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차준희 |
---|
ㆍ출판사 | 새물결 플러스 |
---|
ㆍ작성일 | 2014-09-01 11:30:08 |
---|
차준희 박사의 “열 두 예언자의 영성을 읽고” 서평 Ⅱ 5년 전에 동기 목사 9가정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교인들을 인솔한 것이 아니라 동기 목사들이 신학교 입학 이후 약 30여년 만에 뜻 깊은 여행을 하며 우정을 나누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첫 번째 여정으로 도착한 곳이 바로 고대 이집트의 수도였던 룩소였다. 룩소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감흥이 있었다. 예언서 나훔에 나오는 노-아몬(오늘의 룩소)의 흔적들이었다. 앗수르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앗술바니팔이 이집트의 수도였던 노-아몬을 약탈했을 때의 상황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얼마나 희희낙락하며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이 아름다운 도시를 농락하며 즐거워했을까? 의 회상들을 하셉수트의 장제전을 보면서 혹은 오벨리스크를 보면서 이상하게도 그런 상상을 해 본 기억이 있다. 예언자 나훔은 앗수르에 의해서 유린된 조국을 보면서 그 나라 역시 노-아몬을 약탈하던 것과 똑같이 니느웨가 그런 비극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무려 40 여년 전에 선포했다. 나훔의 예언대로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난공불락의 니느웨는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에 의해 쓰러진다. 주전 612년의 일이다. 나훔의 메시지는 바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행복한 뉴스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주된 줄기인 주전 612년의 사건을 조명하면서 예언자가 말한 하나님의 속성을 열거한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보복하시는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분의 권능은 강력한 앗수르를 무너뜨릴 수 있는 권능을 갖고 계신 하나님으로 공개한다. 이런 하나님은 경우에 따라 해석하는 해석자에 의해서 각양의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삶의 정황 (Sitz im Leben)에 따라 그 하나님에 대한 해석 방법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허나 저자는 분명한 어조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그의 특유의 표현으로 직설함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논란의 여지에서 그 논란을 종결시킨다. 바로 ‘창조의 하나님’ 으로의 귀결이다. 그러므로 역사와 사건은 창조의 하나님이신 그 분에 의해서 통치되고 진행된다는 나훔서 해석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대명제를 선포한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하나님의 이런 속성에 대한 진지하고도 신뢰할 만한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버튼을 누를 존재는 하나님 당신임을 분명히 한다. 저자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에두르기는 했지만 심판의 절대 주권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를 천명한 셈이다. 이 부분을 감히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동의하지만 부연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서평자는 작년 하반기 섬기는 교회의 특별새별기도회의 텍스트를 나훔으로 정하여 사역한 적이 있었다. 현장 사역에서 나훔은 거의 잊혀진 성서 텍스트이다. 그러기에 이 텍스트를 가지고 한 주간 사역을 하기 위해서 열심이 특심했어야 했다. 당시 서평자는 6일 동안의 6번의 설교를 가지고 나훔을 커버할 수가 없어서 주일 1번의 설교를 포함하여 7편의 설교를 작성하여 교우들과 함께 나훔서를 이 잡듯이 연구하며 은혜를 나누었다. 불과 1년 안팎이어서 기억도 생생하다. 저자가 말한 대로 나훔 메시지가 심판의 전적인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메시지처럼 서평자도 총 주제를 ‘하나님 편에 서라’로 정했던 것은 저자의 일침과 거의 일맥상통한다. 해서 하나님은 역사의 주님이시기에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한 심판이 더딘 것 같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시기에 그 편에 서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자고 역설했다. 이 역설은 주전 612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어느 목사님께 들은 조크가 생각난다. 성이 하씨인 목사님이 아들을 얻었다. 그래서 이름을 ‘나님’이라고 지었단다. 불경스러운가? 아들의 이름이 하나님이면. 너무 불경스러우면 이름 하나를 더 생각해 보라. ‘박국’ 은 어떤가? 역시 이 또한 생소한 이유는 하박국 역시 그렇게 많이 목회자나 성도에게 익숙한 성경 텍스트가 아니라는 간접적인 증거이리라. 하박국 하면 생각나는 구절은 하바국 2:4절이나 하박국 3:2절 정도이지 않은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혹은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정도의 말씀 말이다. 전자는 나름 문자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을 교회에서 수용하기에 그리 거북하지 않지만 후자는 바벨론의 멸망을 간절히 기다리는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용감하게 이 구절을 교회의 1년 슬로건으로 거침없이 사용하는 것은 조금은 거북하고 과유불급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박국에서 독자들이 받아야 하는 교훈은 저자가 언급한 대로 정말로 중요하다. 