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레베카 솔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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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팬타그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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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5-06-19 15:1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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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사의 탄식 작년 교회에서 허락한 안식월에 광림 수도원에 올라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는 어간, 수도원에 올라온 의정부에서 목회를 하는 동역자 목사를 만났다. 식탁 공동체를 나누는 시간, 그는 갑자기 격해진 톤으로 메르스 이야기를 꺼냈다. 내용인 즉은 정부가 초기 대응에 실패하여 이 모양으로 나라를 만신창이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요점이었다. 부연할 때는 세월호 이야기도 메뉴가 되었다. 아이들을 이만큼 죽여 놓고 그 누구도 정부에서는 책임지는 자가 없다는 힐난이었다. 이야기를 계속하던 그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여지없이 꺼내놓았다. “전쟁이 나면 이 정부가 우리 국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생기지를 않아요. 믿음이.” 이 이야기를 듣는데 갑자기 일전에 읽었던 미국의 대안적이고 진보적인 저널리스트인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 떠올랐다. 그는 저서의 마지막 꼭지에서 2005년 미국의 남부에 위치해 있는 뉴올리언스에 불어 닥친 강력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앙의 뒷이야기에 담긴 미국 권력자들과 기득권을 확보한 백인들의 치졸한 속살을 여지없이 고발하며 비판했다. 그 해, 미국 남부에 있는 뉴올리언스를 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초토화시켰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자연 재앙은 인간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씁쓸한 뒷이야기이다. 미국에서 가장 흑인들이 많이 사는 곳, 이로 인해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에 달하고 미국의 신자본주의 폐해가 가장 극심한 곳, 이런 이유로 미국의 엘리트 집단에서는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곳으로 지목하여 골치 아파하는 곳(실상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항상 미국의 백인들에게 적지 않은 흉기와 폭력집단으로 돌변할 수 있는 기능성이 농후한 곳이 뉴올리언스라는 선입견으로 가득 차 있어서였을까. 말 그대로 최대의 재앙을 맞이했는데도 불구하고 사후 조치나 피해 대책에 대한 당시 부시 행정부의 정책은 상당히 미온적이었고 불성실했다. 다시 말해 뉴올리언스 시민들이 당한 불행과 재앙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들이 당한 불행은 열외지역이었고, 관심 밖의 지역이었기에 재앙에 따른 대책이나 보상은 二線(이선)이었다. 만에 하나 뉴욕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떠했을까? 너무나도 유감스럽게 뉴올리언스가 당한 재앙을 바라보는 부시 행정부의 시선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여타 다른 엘리트 집단에게 뉴올리언스 시민들이 폭력집단으로 변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게 도대체 미국이라는 문명국에서 잇을 법한 일인가? 그런데 실상이 그랬다. 어떤 의미로 보면 당시 뉴올리언스에 대한 미국 정부는 악의 정부 그 자체였다. 이 기막힌 악의 행태를 레베카 솔닛은 뉴올리언스의 카트리나 대재앙 때 반응했던 부시의 행적을 여과 없이 독자들에게 보고하며 고발한다. “허리케인이 왔을 때 부시는 자신의 텍사스 크로포드에 있는 목장에서 5주간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소식을 듣고 워싱턴으로 돌아가 직무를 수행하기로 결정하기까지 며칠간 뜸을 들였다. 돌아가는 길이 에어포스원을 뉴올리언스 상공으로 나지막하게 날게 했다. 비행기에 편안히 앉아 창문으로 고립된 도시를 바라보며 것이 전부였다.” (p.421) 국가가 국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사실일까? 솔닛의 고발은 이런 정부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를 비아냥대는 에두름이다. 저자는 뉴올리언스가 자연적인 재앙으로 받은 고통은 분명히 힘들었던 아픔이었지만, 그러나 극복할 수 없을 만큼의 그리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음을 밝혔다. 반면, 정말로 심각한 고통은 같이 아파해야 할 같은 나라의 엘리트 집단에 의하여 이유 없이 더 큰 상처와 폭력을 당한 것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치명타였다. 뉴올리언스의 흑인 시민들 중에는 뉴올리언스의 지역 주변의 자경단(혹시나 모를 흑인들의 집단적인 폭동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백인들의 무장단체)원들이 가하는 총질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어갔다. “뉴올리언스 홍수 직후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내 생각에 약 18명의 아프리카계 미국 남성이 알제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살인이었습니다. 경찰이 저지른 살인, 미처 날뛰도록 허가받은 자경단원들이 저지른 살인이었죠.”(p,377) 글을 읽다가 마치 1980년, 우리나라의 남녘의 모처에서 일어났던 살육의 모양새처럼 보여 너무 아팠다. 저자는 뉴올리언스의 비극을 여기서 마무리하지 않고 이런 국민 살해에 대하여 엄격한 법의 잣대로 약한 자를 돌보야 할 치안을 맡은 주 방위군들의 방관을 서슴없이 토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웃들의 아픔에 눈을 감았다는 것이었다. 도리어 그들은 질서 유지, 폭력과 폭동 진압이라는 명목으로 뉴올리언스 시민들을 범죄자 취급하며 린치 했다. 극단적 우파 여론인 폭스는 뉴올리언스에 대하여 범죄의 소굴로 여론화시키기에 목숨을 걸었다. 이에 동조하는 일련의 권력을 가진 자들의 폭력은 정당성으로 포장되어 이중의 고통을 뉴올리언스 시민들에게 이중적이고 치명타를 가했다.
