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2024-03-07 16:08
작성자 Level 10

2021 8 22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제목

본문마가복음 5:35-43

 

서론)

 

사진 하나를 보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1970 12 7일 독일의 총리를 역임한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태인들의 게토 추모비에 방문했다가 사죄의 무릎을 꿇은 기념비적인 사진입니다.

이 일로 그는 독일의 우파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맹렬한 비판과 공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빌리 브란트의 이 위대한 행동을 본 전 세계는 열광했고 이렇게 평가를 내렸습니다.

브란트가 무릎을 꿇음으로서 독일이 일어섰다.”

무릎을 꿇은 사람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 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후에 브란트 총리에게 여론이 이 용기 있는 행동에 대하여 조명하며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행동을 실천하셨습니까?

그러자 브란트 총리가 답한 내용은 몇 번을 들어도 감동적인 답변이었습니다.

헌화를 하는 순간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인간의 말이 소용없을 때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그의 이 말이 저는 마치 성경에 있는 말씀처럼 여겨지는 존귀한 메시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장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가난한 자들이 돈을 벌어 부자가 된 것을 보면서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공부를 못하던 그 누군가가 열심히 노력하여 우등생의 반열에 섰을 때 성장했다고 평가합니다.

평범한 운동선수가 열심히 노력하여 일등 선수가 되었을 때 그를 성장했다고 평합니다.

우리나라 축구야구대표팀이 이번 올림픽에서 졸전 끝에 국민들을 적지 않게 실망시켜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지칭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성장은 고사하고 뒤로 퇴보했다고.

이런 면에서 성장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고 퇴보했다는 의미는 대단히 비참한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철학적인 성찰이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을 성장제일주의라고 정의하는 데 이런 경우 성장제일주의에 함몰된 성장이라는 화두는 100% 눈에 보이는 성장혹은 숫자적인 성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외적 성장에 매몰되어 오로지 성장 제일주의라는 올무에 빠진다면 도리어 성장은 그것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빌리 브란트의 용기 있는 행동인 무릎을 꿇음으로 독일이 일어섰다.’는 평가는 대단히 주목해야 하는 성장인 일어섬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외면적 성장이 아니라 내적인 성장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전범 국가인 일본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할 수 없는 내적 성장의 모델링이기 때문입니다.

빌리 브란트는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용기를 배울 수 있었을까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빌리 브란트의 믿음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라고 간주해 버릴 것 같아 전제하고자 합니다.

브란트가 갖고 있었던 믿음은 다분히 철학적이며 인간적인 믿음입니다.

도덕적윤리적 믿음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말한다고 할까 뭐 그런 류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 대목에서 오늘 설교에 대한 초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야이로라는 한 유대인 회당장의 12살 된 딸이 죽을병에 걸려 거의 희망을 잃어버린 그를 예수님이 다시 살려 주셨다는 기사입니다.

오늘 본문의 실질적 시작인 마가복음 5:21-23절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와 예수님의 만남에 대한 스토리를 알게 해주는 내레이션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회당장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던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며 제사를 드리던 예루살렘의 헤롯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절기의 축제 때만 올라갈 수 있었고 또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사는 특권층들만을 위한 제의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던 곳이었기에 이스라엘 전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연구하는 장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각 지역마다 율법을 연구하는 장소로 만든 곳이 회당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배경이 가버나움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학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회당장 중의 하나'라고 기록된 의미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가버나움 지역의 회당은 타 지역에 비해 메머드 급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형 회당이었다는 말입니다.

대형 회당에는 당연히 그 회당을 관리하고 돌보아 하는 여러 명의 회당 관리인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회당장 야이로는 바로 그 여러 명의 회당 관리인 중의 수장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에스라 성경대학교 대학원의 양용의 교수의 회당장 설명은 이렇습니다.

"아르키쉬나고고스‘ 번역인 '회당장'은 회당 건물과 예배를 위한 준비를 총괄하는 관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회당에 따라 한 명 또는 여러 명이 있었던 같다." (양용의, “마가복음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p,131.)

적어도 양용의 교수의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야이로는 가버나움 지역의 유대 종교 지도자 중에서 서열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을 전제로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당시의 종교적인 배경을 놓고 볼 때에 엄청난 파격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파격도 파격이지만 더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야이로가 주님에게 와서 행한 신앙적인 반응입니다.

22절 하반절입니다.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헬라어 원어 성경에 보면 '엎드리어'는 핍테이의 번역입니다.

