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튤리안 차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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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두란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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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7-15 17:0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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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리안 차비진의 ‘Unfashionable the christian’를 읽고
금년 초, 김근주 교수가 쓴 ‘특강 예레미야’를 서평하면서 예레미야 시대의 교회와 예언자들의 무능, 그리고 미슈파트와 츠다카, 더불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정의되는 헤세드의 망각과 상실을 주도하고 있는 제도권 안에 있었던 종교 지도자 그룹의 타락을 지적하는 김 교수의 일갈에 동의하면서 한국교회가 제발 그의 권면대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이웃들을 위한 교회가 되기를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평자는 그의 신학적인 보폭 중에 한 가지는 생각과 사고와 신학의 다름으로 인해 공감과 동의가 아니라 비평했다. 그의 주장 중에 서평자가 반론했던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회봉사 혹은 구제라고 표현하는 일을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아니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착각일 뿐이다. 하나님은 백성에게 바른 길과 행위, 즉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삶을 요구하신다.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일은 부차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야훼를 섬기는 신앙의 본질이다.” 진보적인 성향의 신학자가 본 그의 이론을 액면 그대로 보면 아멘하게 되는 지적이지만 서평자처럼 현장에서 목회를 현장 목사에게는 그의 지적에 2% 부족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평자는 매일의 목회를 통해 뼈저리게 경험하는 것이 있다. 근래 들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회자되는 내용들 중에 언제부터인지 십자가의 피 흘리심보다 대사회적 목소리가 먼저가 되었다는 충격이다. 십분 이해한다. 김 교수의 지적이 박득훈 목사가 쓴 ‘돈에서 해방된 교회(포이에마)’에서 지적한 그대로 교회가 교묘한 맘몬 숭배를 인정하고 급기야 부축이기까지 한 한국교회의 뒤틀린 성장주의에 대한 반향이며 반성의 자세로 교회가 예레미야 시대의 축소판에서 벗어나 예언자적인 성찰과 올바른 공동체로 다시 회복해야한다는 차원에서의 경고성 메시지인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이런 바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현장 목회자가 현장에서 느끼는 더 큰 참담함이 있다. 동시에 신학자가 선포하는 일침과의 괴리감으로 인해 이중의 고통을 겪는 것이 사실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옳은 소리는 완연하고 분명한데 영적인 감동은 없어졌다. 가르침은 있는데 심장을 흔드는 감동이 그 비판적 목소리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목사인 나를 아프게 한다. 비평과 비판은 많은 데 영적인 진동이 없다. 소리는 많은데 눈물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차가움은 있는데 따뜻함은 보이지 않는다. 수평적인 회복을 통하여 수직적인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아우성은 있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무섭도록 진실한 수직적 회복을 통해서만 수평적인 회복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매일 현장에서 목회자는 이것과 투쟁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교회 밖의 공격 때문에 지치는 것이 아니라 포장된 사탄의 권세로 인해 자행되는 교회 안의 공격 때문에 더 좌절한다. 지난 주간 책을 구입하고 어제 완독한 책이 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외손자인 미국 플로리다에 위치한 코럴릿지 교회를 섬기는 튤리안 차비진이 쓴 ‘unfashionable the christian’을 읽었다. 읽으며 10년 먹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짜릿함을 경험했다. 전술한 현장 목회자가 체휼하는 아픔들을 위로받는 흥분과 전율함을 경험했다. 저자의 글을 통해 참 많은 도전을 받았지만 가장 통쾌한 것은 수평적 회복이 먼저가 아니라 수직적 회복이 먼저임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갈파하는 그의 선포 때문이었다. 작년 말, 그는 ‘JESUS AII’로 나를 격려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군더더기 없는 ‘예수로만 충분하다’ 는 감동을 주더니 이번에는 세상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정체성을 통해 서평자를 흥분시켰다. 그는 이렇게 서평자를 비롯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선포하며 책머리에서 대담한 질문을 던진다. “크리스천들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거의 세속화되어 있는 미국 사회에 그리고 미국 교회를 향하여 참 도전적인 질문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단순히 미국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재론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던진 문제제기이다. 