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제목: 무엇을 버렸습니까? 본문: 빌립보서 3:3-9 서론) “왜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물건을 수집하는 데 열중하는 것일까? 일단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보다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면 마음도 편해지기에 물질 축적에 집착한다.” (고이케 유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21세기북스,p,161.) 일본 불교계의 아이돌 스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고이케 유노스케의 말입니다. 도쿄대학을 졸업한 수재인데도 불구하고 출가하여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적지 않은 종교적 영향을 주고 있는 신세대 승려인 유노스케의 말은 실은 아주 평범한 진단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오늘 교우들에게 인용한 이유는 설교 제목과 연관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말을 제가 동의한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왠지 모르게 본인 스스로가 가치가 있는 자라고 착각하게 된다는 지적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몸을 명품으로 도배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명품이 아니라면 그 명품들은 그를 더 천박하게 만드는 갑각들이지 않겠습니까? 이 의미를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던 우리나라 최고의 소설가라고 평가해도 전혀 지나침이 없는 故 박경리 작가가 그래서 이런 글을 쓴 것 같습니다. “그 세월, 그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래서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 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 p,16)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그녀는 갔지만 왜 거인으로 박경리를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잠시 설명하고자 합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에 있는 형제들에게 자신의 과거에 행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4-6절을 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세속적인 이력서를 빌립보 교우들에게 적시합니다. 그의 이력서 내용은 그동안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갖춘 것들이었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세속적 스펙입니다. 철저한 유대 신앙인으로서의 기초 자격인 할례를 태어난 지 8일 만에 받았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직계 후손이라는 뼈대 있는 가문인 베냐민 지파 출신임도 밝혔습니다. 순수 히브리 혈통을 가졌음은 물론 율법적으로는 당대의 가장 name value가 높게 형성되어 있었던 바리새파였고, 동시에 그는 유대 종교적 열심을 갖고 있었기에 당대 종교의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율법의 강령에 조금도 흠 잡힐 만한 일을 하지 않았던 촉망받던 바리새파 종교지도자였다는 점을 분명히 편지로 빌립보 교회의 지체들에게 전언합니다. 이랬던 바울이 박해의 대상이었던 예수를 다메섹에서 만났습니다. 이후 그의 인생은 대전환을 이룹니다. 어떤 전환입니까? 본문이 이 질문에 답을 줍니다. 7절을 복기하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이 구절을 조금 깊이 묵상하다가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버리고 얻은 것에 대한 새로운 성찰입니다. 바울이 버린 것에 대한 의미는 제게는 놀라운 감동이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바울은 갖고 있었던 것이 많았습니다. 그는 그가 갖고 있었던 것들이 본인에게 대단히 유익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익 함들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문자로 기록되어 있기에 교우들이 의미 없이 지나칠까봐 대단히 염려됩니다. 지나치면 안 되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이 ‘메시지’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저 낡은 생활 방식과 관련 된 모든 것-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속속히 썩었으니 내다 버리십시오.” (메시지 번역, 에베소서 4:22) 버리는 것에 과감하지 않으면 우리는 욕심에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소유는 결코 인간의 가치를 높여주는 하드웨어가 아닙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누가복음 5:11절에 나오는 베드로와 더불어 그와 같이 있었던 자들(요한과 안드레로 추측)이 주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첫 번째 미션을 받는 장소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취한 행동을 누가가 이렇게 보고한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고백한 말과 너무 흡사한 반응이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결심한 예수의 팔로워들이라면 제일 먼저 단절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은 배들을 육지에 댄 뒤에 그들이 갖고 있었던 모든 것을 버린 뒤에 예수를 쫓았다고 보고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배는 그들의 삶을 책임지던 유익한 것들이었습니다.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제자들이 이 유익한 것들을 버렸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출발은 중간지대를 용인해 주지 않습니다. 무익한 것만 버리고 따라와도 된다고 타협하지 않습니다. 대단히 불편하고 유감스럽지만 너에게 유익한 것도 버리고 따라와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바울은 주님을 얻기 위해 유익한 것까지도 과감히 버렸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창세기 19: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롯의 아내가 보았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왜 그녀는 소돔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까? 에스겔 예언자의 정보를 빌려 보십시다. 에스겔 16:48-50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우 소돔 곧 그와 그의 딸들은 너와 네 딸들의 행위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녀가 집착한 것은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었습니다. 아마도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은 롯의 아내에게는 유익의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예리하게 분석하십시다. 롯이나, 그녀의 두 딸이나, 롯의 아내나 아마도 추측하기로는 소돔의 풍족함을 누리며 살았기에 썩어져가는 욕심의 유혹에 있어서 그리 큰 차이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류 인생의 판가름은 소알로 가는 동안 완전히 버렸는가? 아니면 버리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영적 도전을 삼고자 합니다. ※ 신앙의 경주는 주님을 위해 나의 유익한 것마저도 버리는 결단입니다. 