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의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꽃자리, 2015)를 읽고. 날숨과 들숨으로 아주 오래 전, 백주년 기념교회를 섬기는 이재철 목사가 집필한 ‘회복의 신앙’에서 개인적으로 큰 공명을 주었던 글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 목사께서 제네바 한안교회를 섬길 때 경험했던 일화였다. 제네바 한인교회는 100년이 넘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오비브(Eaux-vives) 교회의 예배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는데 오늘날 그들의 교회는 이삼십 명 정도 밖에는 모이지를 않는 초라한 교회가 되었음을 보고했다. 매주 월요일 몇 분이 모여 프랑스어로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을 알고 이 목사께서 이 성경공부를 참관하게 되었다. 가보니 몇 분의 노인들이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의 장면을 나누며 공부하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노인이 순서가 되어 본인의 성경 나눔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 것을 소개한다.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을 때,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을 때, 나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했을 때, 예수님은 그 유혹들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우리에게 유혹이 엄습할 때가 있다. 그 때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야한다. 말씀은 명료하다. 명료하지 않은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말씀 안에 빛이 있고 길이 있다.” 읽고 나서 서평자인 나 또한 그 노 성도의 일갈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감격했던 적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잠시 머무는 삶’ 金科玉條(금과옥조)에 견주는 성찰이다. 서평자는 개인적으로 개척 이후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 많은 책들과 여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해서 책읽기에 나름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문제는 접하는 책들을 통해서 다양한 지식들을 축적해 가지만 폐부를 찌르는 저자들의 글들보다 단순히 지적인 충족으로 만족해야 글들을 자주 만난다는 점이다. 읽을 때는 지식 충족이라는 자기만족을 체감하지만 가끔은 헛헛하다. 아마도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영적 공허함 때문이리라. 이런 차제에 김기석 목사의 ‘말씀의 빛 속으로 거닐다.’를 만났다. 요한복음 글들의 해석을 간추린 글들이기에 어찌 보면 요한복음 강해서 같은 느낌을 갖지만, 이 책은 요한복음 강해서가 아니다. 저자가 책을 시작하는 글에서 잠시 언급을 한 것처럼 서평자는 이 책에서 제자 요한의 지성을 빌려 말씀하신 나의 주군 되신 예수의 삶을 엮은 씨실과 날실의 통합적 보물들을 찾아낸 느낌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분명히 문자를 통하여 글을 기록하였는데 저자의 해박한 독서력을 너무 많이 인정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서평자는 이 책에서 예수의 말씀을 날숨과 들숨으로 함께 호흡하는 신비적인 은혜를 경험했다. 그래서 이 책의 여행은 행복했다. 말은 많은 데 말이 없다. 저자는 책의 앞머리 부분에서 박노해 시인의 ‘깨끗한 말’ 중에 나오는 시어를 하나 소개한다. “말의 뿌리에 흙이 묻어 있지 않은 말/ 말의 잎 새에 눈물이 맺혀 있지 않은 말/ 말의 꽃잎에 피가 배어 있지 않은 말을/ 나는 신뢰할 수 없으니”(p,15) 시인의 글을 소개한 저자는 이렇게 부연한다. ‘참 말이 그리운 시대’ 갑자기 이 글을 읽다가 눈물이 핑 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목사로 사는 내가 뱉어내는 수없이 많은 말들 중에 시인의 으름장에 버텨낼 수 있는 말들을 과연 얼마나 할까에 별로 자신이 없어서였으리라. 그러나 조금씩 배워간다. 영혼을 움직이는 말을 내뱉기 위해. ‘말씀’ 이라는 단어를 저자는 말에 숨이 있다고 갈파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의 수단으로 이용하셨던 것이 말씀이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보기에 좋았던 것은 하나님이 선포하신 말에 숨이 들어가 있어, 그 숨이 일체의 피조물들에게 도달했기에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에도 걸작이 되었던 듯하다. 아쉽고 유감스러운 것은 태초에는 그 숨이 들어가 있는 ‘다바르’가 있었는데,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다바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상실되었다는 점이다. 말은 홍수처럼 쏟아지는 데 들을 말이 없다는 점이다. 언젠가 도전적인 문장을 본 기억이 있다. ‘교회는 많은 데 갈 교회가 없다.’ 같은 맥락으로 ‘말은 많은 데 말이 없다. 참 말 말이다. ‘다바르’ 말이다. 숨이 있는 말이다. 이런 빈곤함과 아쉬움의 현장에 있는 서평자에게 요한복음의 서언은 벼락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개역개정판) 태초라면 오늘 나에게는 요원하다. 