그는 계속 갈파한다. “교회가 문화를 변화시키려는 건방을 떨지 말라. 누가 옳은가? 를 놓고 따지는 집안싸움을 멈추어라.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를 만들라.” 그가 이 정도의 격정으로 도전하는 이유가 있었다. 차비진은 책에서 그의 회심기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고백했는데 신선했다. 본인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외할아버지이기에 자연스럽게 교회 문화에서 자라 청소년 시절 교회에 대하여 반항을 하며 자랐다고 술회한다. 어느 날 그토록 바라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부모들이 자기들을 집에서 내 쫒아버린 사건을 덤덤히 고백한다. 그리고 교회가 아니 세상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자유와 해방을 맛보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게 자유하고 원했던 바로 그 세상, 그런데 그 세상은 자기가 꿈꾸며 선망했던 신기루와 같은 곳이 아니었고 도리어 외로움과 상실감만을 안겨 주었음을 책에서 술회한다. 그리고는 급기야 그 미칠 것 같은 상실감에 자기의 본향과도 타지의 어떤 교회에 나아가 무의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마침 그 날 그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엔카운터를 경험했다. 그는 그 때의 회심 고백의 감흥을 이렇게 말했다. 도전이고 충격이다. “믿었던 세상이 결국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이후 그는 주께로 돌아왔다. 회복된 그는 젊은이들이 그토록 차지하고 싶어 하는 세상, 더불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름만으로 살아가며 상당수 양다리를 걸쳐 놓고 끊지 않는 그 세상, 어떤 의미에서 그런 자들에게 더 많은 삶의 방점을 찍고 있는 그 세상을 향하여 차비진은 이렇게 포효한다. “세상이 나를 속였다고.” 주께로 돌아와 목사로 헌신하게 된 뒤 이 책에서 골리앗과 같은 세상을 향하여 감히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나를 채울 수는 없다. 유행을 따르지 말고 복음을 따르라. 세상은 보이는 것만 믿는다. 초월적인 것에 창문을 닫은 고로 결국은 곪아 터졌다.” 이런 세상을 따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를 역설한 그는 이렇게 공격적으로 갈파한다. “요즘 세대가 유행이 아니라 진리에 목말라 있다는 것을 아는가? 현대인들은 이 세상 너머의 시공간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그들은 세상과 다른 것,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분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무엇인지 아는가? 거꾸로 교회가 세상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세상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을 교회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서평자인 나 또한 동의한다. 교회는 교회만의 분명하고도 고집적인 색깔로 전진해야 하는데 세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문을 열라고 도리어 협박한다. 이렇게 함으로 인해 세상에 의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수치를 당하고 있는데도 꿈쩍하지 않다. 튤리안 차비진의 이 말은 현직 목사인 나를 전율하게 한다. “세상의 흐름에 발맞추라고 외치는 교회의 리더들과 그 허튼 소리에 지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문화의 최신을 따라가려고 하지 말라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궁극적인 열쇠는 지식이나 조직 구조의 최신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것과는 달리 21세기 교회로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조적 변화가 아니라 영적 변화이다. 현대 교회의 주된 문제점은 문화적으로 뒤쳐진 것에 있지 않고 신학적으로 본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데에 있다.” 그는 계속 도전한다. 커다란 공명이 되어 울려 퍼진다. “세상이 원하는 것은 세상을 따라가는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거스르는 교회이다. 오늘날 젊은이까지 포함하여 전통으로 회귀하기를 원하는 젊은 세대들은 모든 교회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교회에 신물이 나 있다.” 그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서평자를 뜨겁게 했다.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최대의 걸림돌은 육체적인 위험이 아니라 다름 아닌 세상적인 패턴이다.” 섬기는 교회 홈페이지에 교회를 소개하는 글에 이런 글을 실어놓았다. “세상이 살려달라는 교회가 되어야지 교회가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지금까지 달려온 한국교회의 뒤틀린 성장주의와 기복주의와 번영신학과 맘몬신앙을 무섭게 거부하는 것만이 앞으로 한국교회가 회복되는 조건임을 나는 인정하고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세상에게 문을 연다는 빌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제나 대 사회적인 봉사로 대치되는 것은 단호하게 반대한다. 튤리안 차비진이 말하는 ‘UNFASHIONABLE THE CHRISTIAN’ 은 세상에는 살되 세상에는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이리라. 그렇게 살고 싶다. “튤리안 차비진이 나를 위로한다. 영적으로 통쾌했다. 복음을 세상을 위해 양보하라고 요구되고 심지어 공격받는 이 시대, ‘다시 한 번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를 삶과 말과 글로 새길 것을 각인했다. 튤리안 차비진, 참 괜찮은 친구를 만났다. 2014, 7,14, 오후 8시 45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