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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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신앙과 지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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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07-22 22:0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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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기도 ‘내 영혼의 작은 흔들림’을 읽고 (신앙과 지성사, 2014년) 나, 지금 떨고 있니? 전미 대륙에서 복음적 지성으로 적지 않은 영적 영향을 미친 영성 신학자 달라스 윌라드는 ‘마음의 혁신’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진정한 영적 필요와 변화는 내면, 곧 삶의 숨은 부분에 있다.” 그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윌라드의 통찰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개인의 삶에 있어서 표면의 영역을 아무리 포장해도 그의 이면의 삶은 포장할 수 없기에 윌라드의 말은 적절하다. 이면의 삶, 즉 숨겨져 있는 부분의 진정한 변화가 없이는 그 사람의 영혼의 울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서평자는 수용한다. 그래서 그랬나? 윌라드의 이어지는 지침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부드럽고도 엄한 내적 변화의 과정은 우리 영혼과 주변 세계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시작되고 지속된다.” 목양의 현장에서 담임목회만 감당한 것으로 계산해 보니 만 26년이 되었다. 26년 전, 그래도 목회의 초창기에는 영혼이 참 깨끗하네! 어쩌면 저렇게 순결한 믿음이 있지! 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던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을 바라보면 오늘이 더 신선하고, 더 깨끗하고, 더 순결해야 하는데 사정은 정반대다. 종교가 문화가 되는 시점이 한 국가의 개인 소득 20,000불이 될 즈음이라는 종교 사회학자들의 인용을 되새겨 보면 나름 억지춘향의 위로는 되지만 그래도 못내 씁쓸하고 유감스럽다. 그 유감스러움은 영혼의 울림이 일어나지 않는 시대로의 진입 때문이다. 그럼에도 목양의 현장에 있는 사람의 치열한 싸움은 목회자 스스로는 물론, 함께 가는 동역자들에게 영혼의 떨림, 울림을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사람이 패배의식에서 나오는 시기심 때문에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며 그런 의식이 있는 자들의 뇌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참 궁금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존경했던 대형교회 목회자의 한 사람이었던 고 옥한흠 목사의 유고집에 나오는 글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돌았던 글이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바울처럼 떨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통해 마음껏 일하실 수 있도록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들부들 떨어야 합니다. 교만의 머리를 쳐들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신앙의 경력이 많다고, 말을 잘한다고 머리를 들지 맙시다. 성령의 역사는 약하고 두려워 떠는 자를 통해 일어납니다.” 기도 복사하기 지친 인생들의 뒤끝인 목회의 현장에서 사역한 지나온 세월들을 바라보면 숨이 차다. 치열한 영적 전쟁터인 목양터에서 울고 웃고 한 26년이라는 세월이 숨 가쁘게 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이 숨 가쁜 현장에서 의도적으로 더 많이 성찰하려고 하는 것은 나는 ‘부들부들 떨고 있느냐?’에 대한 정직한 답하기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현장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새벽 시간이다. 너저분하고 널브러져 있는 신세 한탄의 시간으로 새벽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가? 의 정직한 소통함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간이 바로 새벽 미명의 시간이다. 새벽에 주님과 만나는 기도의 현장은 그만큼 나에게는 알천 같은 시간이다. 26년 동안 목양의 현장에서 섬기는 교우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지나온 이야기를 하자면 왜 할 말이 없겠는가? 적어도 정상적인 목회를 한 사람이라면 밤을 새며 말할 수 있다고 목에 힘을 주지 않겠는가? 서평자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 중에 하나, 애교스럽게 말한다면 정말로 신기한 것 중에 하나가 있다. 거의 엇비슷하게 지난 26년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회중 대표기도’이다. 