'핍테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납작하게 엎드리는 것' (fell down before him)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유대 회당의 종교 지도자의 수장인 야이로가 나사렛 출신으로 격하시키고 어떻게 하면 트집을 잡아 종교적인 족쇄를 채울까를 고민하고 있는 골칫거리 예수께 와서 납작하게 엎드려 자신의 존재를 낮추고 있는 행위는 당시의 상황으로는 파격의 행보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회당장 야이로가 왜 이렇게 엄청난 파격의 행보를 했습니까?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딸이 병들어 죽을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3절에서 마가는 이렇게 보고 합니다.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마가는 야이로의 딸이 중한 병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누가도 마가의 고백과 동일하게 보고를 합니다.

누가복음 8:42절입니다.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그러나 마가와 누가의 이러한 암시와는 달리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는 야이로의 딸 상태가 조금은 더 심각했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9:18절을 병행하여 보십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마태의 보고는 어떠했습니까?

야이로는 자기의 딸이 방금 죽었다고 보고합니다.

다시 말하면 상황이 이미 끝났다고 보고를 한 것입니다.

종합하면 분명한 것은 야이로의 딸이 죽음을 앞에 두고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는 점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유대 회당의 최고 지도자인 야이로도 자신의 유한성에 대하여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찾아 와서 자신의 부족함을 예수님께 인정하고 그 분의 발아래 엎드려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진정성을 보았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간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있는 곳으로 당신의 거취를 옮기셨습니다.

주님이 옮기시는 어간주변 상황을 마가는 아주 의도적으로 상세하게 표현합니다.

본문 24절입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긴장해야 할 요소가 발견됩니다.

큰 무리입니다.

주님이 이동하는 동선을 따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동선 때문에 예수님의 이동은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에게 가는 동선 중에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으로 더 지체했음을 마가는 보고합니다.

시간의 촉박함을 다투는 야이로에게는 혈루 병을 앓던 여인과 만나 대화하는 예수님의 머묾은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께서 혈루 병을 앓던 여인을 치료하시면서 잠시 지체를 하는 어간에 야이로의 딸이 있었던 동네에서 사람이 찾아와 전언을 다음과 같이 해 주었습니다.

본문 35절입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혈루 병을 앓던 여인을 고치시는 어간 이미 야이로의 딸이 숨이 멈추었다는 보고였습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을 전술했듯이 이제는 그의 딸이 완전히 숨이 끊어진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마가도 보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숨이 끊어졌기에 예수께서 이제는 그곳에 간다고 하더라도 할 일이 없다는 단언함이 들어 있는 보고이기도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마가의 천재적 묘사를 마저 보십시다.

본문 36절 전반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분명히 우리 말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음을 알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성경을 보면 이 부분은 번역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곁에서 들으시고'라고 번역된 '파라쿠오는 원래의 의미가 듣는 것을 아예 '거부하다'의 뜻에 더욱 가깝습니다.

적용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딸이 죽었으니 예수 당신이 할 일이 이제는 없어졌다는 말에 대하여 주님은 듣기를 거부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람들의 말을 주님은 말 같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옆에서 들으신 것이 아니라 아예 거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신 주님께서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믿음을 요구하신 뒤에 그의 딸이 병들어 있는 장소로 가셨습니다.

주님이 도착을 했을 때는 이미 돈을 주고 사서 장례식 때 장송곡을 부르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통곡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울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떠들고 울고 있느냐고 나무라신 주님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선언하자 주님의 말을 동네 사람들이 비웃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다 내 보내시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그의 부모들과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들어가신 뒤에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아람어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달리다 굼"

달리다는 어린 소녀를 의미하는 아람어입니다.

중요한 단어가 그 다음에 등장합니다.

'입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42-43절을 읽겠습니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야이로와 야이로 딸은 해피엔딩으로 주님을 찾아간 결과를 맛봅니다.

그런데 바로 마지막 구절에서 결코 놓치면 안 되는 오늘 설교의 레마를 찾아내겠습니다.

42절에서 야이로 딸이 살아난 것을 본 주인공들이 누구입니까?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예수님과 대화를 하던 야이로에게 딸이 죽었다고 전언한 자들입니다.

딸이 죽었으니 감언이설로 회당장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고 예수께 훈계하던 자들입니다.

야이로의 집에서 슬피 울며 통곡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울지 말라아기가 죽은 게 아니라 잔다고 말하는 예수를 비웃던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전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던 유대 종교에 찌들려 있던 자들입니다.

그랬던 그들의 눈에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죽었다고 확신한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일어난 것뿐만 아니라 음식을 섭취하는 도무지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본문 텍스트의 기자인 마가는 이 얼토당토않게 여겨지는 일을 목도한 사람들의 심리를 기막힌 터치로 묘사합니다.

