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신학적 철학이 있습니까?2024-03-07 14:04
작성자 Level 10

2021년 4월 1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마흔 두 번째 강해)

 

제목신학적 철학이 있습니까?

본문고린도후서 11:12-15

 

서론)

 

오늘 설교 제목이 어려워서 교우들에게 죄송함을 전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제목보다 이 제목이 적절한 것 같아서 선정했습니다.

신학적 철학이라는 제목을 학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주일 낮 설교라는 짧은 시간에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논외로 두려고 합니다.

다만 이 제목을 다른 의미로 해석할 때 조금 쉬워질 것 같아 그 방법을 택하고자 합니다.

신학적 철학이란 그리스도 예수의 신앙을 기초한 올바른 고집이다.

지난 주간에 조금은 충격적인 글을 읽었습니다.

조직신학자 더글러스 존 홀이 쓴 그리스도교 다시 묻다라는 제하의 책입니다.

조금은 무거운 책인데 아니나 다를까 나름 충격을 주었던 책입니다.

책에 나오는 홀의 이론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교회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음을 심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많은 지성인들이 교회를 등지고 떠나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이런 현상은 이제 주류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이러다가 교회 문을 닫는 것은 아닐까 심히 애 닳아하며 아파합니다.

그런데 더글러스 존 홀은 대단히 혁명적인 발언을 합니다.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입니다.

그의 지론은 이런 이유를 근거로 대고 있습니다.

주후 313년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의해 공인을 받은 이후 데오도시우스 황제시기에 국교로 인정받기 전까지 로마제국 내에서 기독교인의 수가 10%를 넘은 적이 없음을 피력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역설합니다.

초대교회의 이런 상황은 정상이었다그리스도교가 새로운 선교적인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이러한 상황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독일 나치 시대의 고백교회에서철의 장막 뒤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은 모든 교회에서 이런 상황은 정상이었다그리고 한 때 그리스도교가 명성을 누렸으나 이제는 쇠락을 길을 걷고 있는 유럽과 북미권 교회에서 이런 상황은 정상이다많은 이가 북미권 교회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 교회는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더글러스 존 홀, “그리스도교 다시 묻다. - 부제부정신학으로 바라본 그리스도교”,비아 간, p,98.)

홀의 이런 의견 개진에 제가 일부 동의하는 이유는 남은 자 사상의 영향 때문입니다.

신학적 철학을 갖는다는 말은 그래서 그리스도신앙을 기초한 올바른 고집이라고 말해도 틀린 접근이 아닙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지만 세속적인 흐름은 힘이 있는 자나 집단으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사정이 이런데 만에 하나그 반대편으로 흐른다면 둘 중이 하나일 것입니다.

바보든, 신학적 철학이 분명한 자든.

본론)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하다가 보면 어떤 측면에서 보면 대단히 바보 같은 선택을 한 자로 여겨지는 주인공 바울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저는 본문의 정황으로 볼 때 바울이 바보 같은 선택을 한 자라고 수많은 사람이 정의한다고 해도 그런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한 미련한 자가 아니라오늘 설교 제목처럼 너무나도 분명한 신학적 철학을 갖고 있었던 믿음의 선배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바울의 반대자들이 바울이 자기가 세운 고린도교회에서 정당한 대우도 받지 못하는 것을 트집 잡아 그의 사도권에 대해 흠집을 내고바울을 형편없이 질 떨어지는 떠돌이 순회 설교자라고 매도하는 무례함을 살폈습니다.

이런 공격에 바울은 내가 고린도교회 공동체에서 정당한 사례비를 받지 않는 이유는 부담을 끼치고 싶지 않은 것이며동시에 나는 정말로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기에 자비량으로 사역하는 것임을 밝힘으로서 대단히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음도 살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바울의 신학적 철학이 얼마나 견고한 것인지를 엿 보게 해주는 또 다른 금과옥조의 글을 만납니다.

본문 12절을 읽겠습니다.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읽으면 비장함마저 들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내 입장을 바꾸지 않을 작정입니다여러분의 돈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나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서도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자처하는 설교자들과 한통속으로 취급할 빌미를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메시지고린도후서 11:12)

바울이 왜 이 정도의 단호한 공격을 결심 했을까요?

