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시선2024-06-10 15:27
작성자 Level 10

40c89f785892d3e657577783be7d4d78.png




ㆍ지은이 조정래
ㆍ출판사 해냄
ㆍ작성일 2015-02-02 21:52:27

 

조정래의 “시선” (해냄)을 읽고

 

조정래 작가를 이해하는 축을 많은 사람들은 그가 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작(前作)들 때문이리라. 아마도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대변되는 그의 작품들 말이다. 그렇다. 부인할 수 없는 대목이다. 작가 스스로가 항상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 땅에 현존하는 많은 소설가들이 1인칭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한 불만과 안타까움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쓰기 쉬운 소설, 복잡하지 않아 독자 대중들이 많이 찾는 소설 쪽으로 기우는 천박함에 대한 경고이리라. 나는 조 작가의 이 지적에 관심을 갖는다. 문학이라는 장르만큼 인간의 내면을 깊이 터치하는 영역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해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는 인생을 총체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역사를 통해 과거를 알고, 사회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여 미래를 조망하는 것이다.” (p.210)
나는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작가의 말과 같은 맥으로 말했던 멘토가 있다. 개인적으로 닮고 싶은 목회의 선배인 100주년 기념교회를 섬기는 이재철 목사가 그의 책에서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소설가 중에 약관의 나이에 훌륭한 작품을 쓴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소설은 삶의 흔적과 아픔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옳다. 분명한 사실이다. 문학의 위대함은 인간의 내면을 쓸어 담는 능력인데 그 능력은 결코 삶의 너울을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며 부서지고, 자빠지고, 넘어지고, 아파했던 기억이 소설의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조정래 작가는 이 점을 다양한 문학적 소양을 갖고 있는 자들과의 대담 형식으로 본인의 소설론을 펼치고 있는 책 ‘시선’ 에서도 매우 강조한다. 동시에 그의 걸출한 전작들 역시 그가 세월의 흐름을 통해서 갖게 된 역사의식을 토대로 이루어낸 작품들임을 곳곳에서 밝힌다. 조 작가는 이 책에서 부분에 그가 고정하고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그만의 자존감을 피력한다. 몇 가지만 추려보자.
“인생이란 자기 스스로를 말로 삼아 끝없이 채찍질을 가하며 달려가는 노정이다. 그리고 또 인생은 두 개의 돌덩이를 바꿔 놓아가며 건너는 징검다리이다. 하물며 작가의 길이란….”(pp.28-29)
“작가는 그 시대의 산소요, 그 시대의 스승이요, 그 시대의 나침판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사회적 소명과 역사적 책무를 갖고 있는 자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p.38)
“우리 인류가 처한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자구 온난화로 일컬어지는 환경 파괴이고, 다른 하나는 독주하는 자본주의의 비인간화이다.” (p.46)
조 작가는 오늘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면 보수적인 색채의 사람은 아니다. 그는 그의 글 중에 지천에서 진보적인 사상과 개혁적인 마인드로 평가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느낌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 시절 영어의 보편화를 위해 국사 공부를 줄이게 한 것을 강하게 비난한 것, 혈세 22조를 들여 4대강 사업을 하여 전국토를 초토화시킨 것, 친미, 친일로 매진하여 중국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한 것까지 거두절미하며 맹폭하고 있다. 반면 참여연대와 같은 야성이 강한 단체의 이사를 하고 있는 등 그의 행보 자체를 보면 오늘의 정치역학구조로 보면 아슬아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2인자라고 불렸던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을 두고 본받고 싶은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조건적인 진보적 사상의 소유자라고 말하기에는 왠지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작가는 극단적인 편벽됨과 편협함의 이데올로기로 그의 사상적 표현을 글로 쓰고 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둣 하다. 그의 글은 진보와 보수의 개념이 아닌 민족주의적인 색깔이 강하게 여겨진다. 동시에 그는 민족주의라는 테두리를 쇄국적이거나 혹은 우물 안 개구리의 모습으로 수구화 시키지 않는다. 다만 나라의 혼과 정신을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글쟁이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이런 민족적 가치를 태백산맥으로 위시하여 그의 역사 대하소설을 통해 진하게 독자들에게 전해 준 바 있다. 최근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정글만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2억 중국을 품는 것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지는 자산임을 강력하게 촉구함으로서 21세기 대한민국호가 나아갈 방향성을 아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동시에 그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자기 관리에 대하여도 철저하게 생을 지내 왔음을 피력해 준다. 그의 자기 관리라는 질서가 없는 오늘, 또한 자기관리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현대 이기들이 널려 있는 오늘을 사는 많은 독자들에게 소리 없는 도전을 준다. 그는 자기 관리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한다.
