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8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제목: 우십시다. 본문: 사사기 2:1-5 서론) 지난 주간에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소개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 때문에 슬퍼할 수는 있다. 그렇다. 나는 슬퍼할 것이다. 나는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내 눈물로 채울 것이다. 신약성경의 기준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예배하는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을 때, 내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설득할 수 없다 할지라도 나는 적어도 그들을 위해 울 수 있다. 만일 우는 것조차 할 수 없다면 탄식이라도 할 것이다. 나는 장차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 자신이 어떻게 할지는 분명히 안다. 나는 하나님의 양떼를 배반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그들에게 거짓말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온갖 종류의 세상 이야기를 동원하여 그들의 관심을 끌어 그들을 몰아가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타임’ 지의 기사를 소재 삼아 설교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다. 텅 빈 교회에서라도 말씀을 전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가증한 일들 때문에 울 것이다.” (아이든 토저, “세상에 무릎을 꿇지 말라”, 규장, pp,175-176.) 20세기 선지자라고 불리던 에이든 토저의 사자후입니다. 토저를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은 목회의 대상자들을 위해 우는 목회만이 진정성이 있는 목회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울 수 있는 목회자는 절대로 본질을 잃지 않을뿐더러 목회 성공이라는 우상 때문에 딴 짓 하지 않는다는 토저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사도행전 20:17-1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세우는 데 들어갔던 대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참음, 그리고 주를 섬긴 것이라고 토로했습니다. 제가 아주 젊었을 때에 언젠가 선배 목사께서 목회자가 가져야 할 세 가지의 액체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입니다. 목회를 30년 이상 하다 보니 선배가 말한 이 내용이 얼마나 절절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울 수 있는 목사가 있는 교회는 건강합니다. 울 수 있는 성도가 섬기는 교회는 아름답습니다. 울어야 하는 데 울음을 상실한 교회는 공동묘지요, 그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는 송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오늘은 울음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지난 주간, 새벽에 나누고 있는 큐티 본문 중에 다시 나를 흔들어 놓았던 본문입니다. 담임목사를 흔든 것처럼, 세인 공동체를 요동하게 만들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다시 주일 오전 예배를 통해 복기하려고 합니다. 본문은 사사 시대로 넘어가기에 앞서서 여호수아 시대의 영적 상태를 신명기 역사가가 진단하는 중요한 텍스트입니다. 신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복음주의권의 구약학자들이 여호수아의 죽음의 시기를 통상적으로 주전 1170 년경으로 해석합니다. 이 연대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죽음의 시기는 곧바로 사사 시대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사사 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시기인 1170년 이후부터 시작이 됩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가나안에 정착해서 사울을 통해 왕정 정치가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왕국시대 전까지라고 봅니다. 사울이 왕으로 등극한 시기를 주전 1050년으로 학자들이 동의하는데 이런 산술적인 계산에 의하면 사사시대는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논란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BC 1170년-1050년 사이이기에 약 120년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물론 이러한 연대적인 산출은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신학자들은 사사시대의 연대적 구분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가나 정복 시기로부터 사무엘의 등장까지로 외연을 확대하여 넓게는 약 350-400년 정도의 기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선 이해로 전제하면서 오늘 시대적인 상황을 잠시 정리하겠습니다. 본문의 배경인 2장은 본격적인 사사 시대로 돌입하기에 앞서 있는 전 시대를 배경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여호수아의 죽음의 시기를 주전 1170년으로 동의할 때 그 전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영적 분위기를 담고 있는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2:6-10절에 여호수아의 죽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추측은 여호수아의 죽음이 임박했을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태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작은 조금 우울합니다. 본문 1절이 이것을 시사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무슨 말입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광야에서 탈출한 1세대가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포함한 제 2세대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정복 초기 시대에서 시작하여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사시대를 전방위적으로 경험하게 될 세대들입니다. 2세대들의 초기는 우울하기는 했지만 그런 데로 희망이 보였던 세대였습니다. 증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경고하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전한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두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① 나는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대로 조상(아브라함)의 때에 약속했던 가나안으로 너희들을 이끌어 들어오게 했다. ② 이미 맺은 언약은 결코 앞으로도 어기지 않을 것이다. 창세기 17:8-9절입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이 약속을 호리라도 허점이 없이 성취하셨음을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재확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확인을 마치신 뒤에 이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기소하는 기소문을 하나님의 사자에게 낭독하게 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기소하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① 가나안 주민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한 것을 어겼다는 것. ② 가나안의 제단을 헐라고 했는데 거절했다는 것. ③ 하나님이 행하신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것. 