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6.12.04 지역 셀 사역2024-04-22 16:21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금년에 초청 받은 일 중에 가장 인상적인 모임 소개해 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찬송가 324장)
●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초청과 약속
● 본문 : 베드로후서 1:3-4
1) 본문 3절에 근거하여 볼 때 주님이 우리를 구원의 장으로 초청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① 조에:
② 유세베이아:
③ 결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 참고)  

2) 4절을 근거하여 볼 때 구원의 장으로 초청된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③ 결론:  

3) 본문에 근거한 초청과 약속을 믿는 자가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는 무엇인가?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세밀한 중보
● 나라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 새신자들의 정착을 위하여
● 2016년의 마무리를 잘 하기 위하여
● 12월 행사를 잘 준비하기 위하여
● 피선교지를 위하여
● 담임목사 목회 계획 수립을 위해
2) 헌금
3) 광고
● 새신자에게 편지 전달하기
4)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6년 12월 4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베드로후서 두 번째 강해)
본문 : 베드로후서 1:3-4
제목 : 초청과 약속

  고린도전서는 주후 53-55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이 편지의 작성 당시는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약 20년 정도가 지난 시간적 배경일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눈으로 직접 목도했다는 증거가 성경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활, 승천도 매일반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주님의 죽음, 부활, 승천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마치 본 사람처럼 기록한 것은 주의 사도들의 영향과 동시에 제 2의 제자군(누가, 마가, 실라, 디모데 등등)에 속하는 동역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주목할 정보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3a-4절에서 말하고 있는 이 내용은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 예루살렘 신앙공동체에서 고백했던 신앙 고백문이었다는 정보입니다(듀크 대학교의 리처드 헤이스 교수의 주석). 예수님이 감람원에서 승천하신 뒤에 그 자리에 있었던 인원들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자리를 옮겨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교회가 예루살렘 초대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우리가 무엇을 고백할 것인가? 를 정했는데 그것이 바로 3a-4절의 고백이었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것을 신학적 언어로 케리그마라고 정의합니다.
  리처드 헤이스 교수는 이 고백문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정식으로 자리를 잡은 시기를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약 3년 정도가 지난 시기라고 설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도 이 고백을 회심 이후 배웠을 것이고, 이후 신앙으로 고백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고백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고, 그의 사역의 현장에서 이 고백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했고 고린도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바울은 초대교회의 신앙 고백문을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에게 전하는 부활장에서 한 가지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고린도전서 15:5-6절).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것을 베드로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이후에 12제자에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그런 뒤에 마지막으로는 500여명의 형제에게 또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동시적 사건이고 상황이기 때문에 한참 후에 일어난 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당신이 다시 오실 것과 또한 당신이 대신 보내실 성령의 강림 약속을 동시적으로 본 사람들의 수는 대략 500여명 이상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주님이 성령을 보낼 터이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던 말에 순종한 인원이 약 120명이었음을 15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도했던 형제들 중에 산술적으로 약 380여명의 인원들이 사라지고 없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380여명의 인원들은 어디로 간 것인지에 대해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에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에 참여한 사람이 몇 명이었는가? 바울의 말에 의하면 500여 형제들이 일시에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 나는 이 오백여 형제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이라는 놀라운 체험을 하라고 초대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380여명은 초대를 받고도 그곳에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의 선언을 신앙적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초청하신 초청의 의미를 파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해석입니다. 마치 누가복음 14;15-24절에 기록되어 있는 부자가 큰 잔치를 배설했지만 초청 받은 자들이 그 잔치를 거절했다는 주님의 비유와 같이 말입니다.
  본문 3절에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소아시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향하여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됨으로 인해 구원을 받은 형제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칭찬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의 유진 피터슨 메시지 번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에 어울리는 모든 것을 기적적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초청해 주신 분을 우리가 직접 친밀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에 들어가는 주인공이 된 것은 우리를 구원의 장으로 초청해 주신 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받습니다.

1) 주님이 나를 구원의 장으로 초청하셨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주셨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유진 피터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이라고 의역했습니다. 3절에 기록된 ‘생명’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조에’의 번역입니다. 헬라어 단어 중에 ‘조에’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완전한 생명을 의미할 때만 쓰는 단어입니다. ‘경건’으로 번역된 ‘유세베이아’는 하나님의 성품을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킹 제임스 영어성경(KJV)에는 이 3절의 경건을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의 장으로 초청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조에’와 ‘유세베이아’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초청하신 주님의 뜻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상으로 우리를 만들기 위해 부르신 것이고 초청하신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상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초청의 의미이고 주군이신 주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셔서 당신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장으로 초청하신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합니다.

2) 구원의 장으로 초청받은 나는 세상을 능히 이기게 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도 받았다는 교훈입니다.
  본문 4절에서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들을 구원의 장으로 초청하신 사건을 베드로는 약속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배롭게 여기시는 큰 약속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나보다 더 뛰어난 수많은 존재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구원의 장으로 인도하신 것은 지극히 보배로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들을 구원해 놓으시고 약속까지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내가 너희를 반드시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4절을 유진 피터슨 메시지로 보면, “그 분의 초청은 이제껏 우리가 받은 초청 중에 최고의 초청입니다. 또한 우리는 여러분에게 전해 줄 멋진 약속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은 여러분이 욕망으로 얼룩진 세상에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입장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하나님의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나라에 입장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주셨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반드시 임할 하나님이 허락하신 분복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임하기까지 우리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마땅히 허락하시는 약속이 있다는 점에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할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메시지 번역의 설명으로는 “욕망으로 얼룩진 세상에 등을 돌리고 살 수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이 만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버티고 살아왔다는 자신감이 나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임을 본문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영적 붕괴와 랜덤의 현장에서 이 정도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나 정도면 참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던 나의 교만한 자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말씀이 본문 4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평안을 누리는 이유는 나로 인함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한 것입니다(요한복은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수없이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 금방이라도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나인데 나는 여전히 주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이 나로 인함이 아니라 주님이 세상을 먼저 이겨 놓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기막힌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나의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에 무너질 수 있는 나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썩어질 것에 등을 돌리게 하시는 역동하시는 은혜를 주심으로 인해 주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너기 직전에 이스라엘은 이 광야에서 개죽음 당하게 되었다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심지어는 언제 이곳으로 인도해 달라고 했느냐 공격했습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이곳에서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것은 홍해를 가르고 무사히 건너도록 갯벌을 마른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뒤따라오던 세상의 물리력과 공권력을 초토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 것은 광야로 초청하신 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이라는 세상의 썩어질 것에 다시는 눈 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이 초청하시고 계획하셨고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이 이루셨기에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은혜로 인해 구원의 장으로 초청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더불어 이 땅을 사는 동안 세상의 식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약속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초청과 약속을 부여받은 시민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내는 세인공동체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