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라림이 있습니까?
지난 주간, 평상시 같으면 넉넉하게 감당하는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에 많이 힘이 들었습니다. 주초에 있었던 DPA(디사이플 목회 아카데미) 이사 포럼에 참석한 사역 말고는 다른 사역을 아무 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역동적으로 엎드리는 수요 심야기도회를 실시간 방송으로 드렸고, 3월 월삭예배도 동일하게 영상 예배로 드렸습니다. 업무를 마치고 일주일에 3일은 의도적으로 나가 땀을 흘리며 운동하는 탁구도 중단했습니다. 그 좋아하는 목욕도 마음 놓고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들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전화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버릇이 생길 정도로 저희 부부에게 코로나 사태에 대해 민감하라고 당부를 하는 빈도가 높아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너무나 많은 보통의 일들이 무너져 내린 느낌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지난 며칠 대기의 질이 그리 나쁘지 않고 화창했는데도 거리에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얼굴들은 가려져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다 듣게 된 사람들의 이야깃거리들은 모두가 코로나 이야기들로 도배되어 있었습니다. 사람 살아가는 소박한 이야기는 이제 일상에서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더 침울한 것은 이 사태가 언제 즈음 종식될까에 대하여 예측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이런 상태가 더 지속되면 사람들의 정서가 무력해지고 지치지 않을까 대단히 염려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목사인 저는 더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영적 둔감함의 일상화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지금 말하고 싶어 하시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으려는 둔감함 말입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작금의 사태를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세밀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다바르’인데 이것을 무시할까봐 두렵습니다. 지난 주간 읽은 책에서 이런 글에 시선을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대이면서 여전히 절대이시지 않은가!” (양명수, “욥이 말하다.”, 분도출판사,p,201.) 절대적인 자존자이신 주님이 펼치시는 일은 반듯이 상대자인 인간을 향한 메시지가 있다고 저는 배웠고, 양 교수도 이것을 지지하는 것 같아 그의 글을 마음에 담아놓았습니다. 지금 제가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가벼운 인간의 언어로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에 더 깊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민감 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늘, 고통의 터널을 지나면서 이것까지 놓치면 너무 억울하고 아플 것 같아 예민 하려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놓았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그러나 의미심장한 성경 한 구절을 내놓으려고 합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닭울음소리를 듣고 난 이후의 격정을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62) 영어성경의 고전이라고 하는 RSV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And he went out and wept bitterly.”(그는 밖으로 나가 쓰라리게 울었다.)
코로나 19사태라는 전무했던 불행을 경험하면서 나는 베드로에게 주어졌던 ‘쓰라림’이라는 깨달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총으로 남겨졌으면 좋겠습니다. 왜? 이 은총이 없으면 너무 억울하고 분할 것 같아서. 이 글을 읽는 모든 자에게 주군의 은총이 임하기를 화살기도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