사의 삶, 목양의 질에 대한 그의 해석과 성찰은 공유할 가치가 있는 수준 높은 글들이 많았기 때문이었고, 적어도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목사 동역자로 한국교회의 건강성에 대하여 많이 고민하는 그의 분투함과 치열함 그리고 공부함이 나와는 같은 공통분모를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동지의식 때문이었다. 더불어 그가 출간하고 있는 여러 책들을 통해서 나 또한 적지 않은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준 동역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몇 해 전에 쓴 ‘상식이 통하는 목사’는 서평을 남길 정도로 많은 목사들이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양서로 평가했고, 그가 경영하는 출판사에게 출간했던 랭런 길키의 ‘산둥수용소’는 내 인생의 책으로 소개하는 랭킹 10위 안에 있는 책일 정도로 그가 경영하는 출판사의 글들을 신간이 나오면 거의 잊지 않고 읽는 편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참 좋은 평가와 동역의식을 갖고 있는 김 아무개 목사가 앞서 소개한 글을 읽다가 소리 없는 분노가 일었다. 소리가 없어서 그런지 그 분노 게이지는 지금 글을 쓰게 만들기까지 했다. 코로나 19 사태의 충격은 사회 전반에 걸쳐 엄청난 타격을 주고 있다. 근래 들어 아무개 목사의 글이 코로나 사태 이후, 조금 더 많아진 느낌이다. 그가 SNS에 올리는 글은 다분히 진보적인 색채가 강한 어군(語群)을 동원한 강한 내용들로 넘쳐난다. 그만이 갖고 있는 진보적 성향의 지성적 목회자의 소리이기에 그 글들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있는 게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다만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정치역학적인 그의 주장에 대한 리뷰가 아니라, 현장 목사로 살고 있는 나이기에 그가 글로 앞에서 언급한 글에 대한 강력한 유감을 표명하고자 함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가장 엄청나게 교회가 맞고 있는 예배 쇼크에 반응하고 있는 일선 목사들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 ① 예배가 중단된 것에 대해 한국교회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해석한다는 다분히 보수적인 목사들에 대한 평가 ② 이번에 예배가 중단된 것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그릇된 예배를 드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회개를 촉구하는 다분히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목사들에 대하여 평가. 그는 이 두 부류의 목사들에 대하여 싸잡아 한 마디로 냉소적 평가를 이렇게 내렸다. 전자든 후자든 모두가 영적 나르시시즘이라고. 조금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혹평했다. “쓸데없을 정도로 과도한 영적 해석을 부여해서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얻고, 예언자 노릇을 하며, 이를 통해 교회의 방향을 자기가 의도한 대로 이끌고 가고 싶어 하는, 무의식 세계 속에 내재된 욕망이 발현된 것”뿐이라고. 정말 그런가? 먼저는 이런 생각으로 분노 게이지를 추슬렀다. 그 동안 참 많은 극단적인 _ISM에 빠진 목사들이 그렇게 얍삽하게 자기들의 숨겨진 욕망을 채워온 부분이 있었기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일편의 이해로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모 출판사 대표의 발언은 대단히 무례한 발언이자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본인 스스로가 발언한 그대로의 표현으로 돌려주자면 본인 스스로야 말로 나름 예언자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 극언한 무례함의 극치이며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지성적 정의로 포장하여 자신을 표출하고자 한 교만함의 일례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코로나 19 사태로 인한 예배 담론에 대하여 보수적인 목사의 입장이든 진보 혹은 중도적인 입장의 목회자가 갖고 있는 내용이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하여 손을 들어 편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건강한 신학을 한 목회자는 적어도 목회자 갖고 있는 개인적인 신학의 바탕에서 목회 현장에 따라 반응을 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이 글을 쓴 아무개 목사에게 일설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지금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전무했던 일을 경험하면서 목사로서 가장 큰 아픔 즉 정말로 뼈가 녹는 심정으로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못 견디는 흉통은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연약한 지체들로 인한 아픔이다. 