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부활 신앙인의 결론2024-03-07 14:03
작성자 Level 10

2021년 4월 4일 부활주일 설교

 

본문고린도전서 15:55-58

제목부활 신앙인들의 결론

 

서론)

 

2주 전에 지임철 목사가 보낸 유동부 치아바타라는 빵이 도착했습니다.

건강한 빵이라 사모님이 좋아하실 것 같다고 생각하여 지 목사가 보내준 빵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습니다.

빵 선물함을 열자마자 이 빵집은 빵만 파는 게 아니라 복음도 함께 전하는 크리스천 기업임을 곧 알 수 있었습니다.

빵이 담겨 있는 선물 안에 소위 말하는 광고 전단지가 하나 들어 있었는데 그 안에 유동부 치아바타라는 빵집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문구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신 증거는 역사적 사건의 부활입니다.”

 

이 정도의 전도 문구를 포장된 선물상자에 넣어두었다면 이 상호를 경영하는 CEO는 명목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이 없을 겁니다.

한 크리스천 경영인이 문장으로 만든 이 글은 대단히 중요한 감동으로 줍니다.

제가 이 문장에서 주목하는 대목은 역사적 사건의 부활이라는 글입니다.

이 글이 주는 실제적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픈 예이지만 대단히 현실적인 이해의 강도가 높기에 우리 한국 역사의 가장 쓰라린 비극 중에 하나인 광주 민주화 운동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1980년 5월에 대학을 다니던 학생이었습니다.

동시에 제가 거주하던 곳은 인천이었습니다.

조금만 시공간을 확대하겠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저는 인천에 있었고 수도권에서 대학을 다니던 학생이었지만 내 땅 내 조국인 남도 광주에서 바로 그 시간과 공간에서 저와 같은 대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초중고 학생들과 그냥 일상을 살던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이유도뜻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죽어갔고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이라는 명목의 자기 나라 군대의 군인들에게 무차별 폭력에 짓밟히는 지옥과 같은 일을 경험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공간의 다른 영역에 거주했던 이유도 있었지만그 때의 참상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휴교령이 내렸지만 집으로 학교의 과 선배들이 보내준 소식지를 보면서 광주에서 일어난 진면목의 참상들을 알게 되었고어쩌다가 보게 된 실로 가공할 만한 폭력이 군인들에 자행되는 영상을 보면서 경악했습니다.

더불어 미국의 시사 주간지인 TIMES와 NEWSWEEK지의 COVER STORY와 SPECIALLY REPORT에 실린 톱기사들의 상당수의 글들이 까맣게 지워진 채로 인쇄된 저널을 보면서 앞뒤의 글을 충분히 연상할 수 있었는데 그 내용들은 내 나라 내 땅 광주에서 한 권력자의 광기로 인해 이론으로 형용할 수 없는 만행이 군부에 의해 자행되고 있었던 잔인한 역사였습니다.

그때의 충격은 지금 41년이 지났지만 추억의 한곳에 있는 저의 아픈 트라우마 중에 하나입니다.

금년 5월 18일이면 이 만행이 일어난 지 41년이 되는 해입니다.

41년이 지났건만 당시 제가 광주에서 희생당한 일체의 이웃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그리고 무지한 채로 지낸 죄 때문에 여전히 아파하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왜 제가 그토록 아파합니까?

1980년 5월 18광주에서 있었던 시민 학살이 나를 자각하게 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명분으로 총칼이라는 물리적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준 역사적 사건이라고 나에게 내재화했기 때문입니다.

멘부커상 작가 한강은 광주 학살의 비극을 고발한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인간)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고문이 온다강제 진압이 온다밀어 붙인다짓이긴다쓸어버린다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빛이 비치는 쪽으로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p,213.)

기억이 생생합니다.

작가의 이 글을 읽을 때 펑펑 울었던 것을.

