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민수기 11:1-9
제목: 델타(δ)형 그리스도인
서론)
우리는 새벽 큐티를 통해 출애굽기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큐티 본문에서 줄곧 가장 큰 비중을 두고 다룬 출애굽 이후의 사건은 시내산과 연계된 금송아지 사건이었음을 새벽지기들은 나누었습니다.
지도자인 모세는 외롭고 아슬아슬한 이스라엘을 이끌기 위해 시내 산에 두 번이나 오르는 치열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어갔습니다.
반면 지도자 모세는 그렇게 목숨을 건 행보를 걸었건만, 이스라엘 공동체와 그들을 부화뇌동하였던 또 다른 제 2선 그룹의 지도자들은 시내 산 밑에서 각종 지저분한 난장판을 벌이며 모세와는 정 반대의 죄악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분노를 야기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기 까지 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집단 멸절의 위기를 모세의 생명을 건 중보로 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노는 완전히 풀린 것이 아니라 내가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여정을 함께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하자, 모세는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는 가나안 입성은 가능하지도 않고, 설사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에 들어간들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 모세의 영적인 혜안으로 다시 하나님께 엎드려 하나님의 그 의지마저도 돌이키게 되는 드라마를 썼음을 우리는 새벽 큐티를 통해 감격적으로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토록 모세의 피땀이 아우러진 헌신의 결과로 다시 가나안 여정에 오른 지 불과 3일이 되는 날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본론)
이스라엘 공동체는 시내 산을 떠나 다베라라는 곳에 도착을 했습니다.
학자들은 다베라를 기브롯핫다아와 (탐욕의 무덤)로 가는 길 과정의 어느 지역으로 추측하지만 정확하게 이 지역이 어디인지는 모른다고 입을 모읍니다.
다만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시내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하나님을 악한 말로 원망했다고 본문 1절이 증언합니다.
민수기 저자는 이곳(다베라)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무슨 원망을 했는지는 피하고 있습니다.
해서 학자들의 추측과 추론은 여러 주장이 있지만, 아마도 광야라는 지역적 특성과 연관하여 또 물 부족에 관한 원망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정도로 예상합니다.
다만 1절에 분명히 언급했듯이 히브리 공동체가 하나님께 원망한 말의 특성이 ‘악한 말’이었다고 기술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고 불길한 예감을 하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구절인 민수기 10:29-36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데 성공하자 자신감을 갖고 그의 장인이었던 이방인 르우엘의 아들 호밥(처남)에게 우리들이 걷는 가나안 여정에 함께 동참할 것을 종용하면서 두 번에 걸쳐 호소한 메시지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사’(민 10:29, 32)라는 장밋빛 청사진이었는데 11장에 들어서자마자 모세가 제시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을 히브리 공동체가 단호하게 거절한 내용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선대하심을 백성들이 적반하장 격으로 악으로 반응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이렇게 배은망덕한 히브리 공동체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심판을 하셨습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이 구절을 의미 있게 보아야 합니다.
1절 전반절에서 밝힌 ‘악한 말로 원망했다.’는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아마도 물에 대한 부족에 기인했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지론에 저도 어느 정도 수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물로 인해 불만을 늘어놓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불 심판(진영 끝에 불을 내린 사건)을 하신 것을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마라에서 엘림으로 인도하신 기적을 베푸셨고, 그 이후에도 물 갖고 원망하던 르비딤에서 반석을 쳐 물을 공급하신 은혜를 경험하게 해 주었건만 또 다시 물 갖고서 시비와 원망을 거듭하는 히브리 공동체를 좌시하지 않고 심판의 불을 내리신 것이기에 조금도 이견을 제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심판의 불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본문 1절 중반절입니다.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불입니다.
어디에 내리셨습니까?
진영 끝에 내리셨습니다.
이 진영 끝의 이해를 돕기 잠시 주석해 보겠습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행진하는 이스라엘이 머물 때 그 장막을 모세 오경의 편집자들은 진(陣)이라고 묘사했습니다.
‘陣’을 영어로는 'CORPS' 즉 '부대‘ 혹은 ’병영‘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진을 하늘에서 드론으로 촬영을 하면 정 가운데에 성막이 있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모세와 아론 그리고 아들들이, 서쪽에는 레위의 첫 아들인 게르손 후손들이, 남쪽에는 둘째 아들인 그핫의 후손들이 북쪽에는 셋째 아들인 므라리 자손들이 진을 칩니다.