위에 언급한 세 가지를 종합하면 무엇이 됩니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깨뜨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켰는데 너희들이 깨뜨렸다는 기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대적인 배경이 되는 여호수아 말기 즉 사사시대로 넘어가기에 앞선 바로 그 직전 시대의 영적 상태는 하나님이 지키셨던 언약을 보기 좋게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파기한 시대였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렇게 배신을 당하신 하나님이 본문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리신 징계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내용을 3절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세 가지로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였음을 사사기 기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더 이상 쫒아내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징계입니다. ② 그 거민들이 너희들을 괴롭히는 가시가 되게 할 것이다. ③ 가나안의 신들이 너희들의 올무가 될 것이다. 그러자 그 징계의 내용을 받은 여호수아 말년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반응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본문 4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이 구절에 ‘운지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바카’는 문자적인 의미가 ‘통곡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운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운 것입니다. 누가 울었습니까? 주목하셔야 하는 해석입니다. 아직은 사사시대로 넘어가지 않은 바로 그 직전의 세대가 울었다고 했습니다. 설교자는 바로 이 대목에서 아주 세밀한 교훈을 받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바카’ 는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면 ‘통곡하는 자들’ 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경고를 받은 이들이 통곡한 뒤에 취한 영적 행동을 추적합시다. 본문 마지막 5절입니다.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성 메시지를 받은 여호수아의 말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곡한 장소를 보킴이라고 정했다고 했는데 학자들에 의하면 보킴이 어느 지역을 말하는 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보킴이 바카와 관련이 있는 단어임을 역사가가 암시한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보킴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독자들이자 신앙의 후배들인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선명하다는 것에 충분히 만족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지적한 죄에 대하여 인정하고 통곡하며 울었던 보킴에서 그들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고 신명기 역사가는 보고합니다. ‘바카’ 하는 자의 회복은 예배로 점철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두 가지의 이유 때문에 바카 해야 합니다. 1) 주님이 흘리시는 눈물 때문에 나도 울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33-35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흔히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친구였던 나사로가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늦게 도착하시는 바람에 나사로 죽게 되었고, 그의 누이 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르다가 주님에게 자조 섞인 원망을 담아 눈물을 보이자 주님도 함께 우셨다고 해석하는 전통적인 해석 말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 죽음 앞에서 흘리신 주님의 눈물은 미안함의 눈물이 아닙니다. 도리어 주님이 흘리신 눈물은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지인들까지 모두를 포함한 자들의 불신앙으로 인한 눈물이었습니다. 내가 현장에 있는데,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고 이미 포기한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자들을 바라보며 흘리신 주님의 눈물을 복기하면서 나의 신앙적 자아를 점검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기사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0-44절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주님이 나의 불신앙으로 인해 흘리시는 눈물을 인식하고 나 또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은 생뚱맞은 성경의 내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2:21-22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읽어드린 메시지의 정황이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이 밧세바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잉태한 아이를 하나님이 치시자 다윗이 7일 동안 금식하면서 울고 기도했습니다. 아이를 살려달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아이를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러자 7일 만에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다윗이 다시 일어나 정상적인 국정으로 돌아오자 너무 이상하게 생각한 신하들이 다윗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지난 7일 동안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울었던 주군께서 죽자마자 정상으로 돌아온 이유가 궁금하다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답변합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 내가 울면서 기도한 것은 혹시나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기를 간구한 것이지만 이제 아이가 죽었으니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기도를 중단하고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응대합니다. 이 성경의 스토리를 통해 저는 정말로 생뚱맞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다윗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울었다는 ‘울다’가 오늘 본문에 기록된 보김에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울었던 그 ‘바카’ 즉 통곡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 운 것은 그냥 형식적이며 요식적으로 운 것이 아니라 통곡하며 운 것이며, 그 울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돌려보려고 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다윗이 왜 ‘바카’했습니까? 