본문 8-9절을 읽겠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어떤 비평가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바울이 대단히 편협한 사고 구조를 가진 자라고 혹평하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 극단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본문에서 고백한 고백은 언어적인 유희나 수사학적인 에두름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가 직접 경험했던 체험적 신앙의 발로이며 삶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2장을 읽다보면 짜릿한 감동이 임하는 기사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다메섹 회심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많은 사람이 염려했던 예루살렘에는 변절자 바울을 죽이겠다고 식음을 전폐하며 바울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예상했던 대로 그들 무리에게 체포를 당해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런 위기를 맞게 된 바울은 당시 치안을 담당하던 천부장이 혹시나 모를 소요 사건에 대비하여 자기의 관할이었던 영내로 일단 바울의 신병을 인도하여 끌고 가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바울이 천부장에게 요구하여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회심했던 이야기 즉 간증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22장에서 바울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2번(22장, 26장)의 회심 간증 중에 첫 번째 스토리의 과정을 낱낱이 밝힙니다. 바울은 본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과정을 절절하게 선포합니다. 그가 회심 이후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을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주께서 바울에게 조명해 주신 메시지를 사도행전 22:17-20절이 이렇게 보고합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주님이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전언하셨습니까? 회심의 내용을 유대인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주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네가 그들에게 전해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불행한 예고 말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회심의 메시지를 전하면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예고편과 같은 알림이었습니다. 바울은 본인에게 대단히 불리한 전언을 고지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감동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전언에 동의하고 고난의 길을 걸어갔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팩트를 받아들였다는 이 메시지가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입니까? 내게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하지 않겠다는 신앙적 결의입니다. 예언자 요나는 오늘의 사고로 접근할 때 대단히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향하여 구원의 프로젝트를 갖고 계시다는 것을 이미 알고 하나님께 반항했던 편협한 국수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거국적인 회개 운동에 동참한 니느웨를 구원하셨습니다. 요나의 활동 연대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에 의하면 주전 4세기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하나님의 선민공동체였던 북 왕국 이스라엘이 처참하게 망한 그 스토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랬던 그였기에 동족을 멸한 앗수르를 용서할 수 없었음은 인지상정입니다. 요나의 시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용서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나가 알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앗수르를 용서하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팩트였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다시스로 피신한 것은 어떤 의미로 볼 때 예언자적인 선택이자 히브리 정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앗수르를 향한 회개요, 구원함이었습니다. 서로 대척점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이 명심할 것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요나 4:12절입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된 앗수르의 구원이 하나님께는 정당했고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요나의 패착은 본인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는 판단이 하나님 앞에서는 옳지 않음 것임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이기적인 태도였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분명히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다시 본문 7-9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나는 우리 교우들도 이 믿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믿음은 내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임을 인지하는 믿음 말입니다. 오늘 이런 설교를 목사가 하면 교우들 중에 상당수가 이런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미친 목사 아냐!” 19-20세기를 걸쳐 살았던 미친 목사의 메시지를 하나 소개합니다. “그 분이 미워하시는 것이라면 당신의 아내가 좋아하는 것이 할지라도 버려라. 당신의 남편이 사랑하는 것이라도 버려라. 당신이 속한 계급이나 제도가 용납하는 것이라도 물리치라. 악이요, 잘못된 것이라면, 우리의 거룩하고 의로운 구주께 불쾌감을 드리는 것이라면,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단호히 버리고 거부하라” (아이든 토저, “JESUS", 규장, pp,136-137) 아이든 토저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버렸는가?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버렸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마크 뷰캐넌 목사의 일침을 소개하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돌연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 생활에 돌진해 오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호출할 때까지 천천히 배회하시면서 안전하게 거리를 유지해 주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충실할 수 있도록 후원하시면서 다만 멀리서 지켜보시기를 원한다.” (마크 뷰캐넌, “열렬함”, 규장, p,121.)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세인교회라는 공동체 안에도 이런 자들이 넘쳐납니다. 유익한 것을 주시려면 내게로 마음껏 돌진하여 들어오시라고 대 환영하면서도, 유익한 것이 아니면 결코 들어오면 안 된다고 손 사례 치는 어처구니없는 신자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변장하여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그런 분이 아닙니까?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유익한 것만 요구하는 자들은 절대로 그리스도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갖고 있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마그나카르타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받아 잃어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우리가 나눌때에 그들 알겠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