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당신은 어느 때에 가장 고독하다고 생각이 되나요? 그럴 때 고독을 이기는 나만의 노하우 공개하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너 시험을 당해 (찬송가 342장) ● 오직 믿음으로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점층법(1) ● 본문 : 베드로후서 1:5-7 1) 본문에서 베드로가 전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야 할 덕목 8가지를 열거해보고 그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요소가 무엇이었는지 말해보자. 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야 하는 8가지 덕목(본문 5-7절 참고):
② 8가지 중 가장 기초가 되는 요소는? |
2) 본문에 ‘덕’(德)이라고 기록된 단어 ‘아레텐’의 원래의 의미를 설교에서는 무엇이라고 했나? ① 설교를 참고하라.
② ‘도덕적 탁월성’은 구체적으로 신앙의 자세 중에 어떤 것들인가? |
3) 믿음과 덕 위에 ‘지식’을 더한다는 의미에서의 지식(그노시스)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교회가 결코 반지성적인 공동체가 아니라는 의미를 1번 항목에 적용하여 나누어 보자.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세밀한 중보 ● 나라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 새신자들의 정착을 위하여 ● 2016년의 마무리를 잘 하기 위하여 ● 12월 행사를 잘 준비하기 위하여 ● 피선교지를 위하여 ● 담임목사 목회 계획 수립을 위해 2) 헌금 3) 광고 ● 새신자에게 편지 전달하기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6년 12월 11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베드로후서 세 번째 강해) 본문 : 베드로후서 1:5:-7 제목 : 점층법(1) 오늘 본문은 고독한 군중들을 양산해 내는 이 비극의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야 할 삶의 덕목들을 베드로가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베드로가 제시한 덕목은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 등 총 8가지로 열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8가지의 덕목을 열거하면서 그 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덕목을 이루어 나아가는 중요한 전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이 덕목을 이루는 데에 있어서 요령을 피우지 말고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최고가 아니라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 조명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불만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 대한 상대적 열등감이었습니다. 그는 불만이 직무유기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런 차원이라면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이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에 대한 상대적 열등감을 마찬가지로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달랐습니다. 이 사람의 삶의 태도는 비교 평가가 아니라 최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요구하는 것은 최선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8가지의 항목을 제시한 목적은 이 8가지 항목을 이루기 위해 더욱 열심을 다해 나타내라는 독려였을 것입니다. 1) 믿음에 덕을 더하라는 것입니다. 8가지 항목 중에 제일 첫 번째로 베드로가 제시한 것은 믿음입니다. 주후 64-65년경인 이때는 철저한 순교의 시대였기 때문 로마를 비롯한 소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체절명으로 요구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5절 전반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더하라) 기록된 ‘더하라’는 헬라어 단어 ‘에피코레게사테’를 접목하여 해석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너희들이 믿음을 도구로 이용해서 덕을 공급하라’입니다. 이 본문을 해석하면 덕을 세우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기초입니다. 시절이 하수선 할수록, 시절이 고독한 군중을 만들어내는 시대이면 시대일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야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살아내기라고 말할 때 이것을 혹시 잘못 왜곡하거나 변질시켜 해석하는 것에 대한 경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결코 이기적 믿음이 아닌 이타적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25:34-36절을 보면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믿음을 갖고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폭력을 동원하여 내가 믿는 종교를 강제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는 것과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고 핍박을 가하는 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자는 믿음이 아니라 증오에 찬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벳세다에서 사람들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던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목이 마른 여인에게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신 분이 주님이셨습니다. 나그네 된 자들을 돌보셨고, 병든 자들을 돌보셨고, 눌린 자들을 해방시켜 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이라는 것은 그 분이 사셨던 것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고백을 넘어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의 보너스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살아냄이 곧 덕을 세우는 방법이 된다고 말입니다. 본문의 표현으로 그대로 적는다면 그 믿음 위에 덕을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덕’이라는 단어로 번역된 ‘아레텐’은 복음주의 학자들의 주석서를 보면 거의 대부분 동일한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주목할 만합니다. ‘도덕적 탁월성’입니다. 예를 들자면 겸손함이나 순결함 같은 것들입니다. 