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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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포이에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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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5-01-24 21:5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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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역정 2001년, 현재 100주년 기념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재철 목사께서 본인의 모교인 장로교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행했던 신앙 수련회 원고를 정리해서 출간한 ‘비전의 사람’이라는 소책자가 있다. 당시 그의 글을 읽는 중에 프랑스 동쪽에 위치해 있는 테제 공동체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재철 목사는 글에서 ‘떼제’ 라는 영성 공동체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그곳을 습관적으로 찾는 한국 교회 목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많은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프랑스의 ‘떼제’ 까지 찾아와 그곳에서 깊은 영성 체험을 통해 나름 영적 만족을 얻고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극하게 반대하지 않는다. 허나 문제는 습관적인 방문이라는 점임을 분명히 한다. 왜 본인들이 섬기고 있는 삶의 현장, 목양의 현장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마다하고 다시금 떼제까지 와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해야만 하나님에 대한 영적 만족을 경험했다고 생각하는가? 에 반문을 던진 것이다. 읽으면서 공감했다. 2014년 목회자로 닮고 싶은 또 다른 선배인 김기석 목사의 여행 소회문인 ‘흔들리며 걷는 길’을 접했다. 40일 간의 유럽의 여러 나라들 즉 이탈리아, 터키, 조지아, 아르메니아, 프랑스 등의 기독교적인 색채와 유적들이 즐비한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영성 여행 혹은 기독교적인 흔적들을 소개한 김 목사의 글을 접하면서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나름 그곳들이 어떤 색채를 띠고 있는지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느껴보는 배움을 갖게 되었다. 서평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의 말미에 김 목사가 약 일주일 정도 머문 떼제에 대한 감회들이다. 김 목사는 떼제에서의 머묾을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떼제 공동체에서 느낀 가장 두드러지는 영적 감동을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정리한다. “‘긴 침묵’, ‘노동’, 사귐이라는 관상(contemplation)’, ‘깊은 기도’, ‘제도화 되어 있지 않은 영성 사모’ 등등이다.” 물론 떼제 공동체 안에 있는 수사들의 성경공부,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예전 등등은 기본적인 틀 안에서 공유되는 또 다른 영적 매력들임을 전제한다. 김 목사는 일련의 이런 영성 체험을 테제에서 경험한 일주일이 참 귀하고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임을 회상한다. 서평자는 전술한 두 선배의 설교를 가능한 한 사이버 공간에서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노력한다. 동시에 그들에 의해서 간행된 책은 거의 섭렵할 정도로 그들의 목양적 철학, 정신, 그리고 방향성에 대하여 공감해 왔다. 해서 두 사람에 대한 떼제 공동체에 대한 접근과 이해가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또 다른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같은 마음으로 존경하는 목사 선배들이지만 그들의 생각의 다름과 팩트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건강성을 주는 요소임을 또 다른 관점에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래 들어 작금의 정부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소통 불가인데 다름에 대한 다양성이 얼마나 진보적인 발전에 도움을 주는 지 이 정부가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저자는 앞에서 열거한 나라들의 여행을 통해 다른 어떤 것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현존 앞에서 신실하게 반응하며 삶을 영위했던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추적한다. 김영봉 목사는 이스라엘의 땅을 밟는 성지 순례의 여정을 잔잔하게 본인의 책 ‘팔레스타인을 걷다.’를 열면서 아주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파리에 가는 것은 여행이고,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순례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 가느냐’ 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가느냐?’입니다.” 이 태도로 저자는 흔들리며 길을 걷는다. 그래서 그랬나! 글을 읽다보면 그의 글에 ‘순례자의 가장 큰 특권은 길을 잃을 권리’ 라고 한 흔적이 지천인 이유가. 이제 천천히 그의 길을 따라가 보자. 소수의 힘이라 더 버겁다.