요원하다는 말은 인격적이지 않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허나 제자 요한은 그 비인격적 관계의 요원함을 극적으로 좁혀준다. 이어지는 요한의 보고를 들어보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서평자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여 섬기는 교회에서 나눈다. ‘다바르의 현재성’이 바로 성육신이라고. 해서 우리들의 성육신의 신비를 경험하면 하나님의 말의 숨이 나의 폐에 주입되는 것이라고. 서평자의 해석학적 관점이 옳든 그르든 관계없이 항상 말씀이 나에게 현재화되도록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나만의 고집이다. 그런데 이런 숨이 있는 말씀을 현재화에 시키는 데 참 좋은 선생님이 있다. 저자이다. 서평자는 저자를 통해서 참 말을 듣는 일상을 갖는다. 말이 많은 시대이기에 참 말을 발견하는 것이 결코 녹록하지 않기에 저자가 함께 공명한 말씀의 빛 속으로 거니는 것은 기막힌 감사의 조건이다. 뼈가 있는 소리 저자는 믿음이라는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믿음이란 교리나 신조에 대한 승인이나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철저한 신뢰이고 사랑이다. 삶을 그 분께 맡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용기이다.”(pp,46-47) 이 글을 정의한 저자는 성경적인 실례의 주인공으로 수가성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을 등장시킨다. 주지하다시피 여인은 예수께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존재가 바로 예수 자신임을 소개받는다. 그 예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들어내고 싶지 않은 과거를 끄집어내서 그 쓴 뿌리를 치유 받는 과정이 필요함을 예수와 여인의 대화 속에서 발견한다. 여인은 자신의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그 분 예수께 자신의 삶을 맡기는 용기의 선택을 감행한다. 그렇다. 믿음은 용기이다. 그 용기는 예수께로의 위탁이다. 서평자는 여기에서 한 가지 부연하고 싶은 대목이 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쓴 뿌리이다. 여인은 不貞(부정)한 여인인가? 아니면 희생당한 양인가? 전자는 복음주의권 교회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성서 해석의 밑받침을 갖고 있는 자들은 여인을 부정한 여인으로 보는 것을 금기시 한다. 당시 이 여인의 삶의 정황은 가부장적이고 남성편의주의의 제도 하에서 철저히 성적으로, 인권적인 차원에서 짓밟힌 여인이라는 해석을 정설로 여긴다. 서평자는 이 두 가지의 해석 중에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 이렇게 후자의 해석에 기울 경우, 믿음에 대한 저자의 정의는 더욱 곰살맞다. 왜냐하면 의지할 것이 없었던 이 여인은 그녀의 녹록하지 않았던 과거의 아픈 편린들을 전적으로 주께 의뢰한 것은 그만큼 주님의 선포에 따뜻하게 반응한 여인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이렇게 소리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14, 개역개정판) 기형도는 “소리에도 뼈가 있다.”고 하였던가? 여인은 주군이신 예수께서 행하신 뼈가 있는 선언에 새로운 역전 인생을 살게 되었다. 서평자는 글을 읽으면서 조금은 교만해지기로 마음먹어 본다. 사람이 변할 수 있는 존재인가? 의 질문에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서슴지 않고 ‘노’라고 답하지만 참 말인 예수의 뼈있는 말 숨들을 통해서라면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는 뭐 그런 교만함을 갖고 싶다.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저자는 그리스도인이란 원칙을 지키는 자임을 분명히 한다. 그들은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다. 이것은 고집과는 다른 것이다. 원칙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고 했다.(p,70) 저자의 말을 따라가다가 숨고르기를 했다. 원칙을 따른다는 것이 오늘의 시대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제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원칙을 주장하면 손해를 본다는 말은 이제 식상할 정도이다. 참 괜찮은 말인데 시대가 그렇게 원칙을 지키는 자들을 마치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교회 공동체에서 지켜 나아갈 원칙은 무엇일까? 서평자는 이 고민을 할 때마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지체들의 변심(?)에 분노하며 외쳤던 아우성이 아닐까 싶어 곱씹곤 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 1:10절 개역개정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이유는 사람을 좋게 하는 이상한 괴물의 형태로 돌연변이 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주군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행위를 하신 적이 없는데 교회는 기성 권력을 아부하는 그래서 힘 있는 존재인 기득권 숙주에 기생하는 방향을 서슴없이 주창하는 어이없음을 본다. 친한 친구에게 전언하여 들은 이야기가 있다. 