“그들을 괴롭힌 것은 정부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한 때에 자신들이 동물로 취급되고 적으로 취급되는 현실이었다.”(p,367)
뉴올리언스에 나타난 국가가 재앙을 당한 국민에게 보여준 일례들은 한 가지 중요한 의문점을 제기해 준다. “국가가 정말로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의 진정성이 있는 질문 말이다. 혹시 국가는 권력자들의 신분 유지와 정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만의 살맛나는 놀이터는 아닌가? 국가라는 권력 공동체에 정치적 윤리는 존재나 하는 것일까? 앞서 글을 시작하면서 국가적 위기 앞에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요행수를 바라고 있는 정부를 향하여 이 정부를 믿은 수 없다고 질타했던 한 목회자의 비수가 혹시 맞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제 문제 말이다. 재야 작가 유시민은 이렇게 그의 책에서 진정한 국가상을 진심을 토로했다. “내가 바라는 국가는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이다. 국민을 국민이기에 존중하는 국가이다.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량한 시민 한 사람이라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국가이다. 나는 그런 국가에서 살고 싶다.” 서평자도 유시민의 토로에 동의한다. 국가가 국가일 수는 유일한 전제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할 때 만이다.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국민의 아픔을 외면하는 국가는 국가이기 이전에 넓은 의미로 님비 집단에 불과하다. 보호해야 할 약한 국민을 위험한 단체로 낙인찍어 게토화 시키는 국가는 국가일 수 없다. 그러나 뉴올리언스가 이런 상상할 수 없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국가권력이 아닌 시민사회의 부활 때문이었다. “시민사회는 시민들의 병렬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방식으로 공적 삶과 공공의 재산의 관리, 공적 결정에 참여하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국가와 국가 구조의 기능은 입법, 국방, 안보, 정의의 집행처럼 다른 누구도 수행할 수 없는 것들로 제한된다.”(pp.221-222) 체코 민주화의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한 하벨이 말한 이 정신과 말이 뉴올리언스를 건져 올렸다. 이 말은 미국의 엘리트 집단이 원하는 대로의 뉴올리언스가 폭력집단으로 변질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그들의 바람을 뉴올리언스의 시민 정신과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단체의 공공적 질서 유지로 인해 그들의 저의를 보기 좋게 무력화시켰다는 말이 된다. 국가가 못하면
서평자는 본서에서 오늘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로 집단적 코마의 상태로 빠져 있는 대한민국 호를 보았다. 대한민국의 힘은 어디에 있는가? 국가인가? 별로 신뢰가 안 간다. 오히려 시민사회이지 않을까? 수도원에서 만난 목회자의 일침대로 나는 엘리트 집단에서 가공할 만한 위선과 비리를 저지르고도 그 누구하나 책임지는 일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이 좌파 정부이든, 우파 정부이든 막론하고 말이다. 레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각종 재앙의 기저에는 절망과 참담함과 포기라는 것으로 도배되지 않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도리어 그 절망의 한 복판에는 연대와 사랑의 공동체의 헌신과 다시 삶의 기적들이 피어올랐음을 보고한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한 지진으로 인하여 잿더미가 된 재앙의 한복판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질서를 일구고, 서로 돕고 상호 협조하여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주도적인 시민 단체인 미스바 카페의 문구는 이렇다. “자연이 한 번 손을 대면 전 세계가 친구가 된다.”(p,439) 솔닛의 이 작품의 원제를 이렇게 지었다. “A paradise built in hell.” ‘지옥에 세워진 천국’으로 말이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저자는 샌프란시스코의 대지진의 재앙으로부터 시작하여 1917년에 일어난 캐나다 핼리팩스 항구에서의 대 폭발 재앙, 1985년의 멕시코시티의 대지진, 2001년 9.11 테러로 이어지는 끔찍한 재앙들을 소개하면서 대단히 중요한 활동을 소개한다. 그것은 국가가 감당하지 못한 무능력한 사후처리를 기적처럼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합으로 극복해냈다는 보고이다. 무질서하고 무정부적인 혼란을 틈타 약탈, 살인, 방화 등등의 걷잡을 수 없는 통제 불능의 일들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열거한 재앙들 중에 그 어느 것 하나도 소개한 일례의 무질서는 발견되지 않고 도리어 성숙한 시민 의식으로 정부가 뒷짐 지고 있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을 때 그들은 도리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위대한 연대와 협력으로 재앙을 이겨냈음을 보고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재앙 때 한 젊은 여성이 다른 평안한 지역에 있었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저자는 소개한다.
