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축도를 받으셨습니까?
본문: 고린도후서 13:13
서론)
1992년 5월 3일 밀양 대곡교회 주일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 주일은 예배 순서 하나를 바꾸었습니다.
폐회 찬양을 하고 난 뒤에 주기도문을 교우들과 나눈 것이 아니라 축도로 예배를 폐했기 때문입니다.
29년 전의 일이지만 저는 그 날 예배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주일, 교우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권한 뒤에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과 면려하심이 이 예배에 참석한 대곡공동체를 섬기는 모든 교우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공적인 예배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처음으로 행한 축도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대체적인 복음주의권 교단에서는 안수 받은 목사만이 축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법제화했기 때문에 저도 목사 안수를 받은 1992년 5월 3일에 소개한 대로 처음 교우들에게 축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파주에서 목회를 할 때 1사단 포병 여단에 소속되어 있는 후배 군목이 휘하 부대 4개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3개 교회까지는 정말로 최선을 다해 주일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데 도무지 1개 교회는 시간의 부족 때문에 예배를 인도할 수 없다고 고민을 토로하며 제게 3대대 군인 교회 주일 예배를 부탁해 2년여 동안 후배 사역을 도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군부대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거의 끝나갈 때 즈음이었습니다.
인근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미군들 약 20여명이 그날 3대대에 파견을 나왔는데 예배 전체는 참석할 수가 없어 축도 시간 즈음 교회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는데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축도(benediction)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에게 축도는 대단히 중요한 예배의 내용으로 이해되는 풍토가 진하게 자리를 잡았기에 축도만큼은 받겠다는 마음으로 낯선 한국군 부대의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예배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 그들의 행위였지만 그들의 그 간절함만큼 인상 깊게 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도대체 축도가 뭐 길래 이렇게 집착을 할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바울의 축도입니다.
치열했던 영적 전쟁터에서 전쟁 같았던 사랑을 행했던 바울에게 저는 개인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싶습니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생각해 볼 때, 아마도 고린도교회 그러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 않는 장소가 고린도교회였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바울이 그렇게 했더라도 목사로 전 인생을 산 저로서는 충분히 공감하며 그에게 돌을 던지지 않고 도리어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해피엔딩의 드라마를 쓴 뒤에 고린도후서를 마감하는 마지막 구절에서 격정적인 감동의 한 구절을 남겼습니다.
본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세 가지의 복을 빌어줍니다.
본론)
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바울의 축도에 접근하다보면 놀라운 점이 발견됩니다.
바로 이 대목입니다.
통상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논할 때 제일 먼저 앞세우는 것이 성부 하나님입니다.
헌데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먼저 언급합니다.
이러한 파격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어네스트 베스트는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진다. 그들의 노력이나 성취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없다. 이 은혜의 뒤에는 구속 사역을 시작하시고 끝내실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어네스트 베스트, “고린도후서-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교출판사, 206)
베스트의 주석을 따라가다 보면 바울이 얼마나 철저한 바른 신학을 갖고 있었는지를 가늠하게 해 줍니다.
성부 하나님의 구속사에 탑승하는 성도의 출발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부터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어떤 것도 앞서지 못함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2:1-8절 기사를 보면 우리가 너무 익숙히 알고 있는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는 나드 향유를 주의 발에 부은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께 여인이 갖고 있는 재산적인 가치로 볼 때,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닌 향유를 아낌없이 주께 부었지만, 가롯 유다는 300데나리온의 가치를 한 사람에게 집중하며 허비했다고 마리아를 비난하며 좀 더 공적 가치라고 볼 수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 사역으로 쓰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훈수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가롯 유다의 저의(底意)는 가롯 유다가 도둑이기에 구제가 목적이 아니라 착복이라고 지적하며 방점을 찍었지만, 차치하고 가롯 유다의 말대로 백번 양보하여 구제 사역이라고 간주할 때 한 번 즈음은 진단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교회의 우선순위에 대한 제 문제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필드에서 교회가 해야 할 사역, 그리고 성도가 해야 할 사역에 대해 민감해야 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사역을 말할 때 흔히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적 내증의 텍스트로 마태복음 25장을 제시합니다.
25:35-40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변명의 여지가 없는 교회의 사역이며, 성도의 미션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감당해야 하는 교회와 성도의 삶입니다.