41년이 지났지만 그 당시에 피해를 당한 일체의 분들이 체감하고 있는 아픔에 대하여 저는 同痛의 느낌을 갖고 있고 그래서 지금은 똑같은 고통을 당하는 미얀마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국이 낳은 걸출한 역사학자인 E.H 카는 본인의 걸작인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갈파했던 것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E.H ,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p,50.)

 

이제 이 공식을 춘천에서 경영하는 빵집 사장이 보내준 홍보 문구에 대입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신 증거는 역사적 사건의 부활입니다.”

 

이 땅에 공존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예수의 부활이라는 말을 하면 콧방귀를 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AI가 신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오늘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법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그 허무맹랑한 신화를 믿으라고 도리어 윽박지르는 시대가 오늘입니다.

호모-데우스 즉 신인 인간을 주창하는 인간 최고주의 시대에 성경이라는 구닥다리 책에 기록된 이스라엘 출신의 한 젊은 청년에 대하여 집필된 소설과도 같은 픽션의 이야기 거리를 믿으라는 것이냐고 조롱하는 시대가 오늘입니다.

이들은 한사코 예수의 부활이라는 이슈를 신화화된 스토리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신 이유를 주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선포했다는 것은 크리스천 CEO가 주님의 부활을 나에게 일어난 오늘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부활을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선언이고 주목하고 또 주목할 만한 선언입니다.

이런 선언의 경우를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할 때 성경적 사건을 내 삶의 복판에 내재화시켰다고 말합니다.

댈러스의 빌리지 교회에서 사역하는 매트 첸들러가 쓴 완전한 복음을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읽다가 첸들러 목사가 선언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담아두었었는데 오늘 적절한 것 같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는다우리가 말씀 아래 앉아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신다그 말씀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인간 영혼을 좌우 어느 한 곳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고 이 둘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그 마음이 굳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이것은 누구도 취미로 교회를 다닐 수 없다는 말이다즉 중간 지대에 있는 사람은 없다.” (매트 첸들러, “완전한 복음”, 새물결플러스, pp,106-107)

첸들러의 메시지를 오늘 설교에 적용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둘 중에 하나라는 말입니다.

하나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또 다른 하나부활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변명하거나다른 표현이나 행동으로 에두르지 말고 나는 부활을 믿는 신자인지믿지 않는 신자이든지 둘 중에 하나라는 말입니다.

오늘 저는 2021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나는 둘 중에 어떤 신자인가를 알 수 있는 분명한 바로미터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58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 구절을 시작한 첫 단어가 인과관계 접속사 호스테입니다.

그러므로’ 혹은 그런 까닭에’ 등등으로 번역되는 접속사입니다.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 단어를 썼을까요?

우리는 고린도전서 강해를 통해 고린도전서 15장이 소위 말하는 부활장임을 공부했습니다.

그 유명한 몇 구절만 발췌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13-14절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이어지는 19-20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고 오늘 본문 55-56절을 읽겠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러므로(호스테바울에게 있어서 주님의 부활은 자신의 신앙적 내면에 내재화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이 놀라운 역사적 사건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기록시기를 학자들은 대략적으로 주후 52-53년 즈음으로 산정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부활하신 역사적 사건과 약 20년 정도의 시간적인 갭이 있습니다.

더불어 생각해 볼 것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시기를 최대한의 시점으로 보아도 주후 39년 이전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 사건 20년 후본인의 회심 사건 10년 후에 고린도전서를 기록했을 터인데 이 기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분명히 확신한 것이 하나 있었음을 본문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본문 57절이 알려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의 주님께서는 부활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를 믿는 자가 부활신앙인입니다.

이 믿음을 갖고 있기에 부활신앙을 갖고 있는 자들은 오늘 본문 마지막 58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삽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58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바울은 부활신앙인들이 살아내야 할 믿음의 내용을 세 가지로 피력합니다.

⓵ 견실하라 (steadfast)

⓶ 흔들리지 말라 (immovable)

⓷ 힘쓰는 자가 되라 (work enthusiastically)

그렇습니다.

