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영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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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IV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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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7-11 11:1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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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의 ‘팔레스타인을 걷다.(IVP)’를 읽고 지금 이스라엘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 기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맹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련의 이 기사를 볼 때마다 아주 기분 나쁜 선입관이 나도 모르게 스며든다. 이스라엘이 이겨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고정의 생각이 말이다. 항상 우리는 이스라엘은 다윗처럼 생각했다. 반면 팔레스타인은 다윗을 괴롭히는 사울 정도로 정의하는 만행을 저질러 왔다. 아마도 진지한 신학적 성찰을 배제한 채 이스라엘 편애를 가르쳤던 교회의 잘못 때문이리라. 워싱톤 한인교회를 시무하는 김영봉 목사의 성지 순례 후기인 이 책은 이런 일련의 사고의 틀을 바꾼다. 하갈의 이야기를 도입하면서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 물론 하갈의 자식이었던 이스마엘의 후손을 아랍인들로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팔레스타인이라는 공동체를 이스마엘의 한 작은 지류로 인정하는 것을 피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하갈을 결코 버리시지 않은 하나님을 우리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들이 관심은 이삭의 계보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힘이 있는 자들이 자행한 범죄 중에 분노했던 사건을 몇 가지 추리라고 하면 반드시 꼽는 것이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다. 힘이 있는 자의 힘에 의해 전쟁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을 치룬 악의 축이라고 정의한 반대의 악들에 의해서 자행된 전쟁, 그 전쟁을 시작해야만 얻을 수 있는 천문학적인 돈 때문에 맘몬이라는 신에기 바친 미국만을 위한 전쟁, 그런데도 전혀 지금까지 그 때의 전쟁에 대하여 사죄함이 없는 전쟁을 그냥 그렇게 묵과하는 자들이 우리 근처에 즐비하다. 당사자의 무자비함과 무감각한 그렇다 치더라도 바그다드에 부시의 미사일들이 날아들 때, 지구 이편에 한 농촌에 살고 있었던 권정생 선생의 그 날 열이 40도까지 올라갔다고 술회한 그의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전쟁의 타당성을 성서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운운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아마도 이스라엘을 다윗으로 팔레스타인을 골리앗으로 매도하는 자들임에 틀림이 없기에 그렇게 부시의 전쟁을 옹호하는 자들에 대하여 절망할 정도로 분노했던 적이 있다. 그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의 이성 안에서는. 지금도 팔레스타인인들이 살아야만 하는 땅으로 일방적, 물리적, 군사적 우위를 기초로 설정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을 압제하고 있는 자들이 정의하는 하나님의 미슈파트와 츠다카는 무엇인지를 묻고 싶다. 동시에 선민적 우월의식과 하나님의 헤세드를 가르치고 있는 자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 신앙은 과연 그 정체가 무엇인가? 묻고 싶다. 이 분노의 일부분이 김목사께서 이스라엘 성지 후담인 팔레스타인을 걷다를 읽으며 나름 대리 보상의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약간의 언급이라는 유감이 있기는 하지만 요르단과 이집트에서의 방문기를 통해 성지로 불리고 있는 유적들에 대한 찬사와 감동의 이야기보다도 그 뒤에서 잊혀져 있는 또 힘이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희생들을 위로하고 압제자들의 욕심의 의해 지어져 폐허가 된 건물들을 소개할 때는 경건해지는 느낌까지 나는 배웠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받는 교훈과 감동은 여기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김 목사는 방문한 바로 그 곳 성지에서 본인 스스로가 1인칭 객관화시킨 영적인 감동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항상 한 쪽으로 기울면 다른 한 쪽을 무시하게 되는데 이 책의 메리트는 이 두 면의 장점들을 표출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40년 광야 생활에서는 그곳이야 말로 하나님만 볼 수 있었던 은혜의 최적 장소임을, 각기 4개의 다른 종교 즉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 가톨릭의 첨예한 종교적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있는 예루살렘에서는 땅이 아닌 하늘에만 희망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는 지혜를 배웠고, 통곡의 벽에서는 총과 칼에 의한 배타적 독선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으로 다가서는 배타적 진리를 사수하고 있다는 점을, 비아 돌로로사 즉 예루살렘의 뒷골목인 바로 그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예수께 집중하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리들의 다양한 세속적 욕망들이 오늘의 현실에서 십자가를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오늘의 비아 돌로로사의 뒷골목이라는 데에 동의했고,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에서 벌어진 권력자들의 횡포로 인해 자행된 억울한 죽음의 잔치(헤롯에게 죽임 당한 두 살 이하의 어린이 학살)를 통해서는 그 희생을 요구한 장본인들의 욕망을 배우지 말아야 함은 물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전제로 이루어졌는가를 삼가 성찰하는 배움도 얻었다. “성지순례(聖地巡禮)는 어떤 의미에서 사지순례(死地巡禮)라 할 수 있습니다.(P.197)” 김 목사의 이 고백은 책의 압권이었다. 성지를 돌며 가장 많이 느낀 감동이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성지순례의 가장 큰 공부였음을 밝힌다. 헤롯이 암살의 위험을 피해 가장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세운 맛사다에서, 그리고 그곳에서 도리어 로마라는 개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의로운 죽음을 택하였던 엘리아살 벤 야이르가 이끈 반로마 유다 독립군들의 순국을 보면서, 이스르엘이라는 평원의 한 복판에 우뚝 솟아 있는 므깃도의 전쟁의 흔적들을 통해서, 장소와 공간은 다르지만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만든 페트라 요새를 보면서 또 그 것을 짓기 위해 죽어간 수많은 힘없는 민초들의 자국들을 보면서 솔로몬의 노래를 저자는 생각해 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12;1-2)” 책의 말미는 영원한 주님의 사랑을 녹록하게 다시 느낀 갈릴리 호수와 그 지경을 소개함으로 마무리된다. 잃어버린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게 되었던 베드로의 고향은 오늘 우리들이 주님의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마음에 있음을 알게 해주었음을 저자는 잔잔히 고백한다. 글을 읽으며 나도 네 마음의 고향 한 복판에서 주님의 첫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지를 서평자도 물었다. 그리고 주님께 재 다짐해 본다. ‘에고 아가포 세’ 라고 대답하기를 사족을 썼다. “잔잔하다. 그러나 맹렬함의 들끓음도 있다. 성지 순례를 하면서 ‘갑’의 위치에 있는 이스라엘을 항상 다윗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을’의 입장에 있는 팔레스타인은 사울의 입장으로 치부해 버리는 한국교회의 의도적인 해석을 당돌하게 뒤집어 업는 글쓰기에 감사했다. 아름답게 세워진 성지의 건물들 뒤로 보이는 그것을 짓기 위해 피 흘리며 죽어갔던 민초들의 아픔과 희생과 죽음에 대한 위로를 그리고 있어 대리만족의 행복이 밀려왔다. 더불어 깊은 영적인 성찰의 보너스까지 받게 되어. 그래서 김 목사의 성지 순례 후담들이 기쁘다. 다시 한 번 가고 싶은 그 곳을 다녀온 것 같아 행복했다. 처음 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2014년, 7월 10일 오후 4시 3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