본문 42절입니다.

크게 놀라고 놀라니라

헬라어 원문에 놀랐다는 이 단어를 우리도 너무나 익숙한 단어로 기록했습니다.

엑스타싼 유뒤스 엑스타세이 메갈레” (They were astonished with a great astonishment.)

우리는 흔히 황홀경에 빠질 때를 엑스터시에 빠졌다고 표현합니다.

바로 이 엑스터시가 회당장의 딸이 살아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늘 설교를 통해 얻게 되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 영적 성장은 종교적 경험(엑스터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시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종교적 경험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보다 더 많이 한 객체가 있을까?

애굽에서 보았던 10가지 재앙을 필두로 광야에서 보았던 수없이 많은 종교적 경험이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너무 많아 꼭 집어서 설명하기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적을 베푸실 때마다 잔인하게 하나님을 배신하였다는 점입니다.

마약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육체적인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해 주는 도구입니다.

허나 마약을 두 번 맞을 때는 용량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마약의 공포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셨던 종교적 경험을 은혜로 받지 않고 마약처럼 사용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결국은 그분이 보내신 아들까지 죽인 것입니다.

종교적 경험은 나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경험을 우상화할 때 퇴보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을 성숙하게 하여 쿰 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무엇일까요?

본문 36절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옆에서 딸이 죽었다고 부화뇌동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웃거리지 말 것을 요구한 주께서 야이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해라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진의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의 중요한 의도는 내가 하는 일에 주목하라는 권고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성장은 주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주목할 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물이 없다고 불만을 터뜨립니다.

이 불만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마라에서도 그랬고신 광야에서도 불평과 불만은 이어졌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물을 주셨고만나를 주셨습니다.

르비딤도 똑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또 물이 부족하자 불만을 터뜨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셔서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7:6절입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모세가 순종하여 반석을 쳤더니 물이 반석에서 흘러나와 이스라엘을 만족시켰습니다.

이 구절에는 소름끼치는 감동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다그러나 모세는 반석 위에 선 하나님을 보았다.”

기막힌 성찰입니다.

일어나고 싶습니까?

쿰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를 보지 말고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을 보십시오.

펜데믹 상황이 악화되어 선제적으로 교회 대면 예배를 폐했다가 다시 교회 문을 열었을 때였습니다.

당시 전담 부교역자가 없어서 제가 새벽예배 운행을 할 때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차량에  맨 마지막으로 내리시는 교우가 故 유영남 권사였습니다.

그날도 맨 마지막으로 권사님이 내리시기에 임영애 권사님을 하차 해 드리고 장락동으로 가는 어간권사님께서 이렇게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매장에 나가서 일을 하면 이제는 발을 옮기기가 너무 힘들어요그런데도 매장에 죽기를 각오하고 나가는 이유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그래야 매장에 계시니까요.”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권사님그건 신학적으로 틀린 거 에요주님은 어디나 계시기 때문에 권사님이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계시는 분이라 매장에 안 나가셔도 홍굴 부추 칼국수에 주님이 계셔요그러니 집에서 그냥 쉬세요.”

반대로 이렇게 말해 드렸습니다.

그럼요권사님이 계셔야 주님이 더 가까이 계시죠.”

이단 목사 나왔다고 교단 총회에 고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럴 때는 신학이 맞지 않습니다비신학적인 해석이 맞습니다.

일어나고 싶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어서 일어나고 싶습니까?

고통 가운데 있어 견딜 수 없이 힘드십니까?

주님이 그런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기 바란다내가 너를 위해 일하는 것을 보기 바란다나에게 집중하기를 바란다.“

그런 뒤에 나에게 선포하십니다.

’ 하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유영남 권사님의 장례를 인도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듣고 불렀던 찬양이 있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고 신학교에 들었을 때신학교가 제 삶의 해답이 되어 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는 제게 더 큰 실망과 아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여러 가지의 실망거리들이 나를 옥죄며 달려들었습니다.

해서 내가 선택한 신학교 편입학이 옳은 것인지를 확인하고자 하남에 있는 기도원에 올라가서 텅 비어 있는 대 예배실에 무릎을 꿇었는데 마침 잔잔한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명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난 어제나 오늘이나 늘 네 하나님이다나를 바라보아라

이 찬양과 조명을 들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후 하나님께 다시 붙들리고 산에서 내려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늘 이 찬양을 함께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 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 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 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고 늘 지켜주시네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이 일하심에 주목하십시다.

주목하는 자에게 쿰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저는 쿰의 은혜가 우리 교우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