조금 우스갯소리로 표현한다면 26년 동안 장소, 사람, 시간의 다양성을 전제함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내용이 거의 대동소의하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기적이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 계시록으로 이어지는 성경 강해를 시작으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 믿게 해달라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 김일성부터 시작하여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삼대 세습을 회개하게 해달라는 기도, 예배 시작은 벌써 시작되어 예배의 중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처음 시간이오니 마치는 시간까지 함께 해달라는 기도, 성가대의 찬양이 은혜롭게 해달라는 기도, 담임목사님에게 말씀의 엘리사의 영감을 7배나 더하셔서 성령의 두루마기를 입혀달라는 기도, 그리고 이런 기도의 가장 비장한 압권인 대표기도는 기도가 설교로 둔갑하는 기도까지 정말로 미리 사전에 기도의 각본을 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대동소이하다. 아, 노파심으로 그런 기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지 않은 기도라고 폄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니 당사자들은 노하지 않으시기를. 이전 교회에서 시무할 때, 지금도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나는 일이지만 어느 한 주일 공 예배 대표기도 시간에는 순간 오죽했으면 잠시 졸았던 적도 있다. 설교 시간의 사분의 일 정도를 빼앗아 기도하는 중직 때문에. 이미 아시는 분, 공감하는 분들은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그런 기도를 하는 주체들은 교육의 차원을 넘어선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는 분들이다. 그러기에 예배 인도자인 목회자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의 하나 참든지, 자든지 이다. 기도가 왜 이 지경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대해 서평자의 순전한 객관적 잣대이니 생각이 다른 분들이나, 기분이 나빠진 분들은 공감하지 않아도 된다. 그 기도 대상자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도의 내공은 영성으로 표출되는 것이 분명하다. 엄격한 의미에서 기도는 외워서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배워서 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적인 삶의 엑기스요 영성적 삶의 농축된 절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도는 분명 삶이기에 상투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증거임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기도는 배워서 하는 것도 아니요 외워서 하는 것도 아니지만, 주님과의 인격적인 소통을 갖는 귀하고 귀한 기회인 기도의 내공을 위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는 열어 놓고 싶은 것이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대표기도 문집 같은 상술적이고 상투적인 기도문이 아니라 영적인 신앙의 거인들이 남긴 좋은 기도문을 많이 읽어보는 것이다. 많이 접하다보면 영적인 기도의 내공을 쌓는 데에 일조하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김영봉은 그래서 ‘사귐의 기도’에서 신앙의 귀한 족적들을 남긴 선배들의 기도문을 많이 읽어보라고 권하고 있는데 십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아마도 이런 깊은 영성을 전제로 기도한 선배들처럼 내공이 있는 그리고 영혼의 깊은 것을 만지며 드려진 기도문 중에서 서평자의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자극한 글을 뽑으라면 주저 없이 저자의 글을 소개하고 싶다. 이제부터 그 증명을 해 나아가 보자. 기도하면서 영혼이 흔들릴 수 있다면 기도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깊이 볼 수 있도록 길라잡이를 해주는 양서인 김기석의 ‘내 영혼의 작은 흔들림’은 저자가 CBS 방송을 통하여 1년 동안 함께 드린 공동의 기도를 엮은 기도집이다. 저자의 책 제목에서 눈에 띠는 단어가 있다. ‘흔들림’이다. 기존 교회에서 ‘흔들림’이라는 단어는 불온한 개념으로 여겨진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똑바로 하지 않았으면 흔들리지! 라고 타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흔들림은 그 반대이다. 하나님과 기도로 직시할 때 어찌 영혼의 떨림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를 마치 거세게 항변하는 태도이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 중에 개인적으로 시대의 아픔을 안고 영혼의 흔들림을 전한 예언자 중에 가장 가슴에 남는 예언자를 고르라면 서평자는 주저 없이 예레미야를 선택할 것 같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예레미야 20:9 개역개정판) 예언자에게 임했던 환경의 두려움, 상황의 녹록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는 흔들렸다. 그 두려움에서 피하고 싶었다. 마치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드렸던 기도의 과정 중에 흔들리셨던 것처럼 예언자 본인이 당했던 엄청난 고난이 어찌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임했다는 사실을 알았던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막 대드는 느낌으로 토로하는 이 고백의 기도를 통하여 예언자의 흔들리는 영성을 서평자는 엿 보게 된다. 