실로 너무 빠른 것을 하나님으로 신봉하는 이 시대에는 더 더욱. 하박국은 자신의 이성으로 유다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을 들지 않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짐승 같은 바벨론을 들어 당신의 백성을 심판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하나님께 항거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드는 것과 같은 종용의 기도를 한 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망루에 올라가 주목한다. 이 과정은 하박국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불의에 대항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다. 2장 초반부까지 하박국의 의지는 일사각오처럼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께 떼를 쓴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박국의 일련의 떼씀을 선하게 보셨다는 점이다. 해서 하나님은 하박국에 의미 있는 응답을 주신다. 그 응답이 바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메시지였다. 저자는 책에서 이 대목을 ‘하나님의 격려’ 라는 제목으로 정리해 놓았다. 하나님이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신 ‘믿음’ 즉 ‘에무나’를 저자는 faithfulness 즉 신실함/성실함으로 해석했다. 재해석한다면 믿음으로 사는 의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신실함을 실천하는 존재로 정의한 것이다. 이런 접근을 통해 저자는 하박국이 처음에는 바벨론을 들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못마땅하게 여겨 하나님을 비토 하는 정도로 대들었지만 그의 결론은 그 유명한 3장의 하박국 감사로 예언을 마감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저자는 하박국을 격려하신 하나님의 입장을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접목시킨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피할 것과 취할 것이 있다는 방식으로 말이다. 피할 것은 교만이요 취할 것은 기다림과 인내이다. 교만은 바벨론식 방식이요 기다림과 인내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속도가 빠른 시대, 그래서 모든 것을 빠르게 하는 식이 통하는 오늘, 기다림과 인내는 더 더욱 절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덕목이 아닌가 싶다. 서평자는 하박국 강해를 약 20년 전 단독 목회를 시작한 섬기던 교회의 특별새벽기도회에서 텍스트로 잡아 사역했던 기억이 있다. 20년 전, 사역이 서툴고 어줍지 않았던 그 시절, 그래서 본문 해석이 많이 오류가 있었던 그 시절, 섬기던 교회의 지체들이 인내하며 담임목사가 조금 더 나은 목사가 되기를 기다려 하박국 강해를 아름답게 따라와 준 교우들이었음을 아이러니하게도 저자의 책을 읽으며 다시금 깨달으니 참 못난 목사임에 틀림이 없다. 스바냐는 진해성결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역시 특별새벽기도회 텍스트로 삼아 교우들과 씨름하며 은혜를 나누었던 잊을 수 없는 텍스트이다. 잊을 수 없다고 추억한 것은 이유가 있다. 당시 스바냐서를 통하여 특새 사역을 하고 있는 주간, 마침 난소암으로 사경을 헤매던 젊은 집사님이 있었다. 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살아온 지체였는데 난소암을 너무 늦게 발견했다. 정말로 많은 기도와 중보가 있었는데 결국 하나님은 그녀를 부르셨다. 병원에서 임종을 앞둔 그날 스바냐 3장을 공부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이제 막 하나님 나라의 입성을 앞두고 있는 지체 앞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인하여 제대로 앞으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목사가 울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지체에게 읽어준 말씀이 스바냐 3:16-17 그리고 이사야 49:15-16절이었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6-17)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15-16) 그는 서평자는 지체의 손을 붙들고 이름을 새겨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집사님 결코 손을 늘어뜨리지 마세요. 집사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졌다고.” 그 말씀을 듣고 지체는 숨을 거두었다. 스바냐는 그래서 서평자에게는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 하나이다. 전술했듯이 서평자는 그 지체가 실천적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다. 저자는 스바냐에서 실천적 무신론자들을 맹공 한다. 등불을 들고 교회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을 샅샅이 찾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이 숨을 곳은 없다고 단정한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한참이었던 시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나안의 바알과 앗수르의 일월성신, 그리고 암몬의 밀감을 포기하지 않고 사수하던 변질된 예루살렘 백성들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하이칼라 그룹들이었다. 방백, 왕자들이었고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라고 정의한다. 저자는 또 다른 그룹을 소개하는데 블레셋의 우상 신앙에서 보는 문지방에 신이 있다고 믿어 문턱을 뛰어넘는 자들과 포악과 거짓을 자기 집에 채운 자들이다. 