허나 이 대 명제 앞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이 미션을 왜 해야 하는가?입니다.
어떤 측면으로 보면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된 자를 돌보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은 세상이 더 잘 할 수 있고, 타종교도 이 일을 감당합니다.
기독교만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하고, 교회는 이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행함을 통한 구원의 가치를 주장하는 타종교나, 아니면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관점에서 당연히 있는 자가 감당해야 하는 도덕 가치 때문에 이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값없이 받은 은혜 때문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셨던 주께서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맡은 바 미션이기에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재 강조하지만 책임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요, 행함의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타종교적인 신념 때문도 아닙니다.
주 예수께서 주신 은혜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지난 셀 심방시간에 지체들에게 행한 설교가 오병이어의 기적 설교였습니다.
제게 가장 강력하게 조명된 은혜는 빌립의 반응이었습니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명령에 바른 눈 똑바로 뜨고 빌립이 주님에게 이렇게 훈시합니다.
300 데나리온이 있어야 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심방 시간에 지체들과 함께 나누며 교훈했던 감동은 이것입니다.
“주님 없는 300데나리온은 있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300데나리온이 없어도 주님이 계시면 다 있는 것”이라는 조명이었습니다.
왜 바울이 치열했던 전쟁터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제 일순위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있기를 축원했을까?
주 예수의 은혜가 성도에게는 전부였음을 바울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는 그래서 매일 불러야 하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더 이상의 갈파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집요하게 살폈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지난 주일,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과 화해했을 것이라는 예감의 근거를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강복의 메시지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베스트 교수의 일갈이 가슴을 때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은혜(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의 뒤에는 구속 사역을 시작하시고 끝내실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어네스트 베스트, “고린도후서-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교출판사, 206)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공급 받은 자에게 임하는 두 번째의 축도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는 것이며, 그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림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림설명)
17세기가 렘브란트의 세기라고 말할 정도 미술사의 혁혁한 공을 세운 반 레인 렘브란트의 최고의 걸작인 ‘탕자의 귀향’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실려 있는 전 세계 작품 중에 비유 문학의 최고의 금자탑이라는 평가를 받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는 메시지를 소재로 그린 작품입니다.
미술 평론가들은 이 한 그림을 통해 참 많은 렘브란트의 영성을 해설하며 극찬하기도 한 작품인데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한 한 부분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림을 잘 보시되 아버지의 손을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글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실마리는 손에 있습니다. 두 손은 정말 판이합니다. 아들의 어깨에 닿은 아버지의 왼손은 강하고 억세 보입니다. 손가락을 펼쳐 탕자의 어깨와 등을 상당 부분 가리고 있습니다. 마디마디에 적잖은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눈에 띕니다. 특히 엄지손가락이 그렇습니다. 그저 만지는데 그치지 않고 힘을 주어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왼손으로 아들을 다독이는 모습에서 부드러움이 넘치지만 그러쥔 느낌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오른손은 아주 딴판입니다. 부여잡거나 움켜쥐지 않습니다. 세련되고 부드럽고 대단히 다정합니다. 손가락들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어 우아한 분위기가 납니다. 아들의 어깨에 사뿐히 올려놓았다고 할까요? 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어머니의 손입니다.” (헨리 나우웬, “탕자의 귀향” 포이에마. 154-155)
‘상처 입은 치유자“ (wounded healer)로 유명한 영성신학자인 헨리 나우웬의 이 글을 읽다가 울 뻔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징계하시는 아버지의 엄함이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한없이 보듬고 안아주며 용서해 주시는 어머니의 따뜻함이 있는 사랑입니다.
또 한 가지 이 그림에서 아버지의 눈이 거의 감겨져 있는 노인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눈먼 사랑입니다.
허랑방탕한 삶을 살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의 행색은 보지 않는 눈먼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은 살아 있습니다.
누가복음 15:20절을 읽어 드립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영어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But 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 his father saw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for him; he ran to his son, threw his arms around him and kissed him.”
아무리 누가복음 저자가 상상력을 발휘했다고 하더라도 이건 조금 심해 보입니다.
렘브란트의 입장을 고려할 때 아버지는 시력이 좋지 않은 노인성 안과질환자입니다.
