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독립군으로 살고 있습니까?
본문: 신명기 8:1-11 서론) 도쿄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한국 올림픽 대표 팀이 머문 숙소에 일본을 자극하는 플랜카드가 내걸렸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 일본이 발끈했고, IOC는 이 문구가 올림픽 정신에 배치되기에 내리라고 유권해석을 했고, 결국 대승적 차원에서 플랜카드를 내리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일련의 일들을 뉴스를 통하여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에게 있어서 이순신 장군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치욕의 트라우마를 안겨준 인물이다.” 일본인들이 이순신 장군을 말할 때 한국인들이 ‘반일영웅’이라고 지칭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는데 정답입니다. 반일영웅, 정말로 기막힌 정의입니다. 일본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극도로 폄하하기 위해 이런 단어를 썼지만, 그 반대의 역설로 의미를 해석하면 정말로 이순신 장군은 일본을 반대했던 우리들의 정신적 대명사인 것이 분명하기에 반일영웅이라는 단어는 기가 막힌 역설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명언입니다. 우리는 일본이라는 나라와 무언가 숙명적인 대결을 앞두면 항상 이순신 장군을 역사 안으로 다시 초대합니다. 왜 그를 다시 역사의 무대 복판으로 올립니까? 그를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정신을 기억해 내겠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입니다. 3년 전, 배우 최민식씨가 열연한 영화 ‘명량’을 보다가 우유부단했던 왕 선조에게 상소를 올리는 편지를 쓰면서 내레이션으로 공명했던 그의 독백이 저를 울컥하게 했습니다. “신이 살아 있는 한 적들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오늘은 36년간의 일제강점기에서 완전한 자주권의 독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치하에서 해방을 맞이한 지 71주년이 되는 8,15 광복절입니다. 오늘을 기념하여 내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며 다시 한 번 나라 사랑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귀한 주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더 한 발을 내딛기를 원하는 데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군의 독립 정신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영적인 독립군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나누며 8,15 광복주일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새기고자 합니다. 본론) 우리가 흔히 모세오경이라고 부르는 구약성경 앞에 배열되어 있는 토라의 5번째 책을 가리켜 申命記라고 합니다. 이 다섯 번째의 책의 이름대로 신명기는 하나님의 율법을 되풀이해서(申) 설명하고 있는 율법서입니다. 그렇다면 신명기가 말하고 있는 되풀이 한 율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40년간 광야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우역곡절을 겪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모세의 진두지휘 하에서 드디어 가나안땅을 목전에 둔 모압 평지에 도착을 합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출애굽기 19-20장에서 시내 산 계약을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과 맺었습니다. 이 시내 산 언약은 출애굽기 19장부터 시작해서 레위기 전체 그리고 민수기 10:10절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소위 말하는 토라입니다. 이렇게 맺어진 시내 산의 토라는 신명기 29:1절에서 다시 한 번 재확인의 언약을 맺는 것으로 이어지는 데 소위 말하는 ‘모압 언약’입니다.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이 모압 언약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하는 언약 즉 율법을 상기하는 토라 확인이라고 보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어 기록된 민수기 10:11절부터 신명기 28:68절까지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을 다시 한 번 이스라엘 선민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상기시키고 확인하는 메시지들로 구성되어 있는 본문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전하는 두 번째의 율법 설교이자 복기일 것입니다. 이 해석을 전제하면서 본문을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언제나 모세가 공동체를 향하여 확인 또 확인한 메시지의 강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 준수라는 대 명제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 뒤에 모세는 본문 2절에서 아주 중요한 율법 준수라는 강령의 행동지침을 세밀하게 선포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이렇게 설교합니다. 너희들의 하나님께서 지난 40년 광야 생활동안 너희들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상기시킵니다. 여기에 기록된 ‘기억하라’는 히브리어 ‘자카르’의 번역입니다. ‘자카르’라는 단어를 가장 잘 설명한 의미는 할례 의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낳은 지 8일이 되면 남성 생식기의 겉 표피를 잘라버립니다. 소위 말하는 할례 예식입니다. 날카로운 칼로 무언가 흔적을 남기기 위해 자르는 것을 ‘자카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달리 본인들이 행한 할례의 흔적을 보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안으시고 업어 주셔서 광야를 통과한 선민 공동체임을 언제나 기억해 내는 영적 자존감을 상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단 하루도 광야에서 잊지 않으셨던 공동체이었음을 본문 3절 이하는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알려줍니다. 3절 본문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만나를 먹이심으로 인간은 떡으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각성시키셨다고 말합니다. 4절에서는 지난 40년을 광야에서 살면서 하나님은 당신의 선민공동체를 입히셨던 주군이심도 분명히 했습니다. 5-6절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지 말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7-10절은 감동의 압권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가나안이라는 선물을 주심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단 한 번도 외면하시거나 무관심하지 않았음을 토로하셨고, 그 관심의 절정이 약속의 땅으로의 진입임을 분명히 천명하셨습니다. 모세가 왜 하나님의 이 일하심을 세밀하게 열거하고 있습니까? 이 하나님의 일하심과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에 장기기증 코디네이터 신혜림씨가 게스트로 초대되었습니다. 뇌사자들의 유족들을 설득하여 죽어가는 장기를 적출하는 상담자로서의 애환을 그녀에게 듣다가 울컥하는 전언을 만났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뇌사 판명을 받고 그의 장기를 이식 받아 새로운 생명을 살고 있는 참 많은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장기를 이식 받아 기적적인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많은 분들이 처음에는 장기를 이식 받고 기뻐하며 감사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장기 이식의 혜택을 잊고 사는 경우들이 허다하다고 피력했습니다. 