이렇게 레위지파가 둘러싼 성막을 이스라엘의 12지파들이 동쪽은 유다, 잇사갈, 스블론이 진을 쳤고, 서쪽은 베냐민, 므낫세, 에브라임이 자리를 잡았으며, 남쪽에는 갓, 시므온, 르우벤이 좌정했으며, 그리고 북쪽은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둘러싼 모습을 하고 있기에 마치 십자가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런 진 형태의 맨 가장자리 즉 끝 이방인들, 잡족들이 또 자리를 잡았다는 점입니다.
이방인, 잡족을 이해하기 위해 연관하여 본문 4절을 이어 보겠습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기브롯핫다하와로 추측되는 장소에 도착한 히브리 공동체는 히브리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있었음을 민수기 기자가 밝힙니다.
‘섞여 사는 다른 인종’은 누구일까?
프린스턴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데니스 올슨이 히브리어 ‘아사프수프’ 즉 ‘섞여 사는 다른 인종’을 기막힌 단어로 번역했는데 바로 ‘어중이떠중이’입니다.“11:4절에서 어중이떠중이 혹은 오합지졸로 이루어진 군중은 애굽에서 즐겨 먹었던 고기와 다른 음식을 그리워하며 선동하였다. 애굽에서 탈출할 때 함께 끼어든 비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며, 출애굽기 12:38절에서는 그들을 ‘중다한 잡족’이라고 불렀다.” (데니스 올슨, “현대성서주석-민수기”, 한국장로교출판사,109)
평택대학교 유윤종 교수의 주석은 약간의 다름이 있는데 참고하도록 알려드립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개역개정판)’,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새번역판)’의 히브리어는 ‘아, 숩’으로 ‘모으다(아사프)’에서 왔으며, ‘숩’은 히브리어로 ‘끝’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용어는 ‘진영의 끝에 모인 무리’들을 가리킨다.”(유윤종,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성경주석, “민수기”, 대한기독교서회, 158)
본문은 이들이 살고 있었던 ‘진영 끝’에 불을 내렸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합니다.
물을 달라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세를 대적했던 자들을 어중이떠중이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셨고 더 이상은 묵과하실 수 없어 그들에게 불을 내리신 것이 본문의 정황입니다.
자세히는 언급되지 않아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아마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내리신 불에 희생당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또 다시 급해진 사람은 지도자 모세였습니다.
본문 2-3절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심판을 거두어달라고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엎드렸고 그 결과 심판이 종료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하나 보입니다.
앞에서 우리들은 진영 끝에 사는 자들은 12지파에 들어가지 못한 이방인들이요 잡족이라고 했습니다.
헌데 2절의 주어는 백성입니다.
‘백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암’은 통상적으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암’이 소개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고상하게 해석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과 원망을 일삼던 이방 잡족(어중이떠중이)들이 불에 타 죽는 심판을 당하자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중보 했을까요?
그들이 그 정도의 신앙의 수준에 있었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존재들이겠습니까?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고 광야에서의 곤비함에 찌들려 있었던 그들이기에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백성’으로 확장된 의미는 무엇을 시사합니까?
맨 처음 하나님께 불평하고 불만을 토로하던 자들은 이방 잡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여론몰이로 분위기가 바뀌자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수많은 사람들도 불평의 대열에 함께 서기 시작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도진개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평의 도가 잡족을 넘어 히브리 공동체까지 잠식하여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가릴 것 없이 족히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불만을 토로한 셈입니다.
단순히 끝자락이란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특정한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유윤종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일갈합니다.
“진영 끝이란 진영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 지역을 가리킨다. 야웨께서 심판했던 대상은 안과 밖 사이에 있던 자들이다. 즉 거룩과 오염된 세계 사이에 위치한 자들이다.” (위의 책, 154)
이들이 누구일까?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하여 진영의 끝자락에 있었던 자들, 물을 달라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제는 고기를 달라고 떼쓰던 저들이 누구인지를 오늘의 언어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 끝없이 변질되는 델타(δ) 형 종교인들입니다.
본문 7-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광야에서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던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은 내려주신 것이 만나였습니다.
이들이 만나를 제일 처음 공급받았을 때, 무엇이라고 호평했습니까?
출애굽기 16:31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꿀 섞은 과자’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무엇이라고 증언합니까?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였다’고 술회합니다.
이렇게 호평 일색이었던 만나를 훗날 뭐라고 폄훼하였습니까?
민수기 21:5절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하찮은 음식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주목해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만나의 맛이 진짜로 그렇게 변했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만나의 맛이 변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 공동체가 델타 형으로 신앙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변이됩니다.