이런 실천적 무신론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을 예언한다. 저자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현대적인 해석감각이 스바냐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스바냐가 말한 하나님의 심판의 서곡과 울음소리가 당시 최고의 상업지구로 보이는 어문과 제 2구역과 막데스 지역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표현했는데 저자는 그 지역을 ‘예루살렘의 월스트리트’라고 정의하는 위트를 발휘한다. 그곳은 맘몬이즘의 소굴이다. 맘몬 신에 휘둘리는 자들부터 시작되는 야웨의 날의 심판을 저자는 선언한다. 또 하나 예루살렘의 실천적 무신론자들을 가라앉은 포도주의 찌꺼기 같은 존재라고 고발한다. 자신의 이익과 안락함에 안주해서 전혀 변화되려고 하지 않는 정체된 자들, 낮과 밤에 신앙의 모습이 이율배반적인 사람들, 이들은 스바냐가 정의한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다.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삶에서 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 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향해 있다. 왜 그런가? 스바냐의 하나님께서 등불을 켜서 그들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스바냐를 해석한 저자는 마지막으로 신약의 메신저로 돌변하여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 열매를 보고서 그 나무의 열매를 알리라” 저자의 음성이 들리는가? 등불을 들고 교회 안에 실천적 무신론자들을 찾고 계신다는 간절한 호소가. 학개서는 다른 11명의 소 예언자들과 확연히 다른 신학적 사고를 지녔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학 말이다. 내 삶의 황폐함의 근본적인 원인을 성전의 재건을 방치했기 때문이라고 독설한다. 듣기에 따라 오늘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교회 건축을 앞두고 있는 목회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황금율과 같은 말씀이 학개서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목회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왜 그런가? 저자는 책에서 소위 명명된 스룹바벨 제 2성전을 짓다가 중단한 포로귀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직무유기를 보이는 성전의 재건보다는 내 심령의 성전이 영적으로 재건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향한 각성의 메시지로 더 많이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저자 역시 제 2성전 재건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학개서의 신학적 교훈을 심령의 성전 재건에 더 많은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서 저자는 학개 1:8절의 주제절을 영해하면서 두 가지의 핵심적인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 늘 기억하자고. 내 심령의 성전이 놓인 상태와 수준이 내 삶의 상태와 수준과 직결된다고. 둘째, 우리들의 우선순위는 우리의 욕심에 근거한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맞추어져 있는 그 어떤 것임을. 이것을 민감하게 알려면 영적으로 민감성을 갖고 나의 개인적인 행위를 살펴야함을 직설한다. 그 행위를 살펴 내 삶의 상태가 ‘하레브’(황폐)하면 나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든지 ‘호레브’(한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직시할 것을 교훈한다. 저자의 학개서 마무리인 에필로그성 멘트가 가슴에 남는다. “광인은 예수 때문에 미치고(狂人) 예수 때문에 빛난다.(光人) 스가랴는 학개와 더불어 중단된 제 2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예언자임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다만 학개가 성전 재건의 실제적인 실천에 대한 예언의 목소리를 대변했다면 스가랴는 성전 재건축과 합당한 예배의 복구가 바로 시온의 구원과 회복이 되는 방정식임을 선포하는데 역점을 둔 예언자이다. 특별히 스가랴의 메시지 중에 주목할 것은 시온을 회복시킬 메시야의 도래라는 대목이다. 저자는 이 영역에서 도래할 메시야를 아주 두드러진 특징으로 제시한다. ‘무능한 메시야’이다. 스가랴 9:9절의 예언을 통하여 오시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메시야는 무능한 메시야임을 저자는 분명히 한다. 이 메시야는 홀로 승리하지 못했다. 전적인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할 메시야이다. 이 메시야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권능의 메시야로 입성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무능한 메시야로 입성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엄격하게 말하면 이 메시야는 승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기 위해 입성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해석임을 저자는 전한다. 이렇게 무능한 메시야의 입성을 세속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 불가능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기막힌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 기막힌 패러독스가 있다. 스가랴는 그 무능한 나귀를 탄 메시야를 통해 위대한 일이 진행될 것을 선포한다. “武力을 無力化시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 무능한 메시야를 통해 전쟁에서 사용되는 모든 병거를 무력화시킴으로 평화를 이루실 것임을 천명한다. 