그녀는 강하게 강조하며 말했습니다. 장기를 이식 받아 새로운 삶을 사는 분들은 생명을 주고 떠난 분들의 그 소중한 가치를 평생 잊지 않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바란다고. 기억하고 사는 것이 보답하는 것임을 역설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내가 주로부터 받은 전적인 은혜를 잊지 않고 살고 있느냐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은혜 받은 자로서 삶을 살아내고 있냐를 매일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언어로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내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살아내지 않는다면 그건 공허한 메아리와 같은 헛소리입니다.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만주 벌판에서, 혹은 러시아에서, 그리고 이역만리에서 일본과 싸웠던 선조들은 말이 아닌 삶으로 당신들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왜 이들이 외롭고 힘든 일이지만 지속적으로 투쟁했습니까? 국가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자주권 회복을 바라보며 독립된 대한민국을 단 하루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소회가 밀려왔습니다. 신앙의 독립군도 존재한다. 누가 신앙의 독립군입니까? ※ 영적 독립군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날마다 기억하며 사는 자입니다. 어제 새벽 큐티를 통해 나눈 요절이 있습니다. 가나안 입성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는 습관적인 범죄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은혜를 무감각적으로 무시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무감각적이고 습관적인 범죄의 순환적 사이클은 대단히 유감스럽게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게 8년을, 모압에게 18년을, 가나안에게 20년을 고통 받게 하셨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개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를 사용하셔서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허나 이런 하나님의 구원을 또 이스라엘이 무시하고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미디안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미디안에게 당하는 고통은 이전 고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토굴, 땅굴을 만들어 숨어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이 극에 달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절규하며 구원을 요청합니다. 습관적인 죄의 답습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기드온 사사를 부르시기 전에, 한 선지자를 먼저 이스라엘에게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하셨던 일을 사사기 6:8-10절에서 사사기 기자는 이렇게 천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선지자가 습관적으로 범죄 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경고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은혜의 망각이었습니다. 배은망덕이었습니다. 건져냈고, 쫓아냈고, 주었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 주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의 부름으로 교우들에게 낭독한 출애굽기 20:1-2절은 십계명의 서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1월 14일에 애굽에서 출발하여 3월 1일에 시내 산에 도착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그 날 이후 3일 후에 십계명을 받습니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의 전문 중에 서언에서 강조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시내 산 이곳까지 너희를 인도해 낸 주체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로 나 하나님이라는 정의였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신앙적 정체성이라는 말입니다. 시내 산에서 분명하셨던 이 이스라엘 공동체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정체성을 오늘 본문 신명기에도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낸 은혜의 복기와 상기를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는 이 은혜를 날마다 복기하는 자입니다. 신앙의 독립을 이루려면 언제나 주님의 이 은혜를 곱씹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 선포한 두 번째의 설교에서 쐐기를 박습니다. 신명기 8:11절은 증언합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은혜를 상기했던 신앙적 모델링을 성경의 내증에서 찾아보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누가복음 17:11절 이하에 기록된 열 명의 한센 병 환자들에 대한 기사를 인용합니다. 누가복음 17:15-19절을 읽겠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잘 아시는 것처럼 한센 질병에서 고침 받은 사마리아 출신의 병자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 자기 병이 나았음을 알고 길에서 돌이켜 예수께서 돌아가서 그분께 감사했다고 누가복음 기자는 보고합니다. 자기의 질병을 고침 받기 위해 신앙의 여정에는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길 끝에서 자기가 믿는 신앙의 주체에게 자기의 연약함을 알리는 종교적 행위는 마땅히 믿는 자의 몫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통의 종교적인 리액션은 웬만한 신앙의 경륜이 있으면 흉내 낼 수 있고 같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갑각류 그리스도인이나,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카리스테오’ 즉 사례하는 행위입니다. 개역판은 누가복음 17:15절에 기록되어 있는 ‘유카리스테오’를 ‘감사하다’가 아니라 ‘사례하니’로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독립을 이루지 못한 자들은 결코 유카리스테오를 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으로부터 한센 병을 고침 받고 나머지 아홉과는 달리 주님께 돌아올 수 있었던 그 환자는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세인 교우들이 개인적인 성숙을 경험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독립군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믿음의 홀로서기에서 올곧게 서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받은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날마다 은혜를 복기해야 합니다.
결론) 지난 주간, 저녁 운동에 나갔다가 우연히 듣게 된 복음찬양이 있었습니다. 찬양의 멜로디도 은혜로웠지만 들리는 가사에 흠뻑 젖었습니다. 찬양의 가사는 제게 이렇게 들렸습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가사 중에 저를 울컥하게 했던 노랫말은 이 부분이었습니다.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정말로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삶 속에서 당연하게 주어진 것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영적인 독립군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