“아침 6시에 기상, 7시에 아침 식사, 12시 30분에 점심 식사, 오후 6시 30분에 저녁 식사, 아침에 일어나면 초중고 시절에 했던 국민 보건 체조를 열심히 하고 소식과 채식을 원칙을 철저히 지킵니다. 식사 시간은 1시간 30분, 숟가락은 절대로 쓰지 않고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듯 천천히 먹습니다. ‘태백산맥’ 을 쓸 때 하루에  200자 원고지 35매, 이번에 ‘정글만리’ 를 쓸 때는 25매씩 썼습니다. ‘정글만리’ 를 포털 사이트에 연재할 때 6개월 동안 하루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규칙적인 산책 때는  젊은이도 따라오기 어려울 정도의 속보로 걷습니다. 한 번 정한 원칙은 절대로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을 삶의 철칙으로 삼고 있습니다.”(p.155)
조 작가가 자신의 자기 관리를 이렇게 철저하게 한 이유를 서평자가 읽다가 이런 생각과 질문을 해 보았다. ‘태백산맥’을 비롯해 ‘아리랑’, ‘한강’ 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보고(寶庫)와 같은 작품을 남긴 위대한 작가는 그냥 탄생하지 않았다는 감흥 말이다. 동시에 앞에서 열거한 세 권의 책을 합쳐서 1,300만 부가 팔렸다고 하니까 대한민국 국민 4명 중에 한 명이 그의 책 중에 한 권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이렇게 엄청난 독자층을 유지하고 있는 작가가 어떻게 탄생했을까? 의 질문 말이다. 그것은 무서우리만큼 냉정한 자기관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과 자답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이렇게 또 설파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기운이 제일 센 사람이 아니라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다.”(p.142)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또 하나 독자들에게 신선한 도전을 주고 있다. 그는 작가는 인맥, 학맥, 혈맥에 휘둘리지 않는 상투적인 것과 싸우는 사람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는 저자의 스승이다. 그러나 저자는 친일주의자였던 미당과 결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음을 보고해 준다. 그와의 결별은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상투성을 뛰어넘는 일이었고 그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못 박는다.
“모든 예술은 상투성과의 싸움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의 싸움이라는 말이다. 전에 있었던 작품들과 싸워 이겨야 하며 심지어 자기가 쓴 것과도 이겨야 하는 극복의 대상이다.”(p.173)
그는 또 이렇게 작가의 길을 표현했다.
“‘창작’을 해야 하는 작가는 언제나 ‘새로운 도전’ 앞에 서야 하는 존재들이고, 그 새로움은 ‘자기 부정’부터 해야 하며 ‘극기의 길’이고 ‘길 없는 길’ 이다. 외로우나 그래서 보람이 있는 길이다.” (p.254)
이 대목에서 서평자는 같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는 저자이지만 그가 마치 거대한 성직을 감당하는 거목으로 여겨졌다.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감당하는 자들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대사를 이룰 수 있겠는가? ‘길 없는 길’이라는 패러독스의 외로움을 극복할 때 임하는 가장 아름다운 보람은 그 길을 가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리라.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렇게 역설한다.
“지속적으로 열정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작가의 능력이다.” (p.274)
세작의 작가도 이 정신으로 산다. 목사인 내가 그의 열정에 뒤져서야 되겠는가? 가슴이 뛴다. 주님을 향한 열정 때문에.

ps: 조정래 작가의 무게를 보았다. 그의 무게는 민족혼을 불사르는 능력의 무게이다. 어느 누가 말한 대로 그의 글을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희망이 있다. ‘시선’에서 나는 그의 혜안을 나의 통찰로 접목시키는 수확을 거두었다. 이 땅에 가볍지 않은 작가가 있어서 감사하다. 목사로 살고 있는 ‘나’ 지칠 줄 모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열정을 갖고 뛰어야 한다. 배운 도전이요 가르침이다.

2015년 1월 21일 오후 5시 35분 경. 

이전흔들리며 걷는 길 Level 102024-06-10
-시선 Level 102024-06-10
다음사귐의 기도 Level 102024-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