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8:35-39
제목: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서론)
짧은 영상 하나 보겠습니다.
(영상 시청)
개를 사랑하는 세태가 되니 개도 스스로 대우받으려고 하고 영악해지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명절을 맞이해서 아버님과 어머님이 모셔져 있는 이천 호국원에 아내와 함께 다녀왔습니다.
추도식을 마치고 부모님이 모셔져 있는 블록에서 차가 주차되어 있는 장소까지 걸어 내려오는 데 한 중년 여인이 잔뜩 화가 나서 막 소리를 지르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호국원 내에서 조경을 담당하는 직원이 1톤 트럭에 개를 한 마리 묶어서 운행을 하였는데 개가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을 본 그 여성이 소리를 친 것입니다.
저런 자식은 동물 학대 죄로 당장 고소해야 한다며 들고 있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신고를 하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반응하는 광경을 본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양가감정이 제게 스며들었습니다.
첫째, 정말로 동물 애호가이기에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둘째, 그래도 그렇지, 고소는 조금 너무 했다. 사람을 개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아쉬움 등이었습니다.
지난 주, 목사 동기생과 개인적으로 통화를 했습니다.
목소리가 우울해서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친구 목사가 전화 너머로 답했습니다.
“이 목사, 12년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어. 아내하고 딸내미가 너무 울어서 나도 마음이 안 좋다. 지금 장례식을 치르러 가는 중이야!”
개를 학대하면 고소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애지중지 키우는 강아지가 죽자 장례식을 치러 주는 친구도 있으니 이 정도면 개로 태어나도 꽤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름에 휴가를 가야 하겠는데 집에 개를 혼자 두고 갈 수 없는 현대인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레저 업계에서 펫(pet) 클럽 리조트를 만들어 성업 중이라는 광고를 보면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시쳇말로 요즈음, 개 팔자가 최고로 상팔자다.”
이제는 개에게 손을 내밀어 이렇게 노래를 불러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개”
여기까지 조금은 가볍게 조크를 곁들여서 교우들에게 제가 경험한 것들을 이야기 해 드렸습니다.
웃기도 하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제는 무거운 화두를 하나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본론)
로마서를 가리켜 성경 66권 중에 보석에 해당하는 책이라고 정의한 어느 학자는 그 중에 로마서 8장은 다이아몬드 보석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로마서 8장이 왜 소중한가를 연구하다보면 보석이라고 해석한 그 타당함이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로마서 7:24절을 읽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장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우울함 그 자체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사망의 늪에 빠져 있다고 토로합니다.
바울이 누가 나를 사망의 늪에서 건져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면 우리와 같은 범인(凡人)이야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냥 절망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7장 마지막 절에서 엄청난 반전이 일어납니다.
7:25 전반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 뒤에 8:1-2절은 어마어마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절망과도 같은 분위기를 사라졌습니다.
저기압 분위기도 온 데 간 데 없어 졌습니다.
이렇게 반전의 드라마를 쓴 8장은 전체가 옥석과 같은 보물들도 넘쳐납니다.
이재철 목사는 자신의 로마서 강해에서 8장의 소중함을 발췌한 내용이 있는데 여타 다른 신학자와 목회자의 해석에 비해 신선함이 있어 소개하는데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선행적 은총이 담겨 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② 불가항력적 은총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③ 필승불패의 은혜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④ 성화의 의무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재철, “이재철목사의 로마서 2권”, 홍성사, 61-67)
이재철 목사는 잘 아시는 것처럼 장로교신학대학교 신대원을 졸업한 목회자이기에 로마서 8장을 강해하면서 캘빈이 말했던 예정론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추출했고 그로 인하여 주님의 절대적 주권론을 대단히 강조하는 발언을 하며 해석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구원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피하려고 합니다.
다만 이재철 목사의 해석을 소개한 이유는 로마서 8장이 주는 무게감이 그렇게 크고 강하다는 것을 피력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한 사람의 가장이었던 은보 옥한흠 목사는 8장의 메시지를 조금 더 세분화하고 있는데 5단계의 은혜를 소개합니다.
“미리 아심 → 미리 정하심 → 부르심 → 의롭다 하심 → 영화롭게 하심이 구원의 단계다. 그래서 신학자 와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끊어질 수 없는 이 5개의 고리가 바로 구원의 금 사슬이다.” (옥한흠, “로마서 2”, 국제제자훈련원, 178-180.)
옥한흠 목사 역시 총신대학교에서 공부한 장로교회 목회자이기에 예정론적인 은혜를 노골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에둘러 강조하는 메시지를 책에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로마서 8장은 예정론적인 신학을 말하기가 너무 용이한 성경의 요절 중의 요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재척 목사와 옥한흠 목사의 예정론적인 메시지에 대하여 반론할 수 있는 신학적인 여백은 넘쳐나지만 오늘은 논하지 않으렵니다.
