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해피 엔딩
본문: 고린도후서 13:11-12
서론)
2020년 3월 8일 주일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고린도후서 여행을 함께 하며 바울이 경험했던 전쟁 같았던 사랑의 메시지들을 나름 최선을 다해 훑으며 공부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계획으로는 6월 마지막 주일인 오늘 고린도후서의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고 했습니다.
허나 성령께서 저를 휘감으셔서 13:13절은 마지막 설교로 선포하라는 강력한 조명이 있어서 오늘 주일이 아닌 다음 주일에 고린도후서 강해를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주일은 축도로 마감하는 13:13절의 메시지에 앞서 바울이 전쟁 같았던 사랑을 나누었던 고린도교회와의 관계와 결과에 대해 유추하게 만들어주는 힌트를 교우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
본문을 포함하여 그 치열한 과정을 겪고 난 뒤, 바울과 고린도교회와 관계가 어떻게 되었을까?
한 번은 질문을 던져 볼 만하지 않습니까?
해피 엔딩인가? 언 해피 엔딩인가?
설교의 서두에 미리 던진 질문이 너무 도전적이라고 생각하는 교우들이 있을 것 같지만 약 100%는 아니지만 90%의 확신을 갖고 교우들에게 그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해피 엔딩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본론)
이제부터 증명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해피엔딩이라고 짐작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상상력을 펼쳐야 합니다.
지금 13장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4번째 혹은 5번째 편지라고 했습니다.
헌데 대단히 다행스러운 것은 4번째이든지 5번째이든지 이 편지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독자인 저와 여러분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4,5번째 편지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전해졌는데 이 편지는 분실되거나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를 여행하는 내내 바울이 얼마나 치열한 영적 전쟁을 벌였는지 살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지체들 중에 세상 사람도 상식적으로 잘 하지 않는 음행의 죄를 짓는다는 경악할만한 보고를 받은 바울이 상당히 강력한 어조로 그들의 죄를 지적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이 편지를 저는 서신 A 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렇게 편지의 이름을 설정한 것은 유감스럽게도 이 편지가 분실되었기 때문입니다.
추측하건대 서신 A의 편지에 담긴 내용들이 음란의 죄를 범하는 자들을 향한 매우 단호한 비난과 징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편지였기에 수신자들이 대단히 불편하게 여겨 이 편지를 고의로 훼손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서신 B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분파주의를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은 고린도전서를 작성하여 디도라는 동역자의 인편으로 보냈다고 햇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린도전서는 망가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돌이키게 만드는 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바울이 편지를 갖고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린도후서 2:1절에 의하면 아주 짧게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는데 수모를 당하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상심했던 바울이 에베소로 돌아와 대단히 강력하고 불편한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가 세 번째 편지인 서신 B였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도 유감스럽게 분실되었다고 했습니다.
설교자의 추측입니다.
이 편지도 고린도교회의 신자답지 않은 자들의 신앙적 일탈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다 보니 수신자들에 의해 찢어졌거나 훼손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이런 전례를 전제하고 오늘 본문을 상상해 보십시다.
본문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본문 이전까지 바울이 얼마나 적대자들에게 집요하게 본인의 사도권을 변호했는지, 그리고 물질적인 공세를 퍼부었던 적대자들에 대해 단 한 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공세적 방어를 했는지 지난 강해들을 통해 세밀하게 살폈습니다.
심지어 13:2절에서는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극단적인 발언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바울을 보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전제할 때 소위가 악했던 바울의 대적자들은 4,5번째의 편지로 거부했든지, 찢어서 소각을 했든지, 아니면 고의적인 훼손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타당한 짐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아서 2,000년 뒤의 독자들인 저와 여러분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결론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요?
답을 하기 위해 호주 맥쿼리 대학의 폴 바네트 교수의 이 부분에 대한 통찰을 교우들에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인들이 이 서신 서를 받았을 때 그것을 찢어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에게까지 내려왔다는 사실은 그들이 바울의 말을 존중했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한 뒤(세 번째 방문), 석 달을 머무르며 로마서를 썼는데, 로마서에는 당시의 어려움이 희미하게 밖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린도인들과 사도 바울이 화해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폴 바네트, ”고린도후서 강해-BST 시리즈“, pp,259-260.)
바네트의 이 설명은 짜릿한 감동을 줍니다.
왜 그럴까요?
고린도후서의 결론이 해피엔딩이라는 답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바네트의 주장에 동의하는 이유를 본문을 중심으로 부연해 보겠습니다.
1) ‘형제들아’에 담긴 바울의 심정에서 화해를 추측하게 합니다.
본문 11절을 읽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형제’라고 호칭한 바울의 선언은 대단한 반전의 감동을 줍니다.
‘형제들’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델포이’는 문자적인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김판임 교수는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여기에서 교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교우 간의 애정을 표현한다. 고린도후서에서 ‘형제’라는 말은 1:1절에서 디모데를 가리킬 때, 그리고 1:8절에서 편지의 수신인을 부를 때 사용하고는 이 투쟁의 편지라 할 수 있는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김판임, “고린도후서-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주석 39”, p,325.)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델포스’ 즉 ‘형제’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에서 함께 교통하는 단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단어를 오블 본문인 편지의 말미에 바울이 그토록 치열하게 대립하고 전쟁을 벌였던 적대자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했습니다.
형제 디모데와 같은 부류의 레벨로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을 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이런 반전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해피엔딩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 그리고 배신자들이 돌이켜 바울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바울은 세 번째 방문했던 고린도에서 바울 서신의 다이아몬드라고 평가받는 로마서를 집필했습니다.
이 엄청난 대작을 작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린도 공동체가 그만한 배려와 혜택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공동체 지체들의 회복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2) 5개의 단어가 화해를 추측하게 합니다.