왜 변이됩니까?
그 바이러스도 자신들이 살기 위해 희생시킬 숙주인 인간이 방어 능력을 갖추자 그 방어능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최적의 무기가 되기 위해 변이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마라에서 물이 쓰자 불평하던 이스라엘을 우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신 주님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단물이 있는 엘림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므리바에 도착한 이스라엘이 다시 물 갖고 불평을 늘어놓자 반석에서 기갈을 해소할 물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기적을 맛보고 이동한 히브리 공동체는 다베라에서 다시 물 갖고 시비를 겁니다.
다베라에서 하나님의 불 심판이 임했지만 모세가 다시 집단의 죄를 위해 엎드리자 불을 꺼졌다고 본문 2-3절은 증언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사태가 진정되자 모세의 중보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원망의 강도를 높이고 있음을 본문 4-5절이 보고합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물이 아니라 이제는 고기,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들이 먹고 싶다고 따집니다.
여기에 언급된 음식의 종류들을 열거하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델타 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고기를 준다고 하면 만족할 것인가!
그 다음에는 엪시론(ε), 제타(ζ), 에타(η)의 음식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시그마(σ), 타우(τ), 오메가(ω) 음식들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시비하고 불평하는 변이를 거듭하는 종교인들로 자리를 잡을 것입니다.
델타 형으로 변이를 거듭하는 종교인들은 어느 하나의 조건이 충족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만족하거나 자족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진영 끝에서 관망하는 방관자들이거나 종교적인 도그마로 포장하여 기교적인 냄새를 풍기는 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걸작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보면 카라마조프의 셋째 아들인 표트르 알레산드로비치가 왜곡된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정치화에 대해 이렇게 비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기독교도이면서 사회주의자인 자는 무신론자이면서 사회주의자들인 자보다 더 끔찍합니다.”(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 민음사, 140.)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지적에 대해 100% 동의합니다.
당시 러시아의 정교회가 그랬습니다.
정치와 부합하여 교회가 가져야 하는 본연의 본질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기득권 유지와 종교적 부 축적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허울뿐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본질을 잃어버린 경계선에 있는 오늘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전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종교인들은 언제나 영적 만족함을 모릅니다.
더 심각하고 무서운 것은 본인들의 그 불만을 기독교적인 가면을 쓰고 정당화한다는 점입니다.
델타 형이 종교인이 왜 위험한가?
이동원 목사가 본인의 글에서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진영 끝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날의 원망은 진영 끝에 있던 백성들로부터 시작된 때문일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볼 때, 공동체의 행진에서 끝에 위치한 사람들은 헌신자들이나 일꾼이 아니라 구경꾼의 자세를 자들일 것입니다. 일꾼들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구경꾼들이 원망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할 일이 무엇입니까? 구경꾼의 자세를 청산하고 주 앞에 나아와 주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동원, “인생여행-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 두란노, 151.)
그렇습니다.
종교적 구경꾼이기에 위험합니다.
방관자이기에 위험합니다.
여러분은 진영 끝에 있는 구경꾼인 종교인입니까?
아니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십니까?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강제동에 만들어진 둘레 길을 걷다가 어느 가게에 간판에 실린 글을 읽게 되었는데 기발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생은 고기서 고기다.”
정말 정답이지 않습니까?
기를 쓰고, 발버둥을 치고 달렸지만 오십보백보인 것을 많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광야는 그들이 살아갈 땅이 아니다. 그들이 살아갈 땅은 가나안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마치 자기들이 광야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에게는 다가오는 밝은 미래보다 불편한 현실의 상황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목 없는 백성이다.” (송병현, “엑스퍼지멘터리 주석 민수기”, 국제제자훈련원,212.)
나에게 주어진 육체의 필드에서 고기를 먹고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고기를 먹든, 야채 풀떼기를 먹든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고기서 고기입니다.
델타형 종교인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상황에 따라 변질되는 구경꾼으로 삶을 허비하는 마치 델타 형 바이러스와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제 4차 대유행이라는 상황이 불리하게 다가오더라도 신앙의 질 만큼은 변질되지 않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연이어 찬양 두 곡을 드리고 기도하겠습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
놀라지 마라 겁내지 마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내 맘이 힘에 겨워 지칠지라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세상의 험한 풍파 몰아칠 때도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주님은 나의 산성
주님은 나의 요새
주님은 나의 소망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나의 몸과 마음 주를 갈망하며
이제 내가 주께 고백하는 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생명의 피난처시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하리
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으로 내 손 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