묘한 것은 김기석 목사의 기도문을 읽으면서 또 이 예레미야의 흔들림을 보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가 제목을 ‘내 영혼의 작은 흔들림’ 이라고 이렇게 지었나 싶다. 억지춘향이 아니다. 김 목사는 책을 시작하는 글머리에서 이렇게 갈파한다. “유대인 신학자인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까닭은 현실의 가장자리에 살면서 그 중심에 닿는 길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했다.”(p,11) 기도는 내가 하나님과 이 땅에서 맞닿아 있다는 증거다. 내 삶의 언저리에 하나님께서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얹혀 있는 형국이 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내가 하나님과의 연계를 하고 있다는 아딧줄이 기도다. 이렇게 기도는 신앙의 정수와도 같은 것인데 왜 기도하는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했는지를 묻는다. 저자는 자문하고 자답한다. “기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는 수단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하고, 그 마음을 우리 속에 모셔 들이는 것이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삼아 조율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삶의 한계상황을 만날 때만 기도하지 엎드리지 않는다. 그는 생의 한 가운데에서 무릎을 꿇는다.”(p,12) 전적으로 동의한다. 반어법적인 기술을 썼지만 기도가 주군과의 관계 회복의 도구가 아니라 기도하는 자의 일방적인 욕망의 분출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기도의 변질이다. 아버지가 기대하는 기도와 전혀 상관없는 기도가 아닌 기도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마음이 있는 일탈된 신앙인들은 헨리 나우웬의 일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도란 평화를 미워하는 자들의 거처를 떠나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p,15) 기가 막힌 기도 해제이다.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기도자는 내 욕망의 분출로 기도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극도의 예의로 기도한다. 그래서 기도는 엎드림이다. 이제 영성으로 내공이 쌓여 있는 한 현직 목회자가 드린 기도를 함께 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 보자. 1월에 드린 기도
“망연한 눈길로 눈 덮인 야산을 바라보는데 ‘스알야숩’이라는 단어가 천둥처럼 들려왔습니다.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주님, 정녕 이 땅에 남은 자가 있습니까? 정말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렵니까? 다시 한 번 청합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와 죽은 생명을 되살리고 염전으로 변한 땅을 옥토로 바꾸셨던 그 생명의 강물이 이 땅 구석구석에 다시 흐르게 해 주십시오. 우리도 그 흐름을 타고 신명난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p,22) 예언자는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던 자다. 예언자 이사야는 쓰러진 조국의 회복을 얼마나 사모했으면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명명했겠는가?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서평자는 저자의 기도에 같은 공명으로 기도했다. 교회가 쓰러져가는 이 참담함의 시기에, 교회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으려는 귀를 닫은 이 시대에, 조금 더 도발해 표현한다면, 교회가 하는 말을 듣지 않는 정도의 시대가 아니라 교회가 사라져주기를 갈망하는 세속의 시대에, 맘몬과 섹스와 컴퓨토피아와 같은 나라를 추구하는 과학적 메커니즘이라는 골리앗과 맞서 싸울 남은 그루터기들이 이 땅에 남게 하옵소서! 라는 절규는 촌각을 다투는 기도이어야 한다. 저자의 말대로 파도는 하루에 70만 번씩 철썩이고, 종달새는 하루에 3,000번씩 우짖으며 자신을 지킨다는 시인의 노래를 들으며 오늘 내 기도의 신실함을 생각해 본다. “어찌해야 합니까? 마른 해골처럼 버성기는 우리들 가슴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십시오.”(p,26) 사랑이라는 생기를 잃어버려 숨을 헐떡이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루하흐’ 를 불어넣어주시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인식한 저자는 본인이 숨 가쁨을 토로한다. 이게 어찌 저자만의 읊조림인가? 여기저기에 좀비들이 몰려다닌다. 다시는 죽지 않는 좀비들이 평범하게 살아 있는 우리네의 삶을 폐허로 만든다. 있는 자들의 갑 질 좀비, 편력으로 상대적인 약함을 보이는 여성들을 짓밟는 성적 폭력의 좀비, 때와 상황과 분위기와 유/불리에 따라 얼마든지 칼날을 휘두를 수 있는 정규직이라는 이름의 좀비, 초록이동색이라고 각종 이권을 위해서는 정의와 공의는 은 삼십 잎도 안 되는 가치에 동네 고물상에 여지없이 팔아넘기고 일치단결하는 최고 권력 좀비들로 인해 오늘도 소리 없는 울음과 피눈물로 고층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는 이 땅의 ‘하비루’들이 마른 해골처럼 버성기고 있는 에스겔 골짜기 같은 이 땅에 하나님의 ‘루하흐’를 불어넣어주시기를 서평자도 읊조린다.