로마의 레푸블리카 광장 뒤에 있는 순교자들과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교회를 시작으로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무덤이 있는 교회인 비아 산타고스티노 교회를 지난다. 저자는 이 교회에서 어머니 모니카의 흔적들을 통해 어거스틴의 삶을 반추할 수 있었던 감동을 전해 준다. 아들의 회심과 주님의 사역자로 서도록 평생을 기도한 모니카를 생각해 낸 저자는 대만신학자 송천성의 갈파를 친절하게 소개한다. “하나님의 공동의 창조자는 어머니이다.”(p,29) 이상하게도 송천성의 갈파는 낯설지가 않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상관없이 어머니라는 에토스적인 단어를 통해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그림자를 본다는 점에 이견이 없는 듯하다. 작가 박노해는 이렇게 어머니의 사랑을 그렸다. “어린 시절 방학 때마다/서울서 고학하던 형님이 허약해져 내려오면/어머님은 애지중지 길러온 암탉을 잡으셨다/성호를 그은 뒤 손수 닭 모가지를 비틀고/칼로 피를 묻혀가며 맛난 닭죽을 끓이셨다/나는 칼질하는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떨면서 침을 꼴깍이면서 그 살생을 지켜보았다/서울 달동네 단칸방 시절에/우리는 김치를 담가 먹을 여유가 없었다/막일 다녀오신 어머님은 지친 그 몸으로/시장에 나가 잠깐 야채를 다듬어 주고/시래깃감을 얻어와 김치를 담고 국을 끓였다/나는 이 세상에서 그 퍼런 배추 겉잎으로 만든 것보다/더 맛있는 김치와 국을 맛본 적이 없다/나는 어머님의 삶에서 눈물로 배웠다/사랑은/자기 손으로 피를 묻혀 보살펴야 한다는 걸/사랑은/가진 것이 없다고 무능해서는 안 된다는 걸/사랑은/자신의 피와 능과 눈물만큼 거룩한 거라는 걸” 누군가가 말한 이 말은 들을 때마다 눈가를 촉촉하게 한다. “신이 너무 바빠 모든 사람을 다 돌볼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어 곳곳에 파송했다.” 이렇게 시작한 저자의 낯선 길 여행은 방문하는 곳곳마다 진한 감동의 족적들을 남겨 준다. 캄포 데이 피오리 광장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한 조르다노 브루노 동상과 만난 저자는 그의 죽음과 관련한 신학교 시절의 한 추억을 회상한다. 14세에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가 24세에 신부가 된 그는 철학, 수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섭렵하였고, 이윽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다가 화형을 당하고 순교한다. 그가 죽음을 당하는 그 순간 종교 권력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지금, 이 순간에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그것은 죽음을 선고받은 내가 아니라 그것을 선고하고 내 육체를 불태워도 진리를 없애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바로 당신들이 아닌가?”(p,31) 저자가 소개한 조르다노 브루노의 이야기를 담으면서 서평자는 내 사랑하는 조국교회를 생각해 보았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교회에서 세상의 그림자를 더 볼 수 있고, 사람들의 비 신앙적 썩는 냄새가 더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 있는 이 시대에, 그건 아니요! 라고 외칠 수 있는 오늘의 조르다노 브루노는 과연 있는 것일까? 내 육체를 불태워도 진리는 불태워 죽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브루노, 폴리갑은 있는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에둘렀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다수의 사람들을 희생시킴으로 소수가 특권을 누리는 세상에 대한 부정을 내포하는 것이기에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p,33) 시대와 같이 가는 사람은 언제나 승승장구한다. 시대에 반하여 가는 자는 언제나 고통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서 좁은 길을 언제나 사람이 없다. 낙스 대학교 설교학 교수인 브라이언 채플이 다니엘이 경험한 시대를 오늘의 우리의 시대에 빗대어 이렇게 통찰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생각보다 다니엘의 시대와 유사할지 모른다. 미국은 불과 몇 세대 전만 해도 기독교 문화 속에 다수가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던 시절이 있었다. 정치, 사회적 관습, 교회가 강조하는 가치들은 대부분 국민들이 기독교적 시각을 공유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했다. 이제 그런 전제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소수라는 의식 속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하고, 교회가 거센 반대 속에 목소리를 내도 존중받거나 성공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브라이언의 말 중에 절절한 대목이 있었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소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미국처럼 기독교문화가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의 와해와 무너짐은 미국과는 상대할 수 없는 속도를 낼 수 있다. 어느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교회 공동체의 균열 방식과 모양새가 미국교회와 너무나 흡사하다고 말이다. 아마도 그 지인은 대한민국 교회의 뿌리가 미국의 근본주의적 성향이 짙은 선교사들의 영향이 큰 기저를 갖고 있기에 진단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서평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와 같지 않다. 