이어지는 본문 13-15절 전반절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를 유린하고 있는 적대자들을 거짓 사도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속이는 일꾼이라고 말하고그리스도의 사도를 가장한 자들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수세적인 입장이 아니라 대단히 공격적인 어투로 적대자들에 대하여 정의한 총체적 정의가 무엇이었습니까?

거짓사도였습니다.

속이는 일꾼그리스도의 사도를 가장한 자광명한 천사와 같이 변장한 자사탄의 일꾼 등등 표현의 문구 자체는 약간의 변형이 있지만 주된 정의는 거짓 사도였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거칠어졌습니까?

아주 비열하게 인간이 가장 취약하다고 하는 물질 즉 돈으로 바울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서 곧잘 말하는 저열한 네거티브 공세가 이유였습니다.

주지했듯이 바울은 철저히 자비량으로 사역했습니다.

그는 어떤 물질도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공급받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 강해에서도 그리고 고린도전서를 강해할 때도 말씀을 드렸지만바울은 자격이 없어서 마땅한 사역비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순수한 의도는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도 상당한 액수의 물질을 고린도교회를 통해 공급 받는 저들이 자기들의 물질적인 취득이 너무나도 당연히 합당한 것임을 자인하기 위해 바울의 자격을 운운하는 저의가 대단히 사악했음을 바울도 좌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물질에 있어서 청렴하고도리어 솔선수범하고 있는 바울은 나쁜 저의를 갖고 물질로 자신을 공격한 적대자들의 소위를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소 거친 표현으로 방어적인 논리였지만 도리어 강하게 적대자들의 행위를 지적한 셈입니다.

바울을 저급하게 물질로 평가하는 적대자들을 더 이상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셈입니다.

정상적인 목회자들이 갖고 있는 마지막 자존감의 마지노선이자 금기 사항은 물질 갖고 장난을 치는 것입니다.

담임전도사로 밀양에서 사역을 할 때였습니다.

직전 교단에서는 안수를 받으려면 반드시 단독 목회 2년의 경험이 있어야 하기에 저는 개척을 포기하고 시골로 들어가서 단독목회의 연한을 마쳤습니다.

단독 목회를 처음 시작하던 해부터 3년 동안의 농촌 목회를 하면서 얻은 영적인 교훈이 참 많은데 당시 시무하던 교회를 섬기던 약 20여 명의 청년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며 얻은 감동이었습니다.

청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인근 주변 도시로 나가 직장 생활을 감당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박봉의 십일조를 교회에 드려 그 열악한 농촌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그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근무를 마치면 약속이나 한 듯 토요일에 고향집이 있는 대곡으로 들어옵니다.

교회를 섬기고 예배하며 후배들을 양육하기 위해서입니다.

도시에서 들어올 때는 양손에 들고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함께 식탁공동체를 하기 위해 가지고 온 이라면과 요한이에게 줄 조그마한 과자와 사탕 선물들입니다.

당시담임전도사에게 교회에서 책정하여 준 사례비는 월 70,000원이었습니다.

젊은 전도사 부부가 요한이를 키워가며 경험해 보지 못한 타향 농촌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안타까워 매일 미안해하던 청년들의 그 모습은 지금도 선합니다.

섬기던 청년들은 라면으로 주일 점심식사를 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 때문에 담임전도사 부부에게 미안해했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목회자의 입장에 서서 더 미안해했습니다.

지금도 아내는 매 주일마다 라면 밖에는 식탁공동체의 주 메뉴로 식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당시 청년들에게 미안하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문 외우듯 말합니다.

재정부장을 맡았던 자매는 매 달사례비를 가지고 오면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했습니다.

허면 저는 70,000원이라는 사례비도 감지덕지하여 그 사례비 봉투를 앞에 두고 눈물어린 강복기도를 하던 교회가 저의 처녀 목회지인 밀양 대곡교회였습니다.