예언자 스가랴의 예언을 예수님을 통하여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그 분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구약학자로서 스가랴의 예언을 신학화 하는 데 성공했다. 저자의 신학적인 언어술을 소개한다. “武力은 武力으로 無力化되지 않는다. 武力은 無力으로 無力化 될 수 있다.” 이렇게 스가랴의 예언을 신학화한 저자는 계속하여 그의 도전적인 교훈을 발사한다. “악의 세력을 향한 비폭력 저항은 적에게 도덕적 타격을 가하여 사기를 약화시키고 양심을 자극하여 상대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기이다. 칼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칼을 내려놓음으로서 평화가 시작된다. 교회가 검을 신뢰하면 십자가를 잃게 된다. 교회가 십자군을 구축하면 십자가는 사라진다. 예수의 제자가 힘을 의지할 때 예수는 사라진다.” 저자의 이 선언은 사자후이다. 나는 한국교회가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더 이상 망가지지 않으려면 방송사에 가서 데모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정치와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더 이상 추한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박근혜 대통령 당선 축하 감사 예배와 같은 것들을 다시는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지 않으려면 세속적인 힘을 버려야한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나는 개인적으로 말라기서를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십일조 설교를 정책적으로 이용하는 유혹이 목사로서 이 책을 통해서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말라기서를 파헤친다. 그리고 나이브하게 돌직구를 날린다. 말리기 시대의 질 나쁜 죄악 중에 하나가 십일조를 도둑질한 자들에 분명한 경고성 예언임을 말한다. 저자는 신학자답게 십일조를 분명하게 신학화 하는 작업을 펼친다. ① 말라기 시대 십일조를 도둑질한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전체임을. ② 이 도둑질을 한 온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십일조의 회복 전에 있어야하는 삶의 돌이킴임을. ③ 온 백성의 십일조 도둑질에 대한 전인적인 회개가 이루어진 뒤 십일조가 드려지면 그 십일조의 정신이 공동체 안에서 회복되어야 함을. (십일조의 활용의 진정성 회복) ④ 십일조의 회복은 온전한 십일조의 회복임을 (십일조 분량의 회복) 저자의 이러한 십일조 신학의 정립은 오늘의 교회에서 되새김질을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특히 교회가 도외시하여 온 약자들을 위해 감당해야 하는 십일조 정신의 온전한 실천과 성도들이 십일조를 물질적인 축복의 통로로 삼았던 정도의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재물에 노예가 되지 않고 지배하며 살겠다는 결단과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나눔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십일조 정신이라고 역설한 저자의 강력한 외침에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응답하기를 서평자도 기대해 본다. 서평자는 목양의 현장에서 25년을 사역했다. 사역의 기간을 되돌리면서 차준희 교수가 쓴 ‘12 예언자의 영성’ 이라는 소 예언서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담론들을 읽으면서 지난 25년 동안 부족한 사람 역시 소 예언서를 특히 사랑했다고 나름 자부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도 자랑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지난 25년의 세월동안 특히 섬기는 교회에서 한 주간의 특별새벽기도회라는 테마를 이용해 소 예언서를 교우들과 함께 나누려고 노력했다. 이제 11권의 소 예언서 사랑을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미가서를 지금 섬기는 교회에서 나누기 시작했다. 서평을 통해 술회했지만 12 소 예언서는 거의 잊혀진 책과도 같다. 접근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동역자들이 많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씨름하기 싫어하는 의도 때문일지 모른다. 노파심으로 읽기 어려운 예언서에 대한 자료의 빈곤함도 한몫을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여타 다른 책과 비교하여. 이런 볼 멘 소리가 있는 차제에 차준희 교수의 본 책은 비온 뒤에 뜬 무지개 같은 책이다. 서평자는 저자와 신학교 동기이다. 같이 동문수학을 한 동기이다. 아무리 못난 목사라도 자존심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더군다나 동기에게는. 그러나 구약을 연구하는 어간, 서평자는 내 힘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도착하면 자존심을 내려놓는다. 여지없이 차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학문적인 구걸(?)을 한다. 대학 시절, 친구보다 덜 열심히 공부한 벌을 달게 받는다. 착한 친구는 마다하지 않고 난제를 풀어준다. 나는 이렇게 나를 가르쳐 주는 동기가 있어 행복하다. 이번에 이 친구가 서평자만을 위한 책 발간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양서를 발간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모쪼록 ‘열 두 예언자의 영성’을 통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소 예언서와 가까워지는 은혜가 공유되기를 기대한다. 제천 촌에서 어줍게 목회하는 세인지기 이강덕 목사 졸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