부활신앙을 갖고 있는 자는 언제나 견실합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한 자는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을 기초로 한 자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됩니다.

이렇게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는 대가를 지불합니다.

어떤 대가입니까?

수고입니다.

수고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코포스는 칼에 손이 베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피 흘리는 상태의 고통을 수반하고 있는 수고를 말합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서 부활 신앙을 말하는 자들은 지성적이지 못한 무식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두개적인 성향의 디아스포라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태반이었기에 분파적인 성향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그들은 부활을 말하는 성도들을 이상한 동물취급을 하며 본인들의 그룹에서 배제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런 이유로 부활을 말하고 믿는 자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외롭고 힘든 신앙의 여정을 걸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안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의도는 주 안에서 부활 신앙을 지켜가며 아름다운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달음질이 결코 헛된 경주가 아닌 주님이 기뻐하시는 경주임을 적시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2021년 부활주일에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의 결론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이 내 삶의 답임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가끔 이런 은혜에 스스로 젖을 때가 있습니다.

엠마오 도상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패배한 자들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승리한 자들이라는 엉뚱한 생각 말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제가 할까요?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의 영적인 시력은 제로였습니다.

그런데 엠마오 도상으로 내려가던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동행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14-15절입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엠마오의 제자들 옆으로 주님이 가까이 가셨습니다.

이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이셨습니다.

나는 이 구절이 대단히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어떤 낙심의 엠마오로 가든지 부활하신 주님은 대단히 적극적으로 나에게 오셔서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들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우리들의 무딘 신앙을 말씀을 재해석해 주심으로 견고하게 해 주십니다.

누가복음 24:26-27절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강력하게 임하는 말씀의 은혜는 자기에 관한 것이라는 구절입니다.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내가 낙심과 절망의 엠마오를 향할 때 오셔서 방법을 가르쳐 주시거나 벼락부자가 되도록 하늘에서 물질을 쏟아부어주신 것도 아니지만주님께서는 내가 너의 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붙들 것을 해석해 주시며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의 답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내 삶의 답이십니다.

이것을 믿고 달려가는 자가 부활신앙인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오늘 내 삶을 살아가면서 부활하신 주님이 나에게 날마다 오심도 믿습니다.

그로 인하여 나는 나의 정답이신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승리로 날마다 내 삶의 현장에서 다시 사는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화요일에 부활절 강단 장식과 주차장에 있는 화단에 봄꽃을 심기 위해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원주에 있는 화원을 아내와 방문했습니다.

제천에 소재해 있는 화원에서 판매하는 일체의 꽃들을 시장 조사해 보았는데 원주에서 구입하는 가격 대비 배가 비싸다는 것을 알고 다리품을 하기 위해 힘이 들었지만 다녀왔습니다.

다녀오는 시간이 점심 식사 때라원주를 방문하면 가성비 대비 매우 적절한 식당을 알아 두었기에 그곳에 오랜만에 방문해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아내가 말했습니다.

오늘 부로 여긴 졸업이다.”

그도 그럴 것이 초기에 방문했을 때의 맛은 물론고객들을 위한 먹을거리 준비가 너무 성의 없어진 모양새가 진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초심을 잃은 장사하는 자들의 속내는 장사하는 사람 자체는 몰라도 그 음식을 먹으로 간 사람이 곧 알기 때문입니다.

맛을 잃은 식당에는 고객이 다시 가지 않습니다.

해서 반드시 문을 닫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의 맛은 부활신앙입니다.

사람들에게 잊혀지고세간에게 망각되어 결국에는 하나님께도 잊어지는 비극은 부활의 신앙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레마의 말씀을 명심 또 명심하여 부활신앙의 결론을 맺어가는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1.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2. 주 앞에서 거듭난 생명 도우시는 주의 사랑

참 기쁨과 확신 가지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입으며 살리

 

3. 그 언젠가 주 뵐 때까지 주를 위해 싸우리라

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 주님께서 나의 앞길 지켜주시리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