2월에 드린 기도
“주님, 이제는 정말로 시련과 고통이 다가와도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는 직립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삶이 힘들다고 힘겹다고 징징거리거나 작은 이익을 위해서 영혼을 파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버릴 것을 버릴 줄 아는 가벼움, 붙잡아야 할 것을 든든히 붙잡는 진중함으로 이 덧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게 해 주십시오.”(p,44) 며칠 전, 병원 신세를 졌다. 왼쪽 어깨가 무너지게 아파서 손바닥을 뒤집을 수도 없을 정도의 통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의사 왈 병명은 ‘석회석 견염’이란다. 진단을 받고 알았다. 서평자의 상체가 상당히 많이 굽어져 있다는 사실을. 어깨에 있는 돌덩이 제거도 시급한 문제이지만 굽은 상체를 다시 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진단을 받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심정으로. 직립으로 산다는 것이 어찌 외과적 판단의 의이겠는가? 직립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는 선언이다. 저자는 직립적 인간으로 살기 위해 버릴 것을 버릴 줄 아는 가벼움과 붙잡아야 하는 것은 든든히 붙잡을 수 있는 진중함을 달라고 기도했다. 너무 중요한 기도이다. 여성학자인 정희진의 강의노트를 보았다. 그녀는 한 인문학 강좌에서 기막힌 통찰을 내놓았다.
“영어에 ‘insight’라는 단어가 있죠? 통찰은 보지 않은 상태에서 가능하다는 의미죠? 자기가 아는 것을 버릴 때, 그 때 새로운 것이 들어오죠. 그러니까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면 무식이 오래갈 수밖에 없어요.” 서평자는 이 여성학자의 이 말을 읽다가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고루한 고집, 이기적 앎, 다른 이를 짓누르기 위한 섣부른 지식,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배불리는 내 욕망의 자아를 많이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직립 인간으로 설 수 없다는 반항적 교훈(?)을. “하나님, 며칠 전 분주한 일상에 짓눌린 채로 살다가 문득 하늘을 외롭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 보았습니다. (중략) 주님은 상속자를 주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미더워하지 않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쳐다보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고단한 일상에만 몰두하고 있는 우리의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주님의 눈으로 삶과 역사를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p,48) ‘하늘을 쳐다보라’ 정말로 가슴이 찡했다. 이렇게 산지가 얼마나 되었나를 뒤돌아보았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를 자세히 살피면 노아가 땅위를 볼 수 없었음이 확실하다. 새들을 밖으로 내보낸 일이 그것을 증명한다. 방주는 유람선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남은 백성을 구원할 상자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붕에 미닫이 천장 식 창문이 있을 뿐이었다.(창세기 6:16) 노아가 방주에 있었던 1년 여 동안 지옥 같았던 방주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을 볼 수 있는 창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은 고루하거나 진부하지 않은 희망의 해석으로 서평자는 받는다. 하늘을 보는 그리스도인, 주님이 주인이신 역사에서 비틀거리지 않을 것임을 재확인해 본다.
3월에 드린 기도 “알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은 스스로 비어있지 않으면 어떤 새로운 것도 피워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혈과 육에 속한 생각들을 자꾸만 덜어내고 우리가 알게 모르게 세워놓은 장벽들을 무너뜨려 마침내 영혼의 봄을 맞이하게 해 주십시오.”(p,55) 빈 마음으로의 전이는 도를 추구하는 자들의 공통점이리라!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데 자꾸만 욕망의 그릇이 채워지는 삶이라면 그는 분명 병들어 있는 증거이다. 따라가야 할 주군은 우리에게 비우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군은 자신을 죽이기까지 자신을 비웠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채움의 종교라기보다는 비움의 종교이다. 내가 나를 쳐 복종한다는 바울 사도의 변은 자기에게 날마다 임하는 육신의 법을 제어하여 자기를 비우는 몸부림을 말하는 화법이다. 