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가이자 여류 역사학자인 레베카 솔닛은 ‘치마요’로 가는 순례의 길을 경험한 뒤, 이렇게 술회했다.
“순례라는 여행은 무언가를 찾아가는 여행이고, 순례에서 걷는다는 것은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한 노동이다.” (레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반비, 2017년,p,83.)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면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숨 가쁜 노동을 해 온 셈이다. 노동이란 대단히 신성한 행위다. 그 노동의 질이 좋은가, 나쁜가의 평가는 어찌 보면 기득권을 차지한 물리적 힘을 갖고 있는 자들의 편견이나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왜? 노동은 그 자체로서 신성한 것이며, 존중받아야 하는 위대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코로나 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들이 번-아웃이 되어 몸을 축 늘어뜨린 사진을 포털에서 만났다. 대단히 안쓰러운 그림이었지만, 난 그 그림을 보다가 갑자기 피에르 폴 루벤스의 작품인 ‘그리스도의 진노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성 도미니크와 성 프란체스코’라는 성화가 오버랩이 되었다. 그 포털 사진에서 본 의료인들의 번-아웃 사진은 성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마도 바이러스라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대적할 수 없는 괴물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속수무책 쓰러져 나가는 인류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막아내려는 그들이 이 땅의 도미니크요 프란체스코로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 한 주간, 세간의 소리들을 들었다. ‘지친다. 버겁다. 빨리 종식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화가 난다’ 등등.
왜 아니겠는가! 하루도 수없이 멈출 줄 모르는 아우성과 절규함이 소용돌이 쳐 마치 핏빛처럼 변해 내 삶의 여백들을 시퍼렇게 멍들이고 있는데. 마치 괴기영화에나 나올 법한 을씨년스러운 마스크를 쓴 무리들이 떼 광장으로 몰려다니며 공포를 덧칠하고 있는데.
지난 주 여론에 등장한 종교의 탈을 썼지만 종교라는 이름을 차라리 쓰지나 말지! 라는 장탄식을 하게 한 교주의 몰골은 추하다 못해 썩은 내가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서늘했다. 김기석 목사가 말 한 갈파가 그래서 더 깊게 와 닿았다.
“본질을 잃어버린 종교처럼 추한 것은 없다. 추하기만 하면 그래도 다행이다. 추할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김기석,“흔들리며 걷는 길”, 포이에마, 2014년, p,55.)
목사로 산다는 것은 분명 순례하는 삶이다. 솔닛의 말을 적용한다면 순례를 통해 주군이 무엇을 원하는가? 를 찾기 위해 상응하는 노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말은 맞다. 목사로 살고 있는 나는 노동의 내용을 이론이나 형이상학적인 메타포의 한 표현으로 비껴가거나 에두르고 싶지 않다. 도리어 구체적으로 피력하고 싶다. 이렇게 접근하면 과유불급일까!
그 대가는 너나 할 것 없이 분노가 들끓고 있는 이 시대, 남은 목양의 시기 동안 그 분노를 막아내는 목사로 사는 것이라고.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목사의 노동이라면 기꺼이 그 대가를 지불하고 싶다.
지난 주간, 프리랜서 김아리 기자가 쓴 ‘올 어바웃 해피니스’(all about happiness)와 여행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1명의 정신과 전문의, 심리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한 행복 찾기라는 테마를 정리한 책인데 엮은이가 에필로그에서 밝힌 엔딩 멘트가 인상적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관계가 있다. 그 관계 중에 가장 중요한 관계는 무엇일까?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김아리편, “올 어바웃 해피니스”, 김영사, 2019년,p,257.)
그녀의 이 말은 한 주간의 삶의 과정에서 아주 진하게 나를 동여맨 아딧줄이었다. 붙든 아딧줄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나를 몰아세우는 자의적, 타의적 분노로부터 나를 다스려야겠다는 신념이 스멀댔다. 나와의 관계를 잘 맺어야 또 다른 타자와의 관계에서 돌출된 분노를 막는 자가 될 수 있기에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말이 크게 공명되었나 보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전혀 관계하지 않는 자는 죽은 사람이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이현주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19년,p,165.)
조금 더 나를 돌아보아야 하겠다. 치열하게, 냉정하게. 분노를 막아내는 사람인 목사가 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