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무례하지 마십시다.2024-03-07 14:03
작성자 Level 10

2021년 4월 1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마흔 한 번째 강해)

 

제목무례하지 마십시다.

본문고린도후서 11:7-11

 

서론)

 

우리 교회 교우 중에 예배 시간이 되어 2층 예배당에 들어오면 강대상을 향하여 반드시 목례를 한 뒤에 자리에 가서 앉는 성도가 있습니다.

제가 그 성도를 주목해서 보는 이유는 그가 불교에 심취해 있다가 개신교로 개종한 지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 지체가 강대상을 향하여 목례를 하는 것은 아마도 사찰을 방문하여 대웅전이나 혹은 또 다른 법당에 들어설 때 불교적인 영성의 기초에 따라 배어 있는 태도가 신앙하는 대상과 법당에서 설법을 전하는 스님과 승려들에게 표했던 기본적인 예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체는 당연히 그 신앙적 행위를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했을 것입니다.

제가 교육전도사로 사역을 경험했던 쓰라린 일입니다. .

섬기던 교회에 학생회에서 성탄절 사역을 위해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던 어느 날교회에 중직을 맡고 있는 한 여 집사가 학생회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학생회 교사에게 반말로 들이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개 선생우리 애는 이 시간에 학원에서 중요한 수업을 받아야 하는 시간인데 왜 자꾸 교회에서 불러내는 거야이러니 교회에 다니는 애들이 좋은 대학에 못 들어가는 거야.”

다시는 거론조차 하기 싫은 천박하기가 그지없는 자의 행태이자 발언입니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리더로서 공동체 제자도의 저자인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의 말을 전합니다.

백 마디의 성경구절을 전하는 것보다 예의범절을 다하는 것이 더 확실한 전도다.” (이재철, “사명자반홍성사, 152, 재인용)

목사로서 사역하면서 가장 치욕스러운 때는 세속적 영역에서 만났으면 정말로 상대할 가치조차를 못 느끼는 천박한 대상에게 교회 안이라는 공동체에서 만났다는 이유 때문에 그가 던지는 일체의 무례함을 무방비로 당할 때입니다.

예수께서 미리 당하셨던 십자가의 치욕을 견디셨기에 그 길을 따라가는 목사로 어쩔 수 없이 무례한 자들이 범하는 무례함에 당하고 또 견뎌야 하는 치욕을 경험할 때처럼 목사가 된 것에 자괴감을 느낄 때가 없습니다.

바울도 매일반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저는 사순절과 부활절기로 인해 잠시 중단했던 고린도후서 강해를 다시 진행하려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 의거하여 오늘 설교의 화두를 무례함이라는 단어에 천착하여 강해 설교를 감당하려고 합니다.

말씀이 나를 때리면 뉘우침과 깨달음으로감동으로 다가오면 아멘으로 화답하여 동시의 은혜를 경험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보면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데실제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갑을관계라는 아픈 형국을 엿보게 해 주는 메시지가 본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갑은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이고을은 바울 사도였습니다.

7절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이 구절을 읽으면서 왠지 모를 동변상련의 아픔을 같은 목회자의 심정을 갖고 진하게 느꼈습니다.

조금 쉬운 번역인 공동번역 성서로 7절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을 높이려고 내가 나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한 것이 죄가 된단 말입니까?”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 주석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동역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외롭게 사역을 시작했음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외롭게 사역하는 바울을 하나님께서 민감히 보고 계셨습니다.

해서 바울을 도와 사역할 동역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텐트 메이커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갖고 있었던 직업은 바울에게 금상첨화였습니다.

바울이 돕는 인적 인프라로서의 천군만만 같은 부부를 만난 것은 물론이들이 갖고 있었던 전문기술인 장막을 만드는 업까지 배워 자비량 사역을 할 수 있는 물적 인프라까지 동시에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문 기술을 습득한 바울은 텐트를 만들며 고린도 지역에서 복음을 강하게 전할 수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선 이해로 본문에 접근해야 합니다.