작 년에 전 국립 수목원장을 역임한 신준환 박사의 글에서 귀한 내용을 보았다. “살아 있는 것 중에 아프지 않은 것은 없다. 나무는 늘 아프다. 늘 아파서 향기를 낸다. 인간이 좋아하는 피톤치드라는 것은 ‘식물을 죽인다.’는 뜻을 갖고 있는 물질이지만 나무는 남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아파서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 물질을 낸다. 사람이 편한 자리를 만들어 키운 인삼의 치유 물질이 산삼의 치유물질보다 못하듯이 나무도 편한 자리에서 아픔을 없애주며 키우면 피톤치드가 적어진다. 자신이 아파서 내는 향기, 우리는 그 향기를 마시고 낫는다. 향기로움 뒤엔 그 향기가 진한 만큼의 아픔이 숨어 있는 것이다.” 오늘의 감각으로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아픔을 전제하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금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는 시대에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그만큼 아프고 쓰린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아픔을 전제한 희생이나 나눔은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치유의 시너지를 발생시킨다. 저자가 말한 대로 혈과 육의 속한 생각을 자꾸만 비워내는 삶을 살게 될 때, 나 또한 영적인 피톤치드를 발생해 내는 향기로운 그리스도인으로 서지 않을까 싶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무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천박해져 있는 부끄러움이 있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꽃피우는 것이라는 데 아무리 살펴도 우리 속에 그 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아직 봄이 아닙니다. 주님, 여전히 덧없는 욕망의 거리에서 바장이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p,64) 교회 정원에 3년 전, 심어 놓은 장미가 금년에 제법 자태를 뽐내며 피었다. 첫 해, 장미가 피었을 때 제 구실 할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저었던 것이 기우가 되어 행복했다. 장미의 교태에 반하여 정원 테두리를 경계하기 위해 朱木(주목)을 작년에 移木(이목)했는데 무슨 일인지 옮겨 심을 때 아팠는지 누렇게 고사해서 눈물을 머금고 뿌리를 뽑았다. 누렇게 죽어 있는 주목의 뿌리를 뽑고 나서 잠시 동안 이런 생각에 젖어보았다. 나무도, 꽃도 피어 있을 때 아름답다. 하물며 믿음의 사람들이야 재론할 필요가 있을까를 말이다. 저자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꽃피우는 것이라고. 참 적절한 표현이다. 내 안에 피어 있는 것으로 나는 향기는 나의 정체성이기도 하고, 나의 지금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저자가 피력한 대로 나 또한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그리고 바장이는 욕망으로 인해 썩은 냄새가 진동하지 않기를 바동거리고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해서 저자의 기도가 남달리 다가온다. 4월에 드린 기도
“풍요와 편리함에 중독된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자기 삶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가 먼저 돌이켜 생명 살림의 길을 걸어가게 해 주십시오.”(p,76) 정부의 각료들이 임명될 때, 청문회에서 드러난 그들의 면면은 머리 좋은 양상군자들이라는 공통점이 보인다는 점이다. 가지고 있는 권력이나 기득권의 정보, 그리고 이미 획득하고 있는 물질의 힘으로 또 다른 이권을 차지하는 데 국가대표 급의 실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 혀를 내두르게 된다. 내놓으라는 대학에서 최고의 학문을 섭렵한 그들이기에 인맥과 학맥 그리고 초록이동색인 그룹들 간의 환상적인 연대를 통하여 천박한 자본주의의 구멍 뚫린 영역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권 차지를 그럴듯한 합법의 명문으로 성취하는 데 이미 이력이 난 사람들인데 바로 그들이 이 나라의 핵심 권부를 차지하고 있으니 유구무언이다. 어쩌다 그 욕심의 도가 너무 넘쳐서 정죄의 과녁이 되면 그건 정말 재수 없는 걸림으로 치부되는 것이 현실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런 공식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잿빛 전망이다. 어떤 한 사건이 터지면 그때서야 그 분야의 불합리를 성토하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흉내를 내는 것을 보면 촌극도 그런 촌극이 없다. 이런 난장을 치유할 수 있는 공동체는 아무리 보아도 교회인데 교회는 오히려 예언자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고, 이제는 교회가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세태이니 전망을 더욱 비관적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이렇게 절규한다.