아, 그들을 향하여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내 스스로가 하나의 거룩한 교회라는 신학적인 인식 고취, 예배당이 아닌 있는 처소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목도가 더 귀하고 행복한 진짜 예배 주입,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라는 목회자로서의 권면을 더 열정적으로 행하라는 식의 충고는 사양한다. 그건 신학교 교단이나, 신학적인 출판을 위해 쓴 교과서에서나 설득력이 있는 배부른 메타포들이기에 말이다. 그들은 인터넷이 무엇인지 모른다. 실시간 예배 실황은 더 더욱 방언과도 같은 낯선 언어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그냥 삶의 전부였고, 예배함은 거룩한 순교였고, 성도와의 만남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미리 살아보는 포기할 수 없는 최고의 기쁨이었던 내 어머니와 아버지들의 정체성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런 예배를 졸지에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교우들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목사의 무기력함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대로 골수에 사무치는 말기적 영통(靈通)이다. 이 절망이 어떤 고통인지 현장 목회자 아닌 사람은 단언건대, 머리로 이해는 될지 모르지만 가슴으로 체휼할 수 없다. 사정이 이런 데도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 아픔에 빠져 있는 현장 목회자들의 그 뼈 녹는 심정의 고통을 이성적인 잣대로 해석한 아무개 목사의 발언은 그가 발언했던 대부분의 건강한 목회자와 교회 만들기에 박수를 보냈던 나에게 대단히 불유쾌한 언어로 실망시킨 자의적이고, 폭력적이며, 교만한 확신이 아닐 수 없음을 지적하고 싶다. 분노 게이지가 누그러졌기에 차제에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대다수의 건강한 목회를 추구하고, 오직 주군을 향한 사랑으로 목양하는 현장 목회자의 공통분모는 가시적 교회의 성공이라는 번영신학에 함몰되어 있지 않다. 목회의 성공이라는 산술적인 교회의 수적 놀음이나 세속적인 방법을 동원한 성장에 눈이 멀어 있지 않고 주군께서 위탁하신 단 한 사람의 영혼, 그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에 지속적으로 붙들릴 수 있도록 중보 하는 삶을 목표한다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그 한 명의 영혼을 붙들고 울고 또 운다고. 그 단 한 명의 영혼을 붙들고 아직은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만큼의 주존심(主尊心)을 갖고 목회한다고. 아무개 목사처럼 출판업계에서 엄청난 지성을 취사선택하며 지적, 영적 나르시시즘에 빠질 정도로 현장에서 치열하게 목회하는 나를 뺀 대부분의 건강한 목사는 나르시시즘 운운할 정도로 그렇게 낭만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지 못한다고. 아주 오래 전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위젤은 고전과도 같은 책 ‘팔티엘의 비망록’ (원제: The Testament)을 보았다. 책에 아들 그리샤가 아버지 팔티엘 거쇼노비치에게 어려서 배운 일을 독백하는 내용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서(공산주의자들) 볼세비즘, 멘세비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란 세 단어를 배웠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주의(_ism)’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이렇게 답해 주셨습니다. 그건 혼인할 준비를 하고 있는 변덕스러운 여자 같은 거란다. 앞의 단어에 따라가는 거야”(엘리 위젤, “팔티엘의 비망록”, 배현나 역, 도서출판 주우, 1981,p,63.) 나는 혼인을 준비하고 있는 변덕스러운 여자와 닮아 있는 ‘주의(_ism)’에 목숨을 걸만큼 한가하지 않은 목사로 살고 있다. 성도들을 위해 우는 것만으로 너무 힘겹고 벅차다. 그냥 평범하게 목회하는 현장 목사들을 이상한 괴물로 만들거나 취급하지 말라. 목사가 양들과 함께 부대끼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도록 괴롭히지 말라. 왜? 나는 트로트 가수가 아니라 목사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