“이곳에서는 모두들 누구에게나 말을 걸어. 덕분에 소개 없이도 아는 사람이 수백 명은 늘었지. 대부분의 재난에서 경계가 무너지면서 타인들이 서로에게 말을 걸고 경험을 공유할 때 사람들이 해방감을 느끼는 것처럼,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누구를 알고 지내야 하는지 규율에 얽매여 있었던 그런 규칙을 제거하고 진정한 해방감을 느꼈다.”(pp,56-57) 국가가 하지 못하면 국민이 그 일을 한다는 원칙을 폐허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저자의 통찰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서 그랬나? 영화 변호인에서 송광호가 외쳤던 그 열변의 대사가 가슴 뜨거웠던 이유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유익균을 전염시키는 사람 서평자는 글을 읽으면서 또 하나의 숨겨진 감동을 보았다. 솔닛은 의도적으로 기술한 것 같지는 않지만 목사로 사는 서평자로서는 그것이 직업의식 때문에 마땅히 그 감동이 크게 보였다. 재앙의 현장에 투입된 시민 사회의 주역들 중 예외 없이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예외가 없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본주의의 괴물 앞에서 아주 작아 보이는 힘이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의 힘이다. 카트리나 재앙 앞에서 모든 것을 잃은 마을 주민들에게 집을 개방한다는 광고를 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들을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발암 물질인 포름알데히드가 홍수로 인해 끊임없이 방출되는 곳에서 아픔을 당한 자들을 떠나지 않고 보호해 주던 자들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깊은 산속 옹달샘을 통하여 삶에 지친 영혼들에게 생수 같은 글들을 통해 위로해 주는 작가 고도원의 글을 읽었다. “가을마다 이토록 낙엽이 많이 떨어져 썩어가는 데 산은 왜 늘 향기롭지? 질문에 답을 찾았다. 낙엽에는 수분이 없다. 완전히 말라서 떨어지는 것이다. 0.1밀리그램이라도 수분이 남아 있으면 그 수분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나뭇가지에 매달려 기다린다. 그러다가 완전히 마른 상태가 되어야 떨어진다. 그렇게 떨어진 낙엽은 배추처럼 썩는 것이 아니라 숲속에 가득한 유익균에 의해 발효되는 것이다.” 글을 읽다가 낙엽 같은 그리스도인을 한참 생각했다. 누굴까?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익균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누굴까? 집중하다가 이렇게 결론을 내린 적이 있었다. ‘자기를 완전히 비우는 그리스도인, 0,1밀리그램의 자아라는 수분을 남기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런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귀한 존재는 교회 건물 안에 있지 않고 삶의 현장에 있다는 생각 말이다. 마치 솔닛이 조명한 폐허 속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처럼. 나름 책읽기의 기쁨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주는 기회를 오랜만에(?) 만났다. 글을 읽다가 너무 큰 꿈을 미리 꾸는 그래서 소위 말하는 김칫국부터 먼저 마시는 우스운 꼴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기독교가 무차별적으로 공격받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 대한민국 호와 교회 공동체 안에 불어 닥친 재앙과 위기는 도리어 기독교인의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같은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싶어 심쿵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교회 내부의 건물 속이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장임을 부인하는 자는 건강한 신앙과 신학을 갖고 있지 못한 자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나의 삶의 정황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수만 있다면 바로 거기에 다시 한 번,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일어서는 통로가 될 것이라는 무겁지만 긍정적인 소망을 체휼했다는 점에서 레베카 솔닛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고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너무나도 귀한 뜻 깊은 공부의 시간이었다. 서평자의 소망은 지옥에서 천국을 만들어내는 기적이 그리스도인들의 몫임을 느끼며 교회 공동체가 이 일을 빼앗기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이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