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가 먼저 돌이켜 생명 살림의 길을 걸어가게 해 주십시오.” 기도는 가능하겠지만 서평자는 왠지 저자의 기도가 고독해 보인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대도시에서 도시 빈민 사역을 평생 감당해 온 친구가 서평자에게 이런 글을 보낸 적이 있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구상한 미래가 오히려 빤한 세상을 보며, 야만인으로 등장한 ‘존’의 환멸(반문명의 세계에서 초대되어 완전하게 설계된 문명과 행복의 신세계를 목격하지만 결국 조작과 통제에 동화될 수없는)을 공감하기에, 이제 오늘의 현실 그 하늘이 두렵기조차 하네. 어쩌면 마지막까지 연인이어야 할 하늘마저도 우리의 욕망과 탐욕으로 채색되어버렸음을 보기에.” 친구의 말대로 하늘마저도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이용하는 기막힌 세대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 있기에 그런데 그 한 복판에 하늘을 회색화 시킨 장본인들이 바로 나 같은 목사들이 너무 많기에 교회가 저자의 말대로 생명 살림의 길로 걸어갈 수 있는 자정능력이 있을까? 에 대하여 별로 자신감이 없는 것은 나만의 탄식일까? 아, 물론 오해는 하시지 말기를. 난 헉슬리처럼 불가지론 옹호자는 아니니까. 다만 그의 내공이 담겨 있는 쓴 소리는 들어야 하는 메시지로 수용해 보았다. 4대강을 최고의 치적으로 삼는 개신교 장로의 수준이 기독교의 주류적인 수준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나 또한 기도해 본다. “주님 지금도 얼마나 쓸쓸하십니까? 주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오늘의 교회 때문에, 고난은 한사코 거부하면서 영광만 구하는 성도들 때문에 말입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p,79) 저자는 주님을 쓸쓸하게 만든 주범을 성도로 일반화하고 있지만, 서평자는 객관화시키고 싶다. 주님을 철저하게 외롭게 한 주범은 이. 시대에 한 교회를 맡아 사역하고 있는 서평자이다. 목사로 부름 받아 건강한 주님의 몸을 일구어 가는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개인의 목회 성공에 급급하여 눈이 멀어 있었던 자가 바로 이 놈이다. 누군가가 말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고난은 변장하고 온 축복이라고. 그의 지론이 옳든 그렇지 않든 서평자는 고난을 부담스러워했던 것이 사실이다. 가능한 고난은 멀리하고 안전함과 편안함에 매몰되어 사역해 온 참 볼품없는 목사로 지난한 세월을 살아온 무익한 종이다. 상투적인 회심이나 뉘우침의 고백이 아니라 진정성이 있는 고백이다. 그래서 그런지 주님을 쓸쓸하게 한 주범이라는 수치스러운 명칭은 내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에서의 돌이킴 때문에 이런 볼품없는 서평을 쓰면서 자위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의 기도문 중에 4월에 드린 이 기도의 글은 서평자를 산산조각내고 있다. 5월에 드린 기도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던 시인의 일갈처럼 욕망의 몽롱한 도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을 꾸짖어 주십시오. 풍요의 단꿈에 젖어 살다보니 우리는 영적인 청맹과니가 되고 말았습니다.”(p,91) 서평을 쓰는 지금, 텔레비전에서 온통 한 인기 연예인의 자살 소식이 도배를 했다. 유명 연예인이었고, 한 때는 너무 잘 나가던 배우였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더 한 듯했다. 그가 마약에 손을 대었을 때 심하게 비난하던 사람들조차도 그의 자살 소식에는 나름 절제하는 분위기인 것을 보면,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악플러조차들도 지켜주는 모양새이다. 자살을 한 당사자는 자살 전날, 만취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심각한 우울증세를 보였다고 했다. 해프닝으로 몰고 가는 느낌이 있어 그 진정성은 의심되지만 아내하고도 썩 부부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고인의 발인을 공영방송, 종편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대한민국의 내놓으라는 공영방송의 브라운관을 통해 비쳐진 고인의 神位(신위)는 집사 고 아무개였다. 서평자가 한 개인의 아픔을 다시 들추어내는 이유는 망자에 대한 무례를 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고 있는 한국교회의 도그마를 망자에게 재확인시키는 그런 교리적 쓸어 담기를 위해서도 아니다. 서평자가 울고 싶은 것은 한국교회의 무기력함이다. 집사인 그가 왜 마약에 손을 대었는가? 왜 집사인 그는 자신의 신세한탄을 만취함으로 풀 수밖에 없었는가? 집사인 그는 왜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혹시 무기력한 교회 때문은 아니었을까? 