어떤 면인가? 성장의 내용 면에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와해는 비교할 수 없다. 문화적 뿌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며, 더 긴박한 위기감이다. 가시적 교회에서 보는 비가시적 교회 몬테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저자는 엄청난 가시적 교회의 위용을 만났다. 특히 바실리카 내부는 건물의 아름다움이라는 압도이외에도 성인들의 이야깃거리로 넘쳐난다. 이 모든 것을 동시에 경험한 저자는 수도원에서 만난 일체의 조형물과 경험들 앞에서 정현종 시인의 말로 독백한다. “마음껏 찬탄하고 기뻐하되 우상화는 하지 말자.”(p,41) 그의 말이 눈물 나게 감사하다. 보이는 것에 대하여 현란할 정도로 목숨을 걸고 있는 오늘 이 땅의 교회들 한 복판에서 비수와 같은 교훈이기 때문이다. 4년 전, 섬기는 교회 예배당을 소박하게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다. 개척을 하고 3년이 되는 어느 날, 폐지를 줍고 고물상에 내다 파시며 생활하시는 권사님께서 씨앗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건축헌금으로 드리셨다. 권사님의 피보다 더 귀한 순교적 예물을 받고 몸 둘 바를 몰라 하나님께 질문했다. 하나님께 씨름하던 어느 날, 예배당을 짓는 것을 전제로 섬기는 교회의 건축이 시작되어 작지만 2층 월셋집에서 탈출하여 소박한 예배드리는 처소를 하나님께 올려드렸다. 건축을 앞두고 건축헌금을 다음 위한 부흥회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비가시적 교회를 세우기 위한 부흥회를 한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신학교 동기인 차준희 교수를 초빙해서 예레미야 특강을 들었다. 교회 건축을 앞두고 신학교 교수를 불러 특강 부흥회를 했는데 친구가 내내 강조하고 간 메시지는 ‘이 성전을 헐라’ 가 주제였다. 기막힌 역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은 최선을 다해 가시적 교회의 외형인 예배당을 지었고, 더불어 비가시적 교회는 마음에 세웠다. 감사한 것은 지금도 서평자와 함께 달려가는 지체들은 가시적 교회에서 비가시적 교회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함께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지체들이 너무 감사하고 고맙다. ‘베드로의 쇠사슬 교회’에 도착한 저자는 모세 상을 본다. 그곳에 있는 모세 상은 미켈란젤로의 의도적인 작품임을 알려준다. 모세의 머리에 뿔이 나 있다. 왜 그런가? 간단한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만난 이스라엘 공동체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를 보고 분노하고 있는 모습을 상징화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모세 상을 보면서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는 것 같았다고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이미 변형된 형태의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있지 않은가. 저항하기를 포기했기에 더 이상은 고난당하지 않는 교회, 풍요에 길들여져 있는 신앙생활, 값싼 위로에 탐닉한 신자들…….”(p,45) 서평자는 이 진단에서 자유로운가?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돌이키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시든 꽃과 같이 본질을 잃은 교회
저자는 아씨시에 있는 프란체스코 전교회 소속 바바라 미카렐리 수녀원으로 동선을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생각해 낸다. 침묵의 의자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사색을 통해 곰비임비 스쳐지나간 나의 삶의 흔적을 반추해 보는 것은 또 다른 축복이 아닌가를 깨닫는다. 모처럼 서평자는 저자가 부러워진다. 그는 그곳에서의 침묵과 사색을 통해 다음을 곧추 세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정신이다. 교회를 세우기 전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먼저 세워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교회는 신의 무덤일 뿐이다.”(p,54) 서평자는 이 글을 읽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작년 연말에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의 그레고리 비일 교수가 쓴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와 “성전 신학”이라는 책을 구입해서 열독 중이다. 비일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우상 숭배를 본질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아주 중요한 통찰을 했다. “교회가 자신의 문제를 성경에 의지하여 해결하기보다는 경영 관리나 심리학에 호소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한다. 이 때 일반계시의 영역이 주된 관심사가 되고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은 주변부로 밀려난 채 오히려 일반계시의 관점을 통해 이해된다.” 비일의 이 말이 서평자는 천둥처럼 다가왔다. 특별계시의 본질이 일반계시의 등장으로 인해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는 것을 오늘의 우상 숭배로 본 그의 혜안이 놀랍다. 더불어 읽으면서 가슴 졸이며 내내 물었던 개인적 물음은 나는 지금 우상 숭배자인가? 의 예민하고 진솔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내내 나의 심령 안에서 싸운다. 나는 본질을 추구하는 예배자인가? 