왜냐하면 제가 오늘 8장을 제목 설교의 텍스트로 정한 이유는 이런 신학적 논쟁이 팩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은혜가 8장 본문에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실까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 7개가 소개됩니다.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은 10개가 소개됩니다.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다른 어떤 피조물 등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으려고 하는 7가지를 보십시다.
① 환란(들맆시스): 종말에 닥칠 환란입니다. ② 곤고(스테노코리아): 들맆시스와 같은 종말의 괴로움입니다. ③ 박해(디오그모스): 종교적 핍박입니다. ④ 기근(리모스):잘 먹던 사람이 먹을 것이 없게 되는 급전추락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⑤ 적신(그므노테스): 의복이 없음으로 인한 인간 상실을 말합니다. ⑥ 위험(킨두노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26절에서 언급했던 위험입니다. ⑦ 칼(마카이라): 폭력적 전쟁과 죽음의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끊으려는 10가지도 살펴보겠습니다.
Ⓐ 사망(다나토스):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 생명(조에): 삶에 대한 애착을 말합니다. Ⓒ 천사(앙겔로스): 악한 천사를 가리킵니다. Ⓓ 권세자들(아르케): 통치와 권력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 현재 일(에니스테미):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통입니다. Ⓕ 장래 일(멜로): 미래에 오게 될 환란이나 고통을 의미합니다. Ⓕ 능력(뒤나미스): 악한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 갖고 있는 힘을 말합니다. Ⓗ 높음(휩소마): 위에 올라갔을 때 얻게 되는 일체의 것을 의미합니다. Ⓘ 깊음(바도스): 낮은 자가 될 때 겪어야 하는 수모, 멸시, 천대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 다른 어떤 피조물(에테라 크티시스): 9가지에 들어가지 않는 일체의 피조물을 말합니다.
조금 지루한 것 같지만 17개를 집요하게 열거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힘과 대적할 수 있는 이 땅의 존재가 있습니까?
결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37절을 복기하십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왜 우리가 17개의 대적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내 의지가 확고부동하기 때문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길 수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와 너)를 사랑하시는 이이신 하나님과 예수님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승리의 제 일 원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조금의 이견이 없습니다.
때로는 안아주셨습니다.
때로는 먼저 내가 갈 길을 앞서 가셨습니다.
때로는 나 때문에 속상해서 울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내가 바로 서도록 회초리를 들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달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과정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거대한 러브스토리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게 묻고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지난주에 친구 목사와 사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친구는 오래 동안 애완용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야기 중에 고양이가 요즈음에는 제일 효자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에 먼저 와서 친구에게 사랑의 눈짓을 보내면서 문안 인사를 한다고 합니다.
출근을 했다가 돌아오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영접 인사를 합니다.
자식들에게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대접을 극진히 하는 애완용 고양이 때문에 살맛이 난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고양이가 그렇게 친구 목사 내외에게 살갑게 합니까?
너무 당연합니다.
친구 목사 내외가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미물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압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은혜를 자신이 할 수 있는 사랑으로 되갚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레오나드 레이븐힐의 걸작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회의주의 철학자인 데이빗 흄은 비록 본인이 이신론적인 무신론자이기는 했지만 당대에 최고의 설교자라고 소문난 조지 휫필드가 자기 동네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새벽 5시에 그의 집회 장소에 달려갔습니다.
집회가 끝나자 무신론자 흄이 집회에 참석한 것이 너무 놀랄만한 일이고 이례적인 사건이라 한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휫필드가 전한 것을 믿습니까?”
그러자 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를 믿습니다.”
이 글을 소개한 레이븐힐은 이렇게 휫필드에 대한 사족을 남겼습니다.
“무엇보다도 휫필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을 들었으며, 하나님이 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했다.” (레오나드 리이븐힐, “소돔에는 말씀이 없었다.”, 규장, 215)
제가 이 글을 노트해 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디베랴에 떠 내려와 세속적인 일을 다시 시작한 요한의 아들 시몬을 보셔야 했던 주님은 이론으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과 배신당함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다가서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주님은 요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지 않으시고, 이것(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님은 상대적 가치로서의 사랑 대상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님은 절대적 사랑의 가치임을 베드로에게 고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상대적 가치로 사랑하십니까? 절대적 가치로 사랑하십니까?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스바냐 3:14-17절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주님은 나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여기에 기록된 ‘잠잠히’는 히브리어 ‘하라쉬’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조각칼과 같은 날카로운 기기를 이용하여 새겨 넣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그냥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손바닥에 내 이름을 새겨 넣고 기억하여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사야 49:15-16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당신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주님의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겨 놓으셨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때 그가 들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