저는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그의 통곡은 간음이라는 하나님이 정말로 싫어하는 사악한 행위로 낳은 아들을 살리기 위한 통곡과 더불어 단순히 아들을 살리기 위한 통곡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행동을 한 자신에 대한 철저한 마음의 찢음의 바카였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즉 다시 말해 다윗이 드렸던 통곡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저버렸던 본인의 통회를 담은 울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통곡이었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등장한 여호수아 생전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신들이 깨뜨렸던 언약의 파기를 진정성 있게 시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잊었고, 인도하심도 망각했음도 인정했습니다. 이 인정은 곧 통곡하는 회개로 이어졌습니다. 그 회개의 열매로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우시는 아픔을 헤아리고 우는 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경고하심에 경책하여 통곡하고 예배하는 자리로 복귀합니다. 우리 세인 공동체는 언제나 보김의 자리에 있기를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2) 시대의 아픔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로마서는 12장부터 구원 받은 백성들의 구체적 삶의 행동 강령들을 제시합니다. 적어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백성들이라면 구원 받기 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거나 아니면 무관심 그 자체로 생각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이제부터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바울이 분명히 고지합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 설교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15절입니다. 주후 1세기 최대의 문명 도시이자, 패권국가의 수도였던 로마는 ‘팍스 로마나’로 변장한 대단히 사탄적인 국가였습니다. 로마라는 국가 권력에 복종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변질된 평화를 주창하던 시대였고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힘의 권력의 절정인 로마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던 민중들이 즐비했습니다. 노예가 그랬고, 여성이 그랬으며, 로마의 시민권이 없었던 변방의 이방인들이 그랬습니다. 노동자 그룹, 농로들이 이런 착취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착취당하는 그룹들은 언제나 울음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모순과 부조리가 팽배했던 로마를 너무 잘 알았기에 로마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당부한 것입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 구절은 단순이 우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바울은 당부는 시대의 아픔을 보듬고 울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41절을 소개합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베다니 근처에 머무시다가 잘 아시는 것처럼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일 먼저 주님이 보이신 반응은 우신 것입니다. 학자들은 공히 예수님이 우신 이유를 주후 70년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초토화될 예루살렘을 생각하고 우셨다고 해석합니다. 여기에 ‘울다.’ 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에클라우센’을 구약의 단어로 바꾸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카’(울다)입니다. 주님이 ‘바카’ 하신 이유는 시대의 아픔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말 많고 탈 많은 도쿄 올림픽이 막을 내립니다. 이번 올림픽 과정에서 단연 톱 이슈는 양궁 3관왕을 거머쥔 안산 선수의 페미 논란입니다. 쇼 커트를 한 안산선수, 광주에서 여대를 다니는 안산, 남성들을 폄훼했다는 경험을 들어 그녀는 극단의 페미니스트라고 공격하며 금메달을 박탈해야 한다는 아웃사이더들의 공격이 좀비처럼 그녀를 공격하고 있어 적지 않은 상처를 이미 남겼습니다. 불과 17세 밖에 안 된 앳된 어린 소녀 탁구선수인 신유빈 선수의 경기 장면을 캡처하여 자기들의 SNS에 올리며 성적인 희롱을 한 단체가 이번에 무더기로 고발당하게 되었습니다. 남자 야구 선수단이 최악의 성적을 냈습니다. 물론 과정 자체는 아름답지 않았고, 경기과정도 정신적으로 100%라고는 칭찬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번 남자 야구 선수단을 향한 언어폭력은 칼로 찌르지만 않았지 거의 살인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올림픽에 나가서 지기를 원하는 선수가 있겠습니까? 패배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아량이라고는 1도 없는 무자비한 아비규환의 지옥과도 같아 보입니다. 왜 이 세상이 이리도 험악해졌을까? 시대의 아픔을 몰라라한 교회와 성도의 책임이 큽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말씀을 경홀히 여긴 교회와 신자들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탄적인 악의 행태를 바라보면서도 나와 관계없으면 고개를 저었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직무유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설교의 서두에 소개한 아이든 토저의 첫 문장처럼 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 때문에 슬퍼할 수는 있다. 그렇다. 나는 슬퍼할 것이다. 나는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내 눈물로 채울 것이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울음이 멎어 있는 시대입니다. 누군가가 울면 청승 떨지 말라고 공격하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진정성을 갖고 우는 자들에게 악어의 눈물을 집어치우라고 비난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한 가지를 잊지 마십시다. 교회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시대를 보듬어 울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을. 이것만은 잊지 마십시다. 오늘 내가 한 번 주님의 마음을 품고 울면, 울어야 할 내 사랑하는 지체가 울지 않아도 되는 일이 임한다는 것을.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보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 시대를 붙들고 울 수 있는 주인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흘린 눈물은 십자가의 무거움이 아니라오 우리의 무지함으로 아파하시며 흘리신 눈물이었소 골고다 그 언덕길을 우리 위해 걸어야 했던 그는 비난과 손가락질에 물과 피를 흘려야 했건만 험난한 주님의 십자가 몹시나 무거웠건만 우리의 비난과 채찍에 재물 돼야 했던 주님의 아파하심으로 나 구원 얻었으니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이 한 몸 받치리다 당신은 알고 있나요 죽음으로 사랑을 하신 것을 우리의 주님께서 자기 몸 다하여 죄인을 사랑 하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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