아니면 본질을 던져 버린 우상숭배자인가? 이 질문의 동기는 전적으로 흔들리며 길을 걷게 한 저자의 문제제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했던 답을 저자가 대신해 주는 행운을 얻었다. “본질을 잃어버린 종교처럼 추한 것은 없다. 추하기만 하면 그래도 다행이다. 추할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p,55) 은퇴하는 날까지 이 정신과 고집이 흔들리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가난한 그리스도 교회, 가난한 그리스도인 아씨시에서 저자가 줄곧 강조하는 정신이 있다. 그것은 프란체스코 정신이다. 갖고 있었던, 이미 주어졌던 부유함이라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가난해짐의 영성을 선택했던 성자 프란체스코 앞에서 저자는 독자들과 한국교회에게 목 놓아 소리친다. “욕망의 특색은 과도함이다. 과도함은 타자에 대한 배제를 낳는다. 테러와 분쟁과 전쟁의 뿌리에는 과도한 욕망이 있다. 그렇기에 종교는 욕망 충족을 약속할 것이 아니라 욕망에서 자유로운 삶을 가르쳐야 한다. 번영의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많이 소유하고 적게 존재하는 삶이 있고, 적게 소유하지만 많이 존재하는 삶이 있다. 누가 풍부한 삶을 누리는 것인가?”(pp,66-67) 활화산 같은 감동의 비수이다. 카르체리 은둔소는 프란체스코가 선교지를 떠돌다가 다시 돌아와 기도하던 장소인 이곳에서 저자는 성자가 설교하던 아주 초라한 설교단에 올라섰을 때의 감회를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소박하고 초라한 설교단 앞에 서는 순간, 저 깊은 곳에서 걷잡을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 수를 가지고 목회의 성공을 가늠하는 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쩌면 이 초라한 설교단을 비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초라한 설교단으로부터 교회의 진정한 개혁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말을 잘 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려 했기에 그는 무너지는 교회를 가녀린 어깨로 떠받칠 수 있었던 것이다.”(p,72) 작은 교회의 목사들은 목회를 실패했기에 대형교회 목사들을 비난한다고 지적질하는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 버젓이 큰소리는 치는 수준이 이 땅에 존재하고 교회의 수준이니 울고 싶은 심정이다. 프란체스코 성당에 그려진 성화들의 공통점은 ‘청빈’이라는 저자의 토로가 귓가를 때리며 공명한다. 가난해지지 않으려는 교회, 가난과는 가능한 멀리 떨어지려는 교회, 그들이 해석하는 주님이 선포하신 8가지의 복의 제 일 복은 딴 나라의 이야기이리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개역개정 누가복음 6:20) 평화는 하나님의 판단에 동의할 때 이루어진다. 아씨시의 어디를 가든 ‘pax et bonum’ (평화와 선)이라고 보고한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면에서 프란체스코는 그가 평화였고, 평화로 가는 길의 역할을 했다. 오늘 한국교회가 평화로 가는 징검다리이고, ‘평화와 선’ 의 매듭짓기의 결론이었으면 싶다. “거룩함이란 습관적으로 하나님과 한 마음을 갖는 것이며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판단에 동의하며 그 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며,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며,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성경의 기준에 맞추어 사는 것이다.”(p,102) 저자는 영국 성공회 주교인 존 카를로스 라일의 말을 인용했다. ‘거룩’의 재조명이다. ‘하나님의 판단에 동의하는 것’ 서평자가 섬기는 교회 옆에 석재가 있다. 돌 깎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소음을 견디는 것이 많이 힘들다. 헌데 반면 받는 은혜가 쏠쏠하다. 석공을 보고 있노라면 말이다. 누군가의 주문을 받고 비석을 만드는 석공을 보면 비 오듯 땀이 흘리는 동안 무지막지한 돌덩이를 깨고 부수고 다듬고 하다가 하나의 예술적 완제품이 만들어지는 진풍경을 본다. 완제품의 목적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과감히 부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기막힌 작품이 된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질문하다가 석공을 통해 배우는 감동과 교훈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 일체의 것을 부수는 작업이 신앙이다. 내 자아와 고집과 이성과 판단을 부수는 것 말이다. 그럴 때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평등한 안식이 하나님의 안식이다. “사람들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함으로 역사에 참여하고 이렛날은 성별함으로 역사를 넘어선다.”(p,156) 아브람 요수아 헤셀의 말을 저자가 인용했다. 저자는 단테가 ‘신곡’을 완성한 라벤나에서 너무나도 고요한 ‘안식’ 이라는 느낌을 경험했다. 그 경험의 소회를 이렇게 피력한 것이다. 6일까지는 역사에 참여하고 7일이 되는 날에는 역사를 넘어서는 것을 진정한 안식이라고 표현했던 헤셀의 말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서평자는 ‘안식’ 이라는 개념을 아주 인상 깊게 해석한 학자로 한 명을 뽑으라면 컬럼비아 대학교의 구약 교수인 월터 브루그만 교수를 뽑고 싶다. 그의 신명기 5:12-14절에 기록된 신명기 신학의 안식일 계명을 아주 현대적인 의미로 잘 이해했다고 서평자는 판단했기 때문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신명기 5:12-14 개역 개정) 눈에 띠는 것은 브루그만의 안식일 준수 계명이 이집트의 바로 정치와 폭력과 같은 길을 가지 말 것과 일체의 그런 폭력에 저항하라는 의미로 해석했다는 점은 신선하다. 