교회가 본인의 좌절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보루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작금, 교회의 자화상을 보면서 본인의 갈등을 해결해 줄 신뢰할 만한 공동체로 믿기는커녕 한 때 한 여배우에 의해 회자되었던 ‘너나 잘 하세요.’의 조소거리로 그가 생각한 것은 아닐까? 서평자는 교회의 무기력이 망자의 신위에 쓰인 글을 보면 스쳐지나갔다. 너무 심한 왜곡이라고 공격하는 독자들이 있으리라. 조금 점잖게 너무 앞서 나간 과장이라고 평가절하 할 독자도 있으리라. 그래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서평자가 평가한 이유는 한국교회가 너무 풍요라는 껍데기로 표면을 무장한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다. 본이 말로 전도된 가치의 공동체는 존재이유가 없다. 서평자는 굵직굵직한 사회적 물의의 사건들이 일어날 때 어김없이 그 한 복판에 예수쟁이들이 서 있는 섬뜩함에 심장이 뛴다. 서평자의 이 마음을 저자가 이해했는지 위로의 기도로 5월을 마감한다. “진액이 말라버린 달팽이처럼 우리는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앞으로만 달려가는 발걸음을 멈추고 마땅히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시오.”(p,97) 서평자도 저자의 말을 맞추어 기도해 본다. “주여, 내가 생명처럼 사랑하는 한국교회에 생기를 다시 불어 넣어주소서. 길을 잃은 많은 사람들에게 갈 길을 일러주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가 알찬 교회되게 하소서” 6월에 드린 기도 “집어등 불빛을 보고 몰려드는 오징어 떼처럼 우리는 세상의 유혹에 속절없이 끌려갑니다. 이제는 그 인공의 불빛이 아니라 하나님이 숨겨두신 그 은은한 참 빛을 따라가게 하옵소서.”(p,110) 저자는 이 기도의 부제를 ‘방황’이라고 정했다. 마치 오늘의 현대인들이 불꽃을 향하여 자기들의 몸을 던지는 부나비처럼, 또는 집어등 불빛을 보고 몰려드는 오징어 떼처럼 결과가 너무나도 비극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더 자극적인 것에, 더 찰나적인 것에, 더 쾌락적인 것에 붙들려 방황하고 있는 세태를 빗댐이다. 육체의 탐닉을 위해 사는 삶을 천박함이라고 정의해도 크게 엇나가지 않는 정의라고 본다. 세상의 유혹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모습이 그렇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천박성은 영혼을 가볍게 여기는 삶이다. “여자가 조르바에게 물었다. “보쇼, 형제, 영혼이 있수?” 조르바가 걸음을 멈추었다. “있지.” 그가 엄숙하게 대답했다. “그럼, 5드라크마만 줘요.” 조르바가 주머니를 뒤져 낡은 가죽 지갑을 꺼냈다. “여기 5드라크마 있어.” 그 때까지 시무룩해 있던 입술에 그제야 웃음이 번졌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한 마디를 했다. “두목, 이 동네는 물건 값이 참 싼 모양이군요. 영혼의 값이 겨우 5드라크마라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이 대목을 읽다가 미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오늘 내가 사는 시대에 영혼의 값은 얼마일까? 본 서평서의 저자는 자신의 책인 ‘오래된 새 길’ 에서 가장 질 나쁜 도둑질은 ‘사람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갈파했는데, 사람 도둑질이란 영혼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죄가 아닐까 싶어 니코스의 이야기를 담았다. 우리들의 영혼이 부나비나 오징어 떼와 같아서야 되겠는가? 영혼의 값은 얼마일까? 언젠가 해외토픽에서 본 레오나드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경매 값이 공개되었다. 떠들썩했다. ‘값을 매길 수 없음.’ 고집했으면 좋겠다. 영혼의 값이 얼마? ‘PRICELESSNESS’라고. 7-12월까지의 서평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서평의 내용이 이미 상당 부분을 차지하여 소개하지 못해 유감이지만 반면 숙제를 내주는 마음이 있어 위로가 된다. 약속한다. 독자들에게. 저자의 나머지 기도문도 놓치지 말고 섭렵해 보시라. 아마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촌철살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놓치기에는 너무 아쉽고 아깝기에 책을 덮으며 이렇게 책 뒷면에 여운을 남겼다.
“동 시대에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선배가 있어 감사하다. 배울 수 있는 선배, 내가 아프고 고프며 털어 놓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선배 목사가 있어 너무 감사하다. 헤프지만 않다면 투정을 부려도 마음을 받아 줄 것만 같은 믿음의 동역자가 있어 행복하다. 선배의 기도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나도 중보 한다. 2014년 7월 21일 22:41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