그런 그가 아직 집에서 거리가 너무 먼 곳에 위치해 있는 둘째 아들을 알아보았다는 해석이 어디 가당키나 합니까?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누가가 묘사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측은히 여겼다고 번역한 영어단어가 ‘compassion'입니다.
'compassion' 하면 함께 떠오른 단어가 ‘empathy' 즉 '공감'입니다.
'com'이라는 접두어가 ‘함께 한다’는 공감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하는 것’은 이론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공감은 지정의라는 인격의 3요소가 함께 움직일 때만 반응하는 전인격적인 행동입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당신과 나를 공감적으로 반응하며 사랑하십니다.
이론의 사랑이 아닌 아들을 죽이기까지 사랑하신 극치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이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를 축원했습니다.
그 축원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현재진행형으로 동일함을 선포됩니다.
3) 성령의 교통하심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은 구원 사역의 무엇을 담당하고 계실까요?
이 땅에 주님 나라가 완성되기 까지 구원의 사역을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이 구원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반드시 해야 하는 당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 받은 백성들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번역된 ‘교통’이 바로 그 유명한 헬라어 단어 ‘코이노니아’입니다.
우리들에게 더 익숙하게 사용되는 단어가 ‘교제하심’입니다.
성령과의 코이노니아는 결코 가벼운 단어가 아닙니다.
더불어 간과해서는 더 더욱 안 되는 단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이 나와 함께 교제한다는 말은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내주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고 있어야 죄와 싸웁니다.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고 있어야 은혜를 사모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고 있어야 진리의 말씀이 들립니다.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고 있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내주하고 있어야 주를 주라고 시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고 있어야 영적 무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소아시아 성지순례를 갔을 때 가지고 간 20세기 선지자라고 부르는 아이든 토저의 책을 읽다가 천둥이 치며 벼락이 떨어지는 느낌의 글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오순절에 임하셨던 사랑의 불이 우리의 지성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안전하다. 성령님은 사치품 같은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역사 속에 가끔 나타나 한 세대에 한 명 정도만 ‘걸출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수품과 같은 분이시다. 그분이 그들 안에 내주하시며 충만케 하신다는 것은 이루어져도 좋고 안 이루어져도 그만인 ‘희망사항’이 아니다. 그분의 내주와 충만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사항이요, 하나님의 명령이다.” (아이든 토저, “이것이 성령님이다.”, 규장, 133.)
정말로 벼락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소리를 지인들을 통해 많이 듣습니다.
“제천세인교회의 신자들은 다른 교회에 비해 지성적인 신자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제천세인교회를 담임하는 목사가 지성적 신앙을 강조하니 신자들이 얼마니 지성적일지 가히 상상이 갑니다.”
그러나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명심하십시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각 개인에게 오셨던 성령의 불이 우리들의 지성에 안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도 헛것인 것은 물론 실상 그건 아무 것이 없는 것보다 더 못하다는 것을.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의 설교가 끝나자마자 ‘내가 어찌할꼬?’ 통회하며 자복했던 그 성령의 만지심이 있는 교통의 전령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의 지체들이 천박하지 않은 지성적 신앙으로 무장하되 가장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순결함으로 무장하는 성령 충만함의 도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지난 1년 3개월 동안 세인 교우들과 함께 했던 고린도후서의 대장정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여행을 마감하면서 교우들을 축복하려고 합니다.
다 같이 주의 종이 대언하며 기도하는 축도에 아멘으로 화답하기를 기대합니다.
아론의 축도입니다.
예바레카 아도나이 베이슈메레카
야에르 아도나이 파나이브 엘레이카 비후네카
이싸 아도나이 파나이브 엘레이카 베야쎔 레하 샬롬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자신의 얼굴로 네게 빛을 비추사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고 여호와께서 자신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24-26)
그리고 또 한 번 기도합니다.
헤 카리스 투 큐리온 이에수 크리스투 카이 헤 아가페 투 데우 카이 헤 코이노니아 투 하기온 퓨누마토스 메타 판톤 휘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 13:13)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의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추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십자가를 들고 땅 끝까지 우린 가리라
우리 주님 하늘 영광 온땅 덮을 때
우린 땅 끝에서 주를 맞으리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