서울 강남의 중형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가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이 삶의 부분에서 너무 ‘아니올시다.’ 의 삶을 즐기는 것 같아 큰마음을 먹고 주일 공 예배에 시간에 주초 문제를 다루었다고 한다. 친구는 아주 떨리는 마음으로 고조선시대(?)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이다. 결과는 그 다음 주일, 약 150여명의 신자들이 교회를 불출석했다는 아픔을 전해 주었다. 서평자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초를 언급한 박물관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과감하게 발언한 친구에게 씁쓸하지만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조금 과장해 보자. 순교자적인 영성이 없으면 도저히 하지 말아야 할 금기를 건드린 친구 목사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고 싶다. 주초 문제에 관하여 드리는 말이 아니다. 많은 현대를 살아가는 편리함에 익숙해진 그리스도인들, 그래서 불편한 것을 못견뎌하는 약아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불편한 말을 했다는 것에 대한 지지이다. 주초를 하면 구원을 받는가? 못 받는가? 의 천박한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라 적어도 위탁받은 양들에게 불편한 메시지를 담대하게 전한 친구에게 따뜻한 사랑을 전하고 싶은 것은 서평자의 객기이리라. 세계적인 역사학자 소피아 로젠펠트는 일찍이 이렇게 선언한 적이 있었다. “포퓰리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인민의 집단 상식에 호소한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상식만 하자. 그래도 성공한다.” 그러나 서평자는 이 의견에 반대한다. 지지할 수 없다. 로젠펠트의 말대로 그 상식이 집단화되고 여론화되면 그것은 여지없이 포퓰리즘이라는 대적하기 어려운 헐크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면 상식만 하는 자가 아니라 불편해도 원칙대로 살아야 하는 자들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는 원칙의 사람이었지 상식의 사람은 아니었기에 더 더욱 말이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바울의 선언은 더욱 마음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똥물에 들어간 사람 저자의 글에서 소개한 진수성찬을 서평집의 지면 할당의 한계로 인해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본 책의 서평에서 이 내용만큼은 누락시킬 수 없어 저자가 글의 후반부에 소개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어록은 반드시 던져주고 싶다. 너무 소름끼치게 한 감동이 임했기에 말이다. “친구가 똥물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바깥에 선 채 욕을 하거나 비난의 말을 하기 쉽습니다. 대게 다 그렇게 하며 살고 있어요. 그럴 때 우리는 같이 똥물에 들어가서 여기는 냄새가 나니 나가서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친구도 알아듣습니다. 바깥에 서서 입으로만 나오라고 하면 안 나옵니다.” (장일순의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김기석의 본 책 pp.242-243에서 재인용) 김 목사는 이 글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부연 해석했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우리는 인간의 탐욕과 폭력의 강물에 풍덩 뛰어드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다. 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주님의 사랑을 ‘동고적(同苦的) 사랑’이라고 했다.” (상위 책 p.243) 저자의 이 인용문은 서평자의 심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똥물에 들어간 사람이 바로 나의 주군이기 때문임을 알기에 말이다. 허나 이 글에 나는 눈물을 지었다. 왜? 똥물에 직접 들어가서 냄새나는 그곳에서 나가자고 설득한 끝에 데리고 나온 나의 자화상은 또 다시 그 똥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죗성으로 도배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복음성가 가사 중에 이런 노랫말을 기억한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이 사랑에 목매인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저자요, 또 한 사람은 서평자다. 같은 하늘에서 이런 감동을 같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행복한 기적이다. 사족) 주일 사역을 마치고 났는데 목감기로 인해 몹시 힘들고 아파 고통스러웠다. 핑계로 내일 새벽 예배를 부교역자에 맡겼다. 새벽의 여유로 인해 오늘 마저 남은 김 목사의 요한복음 단편의 현대적 해석을 주목한 끝에 끝냈다. 그의 조국 교회를 위한 아픈 성찰을 보았고, 나 또한 동참했다. 읽고 난 뒤에 예수께서 남기신 감칠맛 나는 혜안을 저자를 통해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하는 보너스를 받았다. 저자가 건강하기를 두 손 모아본다. 2015년 4월 26일 2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