이집트의 절대 폭력 권력으로부터 430년 동안이나 철저히 인권과 권리를 박탈당했던 히브리 민족에게 주어졌던 것은 쉼이 없는 노동이었고, 착취였다. 이것이 바로 치하의 히브리의 자화상이었다. 그곳에서 탈출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에서 혁명적인 안식의 율례를 선포하셨다. 제 7일에 안식하라는 선포도 히브리 민족에게는 경험해 보지 않았던 혁명적 발상인데 더불어 안식일에 쉬는 대상을 너와 네 아들이나 딸들에게만 국한 한 것이 아니라 네 남종, 네 여종, 네 소, 네 나귀, 네 모든 가축, 네 문 안에 거하는 객”까지의 외연 확장이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의 신학은 평등한 안식이었다는 말이다. 누구도 안식에서 피해를 당하거나 차별함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선언 말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가 인용한 “이렛날은 성별함으로 역사를 넘어선다.”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갈파는 서평자에게도 의미 있게 설득되었다. 가끔 신앙심이 특별하게 좋다는 크리스천 CEO 들이 여론 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일은 쉽니다.’라는 슬로건이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가 있다. 정말로 본인이 경영하는 경영의 터전에 있는 식구들과 평등한 안식을 하고 있는가? 에 상당수가 정직하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이다. 평등한 안식은 내가 이집트에서 평등하지 않게 당했던 불평등의 왜곡을 재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사인이다. 이 사인에 순종하는 것이 성별함으로 역사를 넘어서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진짜 공동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지어져가는 공동체가 진짜 교회이다.”(p.162) 볼로냐에서 갈파한 저자의 일성이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어져 가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일까? 저자는 가난을 사랑하는 교회,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임을 역설한다. “가난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가난해 질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를 타락으로 이끈다. 돈과 교회의 위험한 결탁은 결국 교회를 망가트리고 있다.” (P.162) 내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한국교회에 들려주는 조종처럼 들린다. 저자는 본서의 글 마무리 부분에서 가끔 찾아오는 신학생들이나 젊은 목회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교회도 좀 커지고 예산도 많아야 하지 않겠는가를 진진하게 묻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해 준 말을 이렇게 소개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은 절대로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예산을 세우고, 그것을 집행하고, 관리하는 일이 중심이 되면 복음의 정신이 가뭇없이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돈은 편리한 수단이지만 그 편리함에 의존할 때 사랑의 능력은 현저하게 줄어든다.”(p,306) 저자는 이 순례기의 클라이맥스로 떼제 공동체 여정을 담고 있다. 서평자는 떼제에서의 저자의 변을 글을 시작하면서 나누었다. 떼제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저자나 거기에 찾아와 순례를 행하여만 영성 회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본 또 다른 시각의 목회자의 변을 나누었다. 서평자는 이 점에 있어서는 후자 쪽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느낀 떼제에서의 영적 경험은 한 번은 경험해 보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안식에 젖어보고 싶은 마음이 한쪽에서 꿈틀거린다. 행복한 편승 서평자는 김기석 목사의 글을 참으로 좋아한다. 그가 글을 잘 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 이유이다.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진하게 아롱져진 영성 체휼 때문이다. 글 잘 쓰는 사람들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영혼을 울리는 글을 쓰는 자는 흔하지 않다. 왜? 간단하다. 영성이라는 것은 영혼의 세수를 하고 쓰는 일기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영혼의 옷매무새를 다시 고치게 된다. 그의 글을 읽으면 한국교회의 희망이 보인다. 그의 글을 읽으면 운다. 그의 글을 읽으면 웃는다. 그래서 서평자는 행복하다. 저자는 책을 마치면서 이렇게 갈무리한다. “그 나라는 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다. 아픔이 있는 자리,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이 배어 있는 땅, 바로 이곳 하늘이다. 깊이를 뒤집으면 높이가 된다. 사다리가 없다고 낙심할 것 없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낮은 곳으로 흐르다 보면 하늘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이제 다시 길을 떠나야 할 때이다.”(p,352) 글을 읽는 내내 그가 걸었던 순례의 여정에 행복하게 편승했다. 독자들도 저처럼 참 좋은 길을 여행해 보지 않으시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