제가 은퇴를 하고 난 뒤에 제게 가장 아름다웠던 교회가 어디인가를 물으면 저는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대곡교회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때 받은 사랑을 갚기 위해 저는 대곡교회를 떠난 후 31년 동안 정확하게 1년을 제외하고당시 재정부장으로 섬기던 자매가 지금 담임목사의 아내가 되어 묵묵히 고향 교회를 지키고 있는 것에 감사하여 지속적인 선교비를 보내며 사랑의 빚을 갚고 있습니다.

왜 오늘그 옛날의 이야기를 끄집어냈을까요?

교회라는 공동체는 사역하는 주의 종에 대한 사례를 물질적인 가치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적어도 정상적인 신학교육을 받고 정상적인 바른 신학을 기초로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주의 종은 풍성한 물질적인 보장으로 사역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도들이 높여주는 자존감을 최고의 사례로 생각하며 사역합니다.

전도사 시절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게 해 준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말씀을 묵상하는데 전도서 5장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전도서 5:10절을 읽는데 그 날 그 말씀이 추상같은 비수로 제 심장에 박혔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그날 이후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목회를 하는 동안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바울은 대단한 신학적 철학을 갖고 있었던 사도였습니다.

그는 고린도교회를 통해 주는 일체의 물질을 앞으로도 결코 받지 않고 사역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물질에 있어서 풍요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보았던 9절을 복기해 보십시다.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바울은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였지만 부자 교회에게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은 그만이 갖고 있었던 신학적 철학 즉 그리스도신앙을 기초한 올바른 방향성의 고집을 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물질을 가지고 치사하게 갑 질하고 있는 적대자들을 향하여 거짓 사도들을 향해 맹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본문 이해를 통해 저와 여러분이 오늘 레마로 삼아야 하는 영적 도전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 당신은 바울이 사수했던 신학적 철학을 갖고 있습니까?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고 있는 자라면 올바른 신앙인의 고집에서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전제합니다.

쓸데없는 고집이 아니라 주님이 바라시는 올바른 고집을 견고하게 사수해야 합니다.

왜 이런 신학적 철학을 고집해야 합니까?

본문 15절 하반절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저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교우들에게 제가 갖고 있는 목회적 철학을 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는 자는 하나님도 마지막 날에 계산하시지만하나님 앞에서 계산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마지막 날에 계산하지 않으신다.”

제 말은 우격다짐을 하기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문장이 아닙니다.

주께서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사역의 내용들을 점검하시면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32-33절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적어도 제가 믿고 따르는 주군은 마지막 날에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분명한 성도로서의 영적 자존감 신학적 철학을 갖고 산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허물어뜨리는 일체의 세력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특별히 이런 신학적 철학이 있는 성도는 물질로 장난질하지 않습니다.

물질로 갑질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을 향하여 본문이 분명히 경고합니다.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주께서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들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그 때 한 사람이 불쑥 나서서 이렇게 주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가복음 12:13절입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 사람은 율법에 따라 형에게 2/3의 유산을 주고 나에게는 1/3의 몫만 받은 것에 대해 불만 100인 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주님은 다른 상황의 경우와는 대단히 단호하게 당신의 불편함과 불쾌감을 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14-15절입니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주님도바울도 물질로 재단하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분노했습니다.

아마도 물질은 주의 사역자들을 농락하는 카운터파트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넘어지지도 말고물질을 갖고 갑질을 하지도 맙시다.

그건 그리스도인들이 사수해야 하는 신학적 철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거짓된 자들의 사탄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시인 나태주가 쓴 아름다운 시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사랑에 답함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시인도 이 정도의 시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장탄식하며 기뻐하셨던 피조물의 극치인 인간이 하찮은 물질에 휘둘리는 철학 없는 자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신학적 철학을 갖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신앙을 기초한 올바른 고집 말입니다.

나는 아름다운 신학적 철학을 잃지 않는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팀 켈러가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은 정답입니다.

 

어떤 문화든 하나님을 몰아내다시피 하면사람에 따라 섹스와 돈과 정치가 그 빈자리를 채운다.”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두란노, p,169.)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내 주님 계신 눈물없는 곳

저 하늘에 숨겨둔 내 소망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나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걸.

내 아버지 널은 품 날 맞으시는 저 하늘에 쌓아둔 내 소망 있네

[후렴]

주님 그 나라에 이를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