9절을 다시 주목해서 읽어 보십시다.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누를 끼치지 않았고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문장이 주는 의미가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섬기면서 정당하게 받아야 하는 사례를 받지 않고 교회를 섬겼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고린도교회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사례를 받지 않고 자비량으로 사역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이 반응하는 적반하장의 공격이었다는 점입니다.

8절의 말씀을 속 깊이 들여다보십시다.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이 구절에서 언급된 탈취한 것은 헬라어 단어 수라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강한 단어까지 차용하며 강하게 8절을 역설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을 공격하게 있는 의 위치에 있는 적대자들의 소위가 너무 악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돈도 받지 못하는 정도의 수준 떨어지는 순회설교자이거나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떠돌이 사역자라고 폄훼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11절은 적대자들이 폭격한 악한 공격의 절정을 알려주는 점입가경의 발언을 염두 한 것입니다.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우리 고린도교회에 합당한 물질을 요구하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관심이 없고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적대자들은 바울을 헐뜯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갑질이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 동안에는 참고 참았지만이제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본인의 의사를 분명히 하는 장면이 본문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시 본문 8-9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것은 탈취한 것이라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으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

이 구절도 쉬운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다른 교회들이 주는 삯을 받아 가지고 여러분에게 봉사했습니다말하자면 다른 교회들의 것을 빼앗아 여러분을 도운 셈입니다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빈곤했지만 여러분 중 어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친 일이 없습니다마케도니아에서 온 교우들이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 공급해 주었기 때문입니다나는 여러분에게 조금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고 또 앞으로도 그럴 작정입니다.”

이 구절을 이제는 이강덕 목사의 언어로 대치하여 여러분에게 부연합니다.

내가 고린도교회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사례를 받지 않은 것이 다른 사도들처럼 사도권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내가 너희들에게 받아야 하는 사례비를 받지 않은 이유는 내가 나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어 자비량 사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동시에 나에게는 마케도냐의 형제들인 빌립보 교회와 베레아 교회의 지체들이 보내준 끊임없는 선교비 때문이었다비록 이 비용은 내가 생활을 하는데 부족한 물질이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 부자 교회에 손을 벌리지 않은 이유는 너희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마땅한 사례비를 너희들에게 받지 않은 것이 자격 미달사랑 부족 등등이라고 운운하면서 갑 질하는데 그렇게 치사하게 행동하지 말라나는 내가 선택한 이 방법을 초지일관하며 사역할 것이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 부분인 10-11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사자후를 던집니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나는 고린도교회에 스며든 거짓 적대자들이 아무리 나를 폄훼하고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고린도교회를 사랑했던 자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나의 이 진정성을 너희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신다나는 이것이면 충분하다.”

바울이 본문에서 선언한 이 거침없는 메시지를 저는 한 교회를 섬기는 현직 목사로 同痛의 마음을 갖고 아멘 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갑 질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을 향하여 내뿜은 호소가 무엇입니까?

 

※ 무례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10여 년 전에 목회 사역 콘퍼런스에서 대단히 치열한 공방을 신학대학교 교수와 벌인 적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공방을 벌인 신학대학교 교수는 저와는 동갑내기 교수이고신학교 시절에 한 교회를 섬겼던 질긴 인연이 있는 지인이기도 합니다.

그가 발제를 하는 동안 이런 식의 발제를 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담임목사들이 예수님의 정신을 잃어버렸다는 비난이었습니다.

발제 중에 그가 아주 익숙한 성경구절을 하나 인용했습니다.

요한복음 13:4절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너무 잘 아는 세족 목요일에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었음을 확인시킨 것입니다.

그런 뒤지인 교수는 다시 요한복음 13:12절을 실례로 들었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선생이셨고주님이셨던 예수님은 세족식을 끝내시고 최후의 만찬 석에서 다락방 강화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시며 즉 설교하실 때 다시 옷을 입고 전하시는 극진한 예의를 지켰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목사들도 성도들에게 그렇게 예의를 지킬 것을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대한민국 유수의 신학대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치고 있는 지인 교수의 말에 모두가 숙연하게 반성하며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이윽고 논찬 시간이 되었습니다.