일반적인 도덕성을 말할 때 쓰는 단어가 아니라 흔히 하는 말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능력의 도덕성을 의미하는 단어가 바로 이 아레테입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살아내는 자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뛰어난 도덕적 탁월성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의도적으로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길로 들어서보니 아주 자연적으로 도덕적, 윤리적 탁월성이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은 마치 공식처럼 보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보면 이런 그의 고백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말할 수 있지만 성령을 주지 못합니다. 그들의 언어는 아름답지만 당신이 침묵하시면 제 마음에 불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말을 주지만 당신은 말의 의미를 줍니다. 그들은 신비를 제시하지만 당신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은 계명을 전달하지만 당신은 그것들을 지키게 하십니다. 그들은 길을 보여주지만 당신을 길을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들은 외적 필요들에 다가서지만 당신은 내면에서 저를 일깨우십니다. 그들은 정원에 물을 대지만 당신은 식물들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들은 말을 외치지만 당신은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베드로가 오늘 역설한 믿음 위에 덕을 세우기를 더욱 힘쓰라는 말은 너무나도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믿음 위에 덕을 세울 때만 그 덕의 권위와 위력을 세상이 인정할 것입니다. 2) 덕 위에 지식을 더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본문 5절 하반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적시합니다. “덕에 지식을” ‘지식을’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그노신’ 은 지성을 의미하는 헬라어의 대표적인 단어인 ‘그노시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결코 지성을 무시하거나 반지성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균형 있게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때 받은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다는 식의 해석은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런 해석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는 유다가 받은 돈의 액수인 은 서른 냥은 당시 노예들의 몸값에 지나지 않는 아주 볼품없는 금액이었기 때문입니다. 돈에 욕심이 난 유다라면 결코 은 30에 물러설 유다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유다의 출신 레테르를 통한 이해입니다. 유다는 가룟 출신입니다. 가룟으로 우리들이 발음하는 이 단어의 원래의 의미는 이스가리옷이라는 지명을 말합니다. 이 단어의 뜻은 가리옷의 거민이라는 말입니다. 가리옷이라는 단어는 학자들에 의하면 지명으로 추측하는데 특별히 그 지역에는 당시 폭력과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부류였던 열심당원들이 많이 살던 동네였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열심당원 즉 혁명을 통해서 조국의 해방을 이루려던 사람들을 뜻하는 ‘시카리’라는 단어에서 이스가리옷이 나왔을 것이라고 진단하기까지 합니다. 바로 이 해석에서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가 설명됩니다.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를 판 것이 아닙니다. 그는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그 분을 따랐고 그 3년의 공생애를 통해 주님의 신성을 보았습니다. 기적과 이적을 눈으로 목도하면서 이 분이라면 조국을 독립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께서 그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도리어 비폭력, 비저항의 인식으로 사람들을 품으셨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겠다는 선언까지 한 것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로마에 저항하여 독립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행하게 할 것인가?에 유다는 집중했습니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예수를 분노하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유다는 이런 이유로 예수를 노예의 몸값을 받고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분노하여 로마에 대항할 것이라는 지성적 계산을 한 것입니다. 이상의 해석은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판 사건에 대하여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지성적 해석입니다. 지성은 맹신과 광신으로 흘러가는 신앙의 길라잡이를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하나의 방편으로 주신 지성을 잘 사용하고 개발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제시한 지식의 선용은 두 가지를 앞세운다는 데에 있습니다. 믿음을 근거로 하여 그 위에 덕(탁월한 도덕성)을 더하고 이 두 가지의 신앙적 덕목 위에 지식을 세울 때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지식이 교만으로 변질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믿음과 덕이라는 선행 항목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지식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기에 말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 믿음과 덕이라는 항목을 무시했습니다. 지식만을 가동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실패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세 가지의 덕목이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 세 가지는 점층법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믿음의 근간 위에 있는 덕은 강합니다. 믿음의 근간 위에 있는 덕을 기초로 세워진 지식은 강력한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개별적으로 한 가지 한 가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세 가지는 마치 고린도전서 13:13절 전반절의 요소들과 같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믿음과 덕과 지식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최대의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이 믿음 위에 덕을 더하기를 바랍니다. 믿음 위에 덕을 더한 강력한 도구 위에 지식을 세우십시오. 아마도 하나님은 그것들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오늘의 기막힌 세대를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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