본문 1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5개의 명령형 단어가 눈에 띕니다.
그런데 이 명령형 단어는 물리적 압박의 단어가 아닌 순화적인 단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① 기뻐하십시오.(카이레테)
② 온전하게 하십시오. (카타르티제스떼)
③ 서로 권면하십시오. (파라칼레이스떼)
④ 마음을 같이 하십시오.(프로네이테)
⑤ 평안하십시오. (에이레네에테)
조석민 교수가 이 5개의 단어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기뻐하라는 문안 인사에 가까운 표현이며, 온전하게 하라는 그 동안 반목을 청산했으니 서로를 이제 배려하라는 말이고, 서로 권면하라는 말은 격려하라는 말이며,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은 바울을 인정했던 친 바울 성향의 그룹과 반대했던 반 바울파의 두 그룹이 이제는 같이 합하라는 당부이며, 평안하라는 말은 이제는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는 권고였다.”(조석민, “이해와 설교를 위한 고린도후서 주석”, 이레 서원,pp,284-285)
이 5개의 권면을 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전합니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3:2절에서 강하게 토했던 ‘내가 다시 가면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어조는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강복하는 투의 메시지로 그 톤이 바뀌었습니다.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과의 해피엔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3) 문안 인사가 해피 엔딩을 강하게 역설해 줍니다.
본문 11절 하반절과 12절을 읽겠습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여기에 기록된 ‘문안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스파조마이’는 문자적으로 ‘팔을 안으로 접다’라는 의미입니다.
문안이 무엇입니까?
허깅(hugging)하는 것입니다.
즉 안아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안기 위해서는 그를 끌어안기 위해 자신의 팔을 안으로 접어야 합니다.
또 하나 문안의 방법을 거룩한 입맞춤으로 제시했습니다.
영국 글래스고우 대학의 신약학 교수인 어네스트 베스트가 ‘거룩한 입맞춤을 기가 막히게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서로 깊은 입맞춤으로 인사하도록 격려한다. 거룩이라는 표현이 입맞춤이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성적인 견해의 가능성도 배제시킨다. 입맞춤은 눈썹과 어깨에 행해졌다. 이런 풍습은 당시 가족끼리 하던 것이기에 교인들이 한 가족임을 깨닫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어네스트 베스트, “고린도후서-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교 출판사,pp,205-206)
반목 공동체, 분열 공동체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 된 가족 공동체가 고린도 교회 공동체가 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모든’ 성도들이 거룩한 입맞춤과 문안의 대상자들이었습니다.
해피엔딩을 추측하게 하는 감동의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피 엔딩의 스토리를 남겼을 가능성이 농후한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전쟁 같은 사랑의 과정을 통해 함께 공유해야 할 레마를 주일의 교훈으로 받겠습니다.
※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마침표(.)가 아닌 쉼표(,)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는 항상 돌이키는 자에게 문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폐쇄 공동체처럼 마침표를 찍는 공동체는 교회가 아닙니다.
돌이키는 자들이 언제나 들어올 수 있는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7절을 읽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여기에서 언급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의 문을 열고 닫는 권세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권세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사람에 의해 교회의 문이 마침표로 찍힌다면 그게 어찌 교회이겠습니까?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이 문을 열어놓으신 쉼표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전반기 심방을 지난 주간 마쳤습니다.
교우들의 면면을 살피고 중보 했습니다.
각 가정들을 파악하며 소통하다가 인턴들이 심방 사역을 위해 거듭 스케줄을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습니다.
펜데믹 이후 급격히 영적으로 무너진 지체들이 비일비재합니다.
한 번, 두 번 안부 겸 문안 전화를 넣어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무례한 자들이 리더와 인턴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며 수없이 경험하는 무례함 중에 하나가 급할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대던 자들이 그 반대의 경우가 되면 전혀 소통하지 않고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대 심방을 위해 노심초사하면 수고한 리더와 인턴들의 수고를 무시하는 무례한 자들이 속출해서 앞서 일하는 지체들에게 적지 않은 실망의 실망을 거듭 안겨준 사람들이 있어 의기소침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마침표를 찍지 말고 쉼표로 열어두자고 격려했습니다.
그게 목회고 사역입니다.
뒤에서 비수를 꽂고, 상상할 수 없는 폄훼를 하고, 자신들의 입지 구축을 위해 타인까지 부화뇌동하고 궁극에는 사도권까지도 흔들었으며, 그로 인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무너뜨렸던 자들을 바울은 돌이킴을 전제하고 그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마침표 사역이 아닌 쉼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교회 공동체는 해피엔딩이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에 읽었던 시 한편 선물로 드리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애타는 가슴 하나 달랠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한 생명의 아픔 덜어줄 수 있거나
괴로움 하나 달래줄 수 있다면
혹은 헐떡이는 작은 새 한 마리
다시 둥지에 오르게 도와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윤동주외 59인, “매일 시 한잔”, 북로그컴퍼니,p,142)
19세기 감성주의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에밀리 디킨슨이 쓴 명시 ‘애타는 가슴 하나 달랠 수 있다면’입니다.
읽다가 이런 소회가 제게 임했습니다.
이 역할을 세인교회가 해야 하지 않을까?
이 보고를 이강덕목사가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삶을 여러분이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저는 다음 주일에 선포할 고린도후서 강해의 마지막 쉰 세 번째 강해가 기대됩니다.
바울의 축도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해피엔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교회에게 손 내밀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자들을 위해 쉼표 공동체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유혹이 강하다고 생각될 때
당신의 힘이 거의 바닥났을 때 바로 그때 힘을 내야 해
인내로써 모든 경주를 달릴지라
주를 의지하면서 주께 기도하면서
다 같이 걸어갑시다 다 같이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