발제에 대한 토론 시간이었습니다.

참석한 몇 몇 분들이 학술적인 내용으로 토론에 임했습니다.

진지하게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사회자에게 제가 논찬을 요청하여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고 제가 발언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발제자에게 이렇게 공격적인 논찬의 화두를 던졌습니다.

저 또한 성경구절을 하나 인용했습니다.

요한복음 21:7절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낙향한 베드로를 비롯한 6명의 제자들이 고기를 잡는 날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을 아신 주님이 바닷가에서 줄 곧 제자들의 고기잡이를 지켜보신 뒤에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얼떨결에 그 누군가가 지시하는 데로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를 건지게 됩니다.

이 일이 있은 뒤요한이 그 말한 사람이 주님이시라고 외치자 역시 다혈질의 제자인 베드로가 주님이 계신 쪽의 디베랴 바닷가로 뛰어내렸다고 요한복음의 저자는 보고합니다.

그런데 이 보고에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한 문장을 삽입해 놓은 것입니다.

겉옷을 두른 후에

제가 논찬 중에 이렇게 발제자에게 논쟁거리를 던졌습니다.

근래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무례함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이셨던 예의를 목회자들이 상실한 것을 인정합니다그러나 더불어 선생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해 제자 베드로가 옷을 입고 주님이 있는 바닷가로 뛰어내린 예의도 사라졌다는 겁니다한쪽으로의 치우침은 대단히 위험한 강요입니다예의를 지키는 것은 모두의 일이어야 합니다.”

지인 교수는 제 논찬의 거리에 불편해 했습니다.

그리고 교수의 자존심으로 이렇게 맞대응하며 반응했습니다.

목사들이 먼저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성도들이 따릅니다.”

현장에서 목회의 경험이 전무 한 지인 교수와 더 이상 논쟁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아멘 해주어 세미나는 은혜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서는 정서적으로 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이 무례를 범하지 않고 예의를 지켜가는 것은 나와 너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의 의무이며 책임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대 서사시이자 기독교 진리의 마그나카르타 인 로마서를 써서 당시 최고의 도시인 로마라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존심 100의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역할을 맡긴 장본인이 아주 자그마한 어촌 출신의 여 제자 뵈뵈였습니다.

촌스러운 여자라고 문전 박대를 할지도 모르는 로마 교회 공동체의 교만한 자들을 염두 해 두고 바울은 로마서의 마지막 장에서 의미심장한 사족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로마서 16:1-2절입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이 구절에 번역된 합당한 예절은 헬라어 악시오스의 번역입니다.

악시오스는 원어의 의미가 가치 있게 여기는’ 혹은 귀하게 여기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NKJV 영어성경은 이렇게 번역했는데 대단히 적절한 번역입니다.

You may receive her in the Lord in a manner worthy of the saints.

(여러분은 주 안에서 성도로써 가장 가치 있는 매너로 뵈뵈를 맞으십시오.)

고린도교회의 악한 자들은 바울을 막 대했습니다.

할 수 있는 가장 악한 방법을 동원하여 바울을 헐뜯었습니다.

눈여겨 볼 것은 바울이 끝까지 악하게 반응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

바울의 눈에는 적대자가 보인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교회가 건강해지려면 성도는 주의 종을 귀하게 여기는 예의가 있어야 하며주의 종은 성도에게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틀어지면 교회에 위기가 옵니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하는 유기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본문 11절을 읽겠습니다.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이 바울을 아무리 공격하고 질타해도 바울이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고백이 바울의 진정성이 있는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진정성을 하나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이 남습니다.

왜 바울의 이 진정성을 교회는 몰랐을까?

대단한 유감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들이여!

이런 소망을 설교를 맺으며 전합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영적 기상도가 흐릴 데로 흐린 시대라 강요하는 것을 핍박이라고 치부하는 시대이기에 어쩔 수는 없지만 예의를 완벽하게 지키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무례하지는 맙시다.

무례함은 상식을 포기한 가장 천박한 행위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고 늘 지켜주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