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2016년을 보내면서 격세지감이라고 느꼈던 일들이 있으면 나누어 보자. | 경배와 찬양 (WORSHOP)● 아 하나님의 은혜로 (찬송가 310장) ●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송가 338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격세지감 ● 본문 : 베드로후서 1:1-2 1) 주후 33-37년 사이의 베드로 사도의 영적 기상도를 다음의 성경 구절들로 유추해 보자. ① 마태복음 26:69-75절:
② 마태복음 28:10 & 요한복음 21:2-3절: |
2) 주후 64-65년경의 베드로의 영적 기상도를 다음의 성경 구절로 유추해 보자. ① 베드로후서 1:1-2절:
② 베드로전서 4:7-11절: |
3) 1번과 2번 항목을 통해 본 베드로 사도의 근 30년 사이의 영적 변화를 설교 제목에 적용하여 하여 설명해 보자. 더불어 내가 변화를 느끼는 격세지감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어떤 영적 태도가 필요한가를 설교를 곱씹은 뒤 그 방향성을 위해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세밀한 중보 ● 나라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 새신자들의 정착을 위하여 ● 2016년의 마무리를 잘 하기 위하여 ● 12월 행사를 잘 준비하기 위하여 ● 피선교지를 위하여 2) 헌금 3) 광고 ● 새신자에게 편지 전달하기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6년 11월 27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베드로후서 첫 번째 강해) 본문 : 베드로후서 1:1-2 제목 : 격세지감
隔世之感(격세지감)의 사전적 의미는 “그리 오래지 않은 동안에 상당히 많이 달라져서 전혀 다른 세상 혹은 다른 세대가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어느 하나의 기점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 안에 그만한 삶의 흔적들이 농축되어 있는 사람이어야만 느낄 수 있는 감정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수신자인 베드로가 바로 이 격세지감을 실감하는 주인공 중에 한 명입니다.
베드로의 두 번째의 편지로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순교한 주후 65년 바로 직전에 기록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알아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디베랴 바닷가에서 목양의 위임을 세 번에 걸쳐서 하셨을 때 베드로의 죽음 즉 순교에 대한 예고를 하신 것이 요한복음 21:18-19 전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베드로가 이후 주의 사역자로 복음을 전하면서도 항상 주님의 이 말씀을 귀에 담았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 말씀이 이루어질 제반적인 상황을 불과 30년이 지난 주후 65년 로마에서 감지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순교를 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실 때가 통상적 해석으로 주후 33-37년 사이라고 가정할 때 오늘 본문은 약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글이 기록되기 30년 전 베드로의 영적 상태는 어땠을지 마태복음 26:69-75절을 보면 영적 그로기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특히 주목할 구절은 74절입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 구절에서 ‘저주하며’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카타나쎄마티제인’은 ‘불로 완전히 소각하여 소멸시키다’의 의미인데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때의 심정은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나누었던 일체의 흔적들을 소멸시키고 싶은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과의 3년 동안 쌓았던 사랑과 교제들의 흔적조차 완전히 지우고 싶었던 심정이 바로 가야바 뜰에서의 베드로의 영적 상태였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저주했다는 표현입니다. 이뿐 아니라 안식 후 첫 날,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 명의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으나 무덤 문은 열렸고 주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떨고 있는 여인들에게 무덤을 지키던 천사가 주님은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고 너희들이 갈릴리로 가면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고지합니다. 이런 충격적인 일을 목도한 여인들이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무덤을 나섰는데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여인들을 직접 만나주셨습니다. 여인들에게 샬롬을 축원하신 주님께서 권하셨던 내용이 마태복음 28:10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일성은 ‘갈릴리로 가라’였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공생애 동안 사역하셨던 장소가 갈릴리였기 때문입니다. 성서신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현장은 기득권자들의 요지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항상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그리고 교회가 살펴야할 곳이 소외된 자들이 살고 있는 후미진 곳 갈릴리라는 곳임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래서 갈릴리로 가셨고 또 거기에서만 부활의 주님을 만날 것임을 고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활신앙의 메카가 갈릴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신앙의 정점에 있어야 할 베드로의 정황은 요한복음 21:2-3절이 말해 줍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베드로도 갈릴리로 갔으나 그의 정황은 무덤에서 여인들에게 명령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릴리 호수의 한 지엽인 디베랴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먹고 살기 위하여 옛 생활로 돌아간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아닌 철저한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갈릴리 디베랴로 내려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베드로는 본인 한 사람만 패배한 자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패배 군단인 또 다른 6명의 제자들까지 몰고 내려 간 것입니다. 또 다른 제자들까지 영적으로 침몰시킨 장본인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마틴 부버는 “자기 창문을 통해서 응시하는 무신론자가 자기가 만든 거짓된 하나님 상에 사로잡힌 신앙인보다 하나님에게 더 접근해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록한 대로 베드로는 자기의 상으로 주님을 만들었다가 자기의 욕심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주님을 완전히 불로 소멸했던 형편없는 무신론자보다도 못한 기형적 신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주후 33-37년 사이의 베드로의 영적 그로기 상태의 면면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주님을 부인한 정도가 아닌 불로 소멸하여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 정도로 주님을 저주했던 장본인이었던 베드로, 본인뿐만이 아니라 타인까지 영적 패배자로, 낙오자로 인도했던 베드로가 불과 30년이 지난 로마에서 자기 스스로를 세 가지로 자기를 정의합니다. (⓵ 예수의 종, ⓶ 사도, ⓷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분이 주신 의로 말미암아 보배로운 믿음을 갖게 된 자) 종은 자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제 자기의 의지는 자기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1:18절의 언급대로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주님의 예고처럼 이제는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보냄을 받고 끌려 다니는 존재가 되었다는 신앙고백이 사도입니다. 베드로의 진솔한 고백은 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배로운 믿음을 갖게 된 의롭게 된 자라고까지 고백합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자기 정체성을 소개하는 본문에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본문 2절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방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향하여 은혜와 평강을 비는 메신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불과 30년 만에 이런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 예수님에 대한 피상적인 앎이 아닌 인격적인 앎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서 베드로는 내가 너희들에게 은혜와 평강의 인사를 전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이라고 말합니다. ‘앎’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에피그노세이’의 번역으로 그 뜻을 유진 피터슨은 “더욱 깊이 경험함으로서”라고 번역하였스빈다. 더욱 깊이 경험하는 것이 바로 인격적인 앎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에 대한 진정한 능력을 체험해 보지 못한 피상적인 앎은 교만과 건방짐입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나아만 신앙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갖고 있었던 생각은 피상적이고 세속적인 마인드로 무장한 앎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빠지는 무서운 함정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피상적인 지식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어처구니없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아는 앎은 경험하는 앎, 인격적인 앎, 체험적인 앎입니다. 이 앎은 결코 무슨, 무슨 주의(_ism)임을 아는 앎이 아닙니다. 이 앎은 동정녀 마리아가 고백한 앎입니다.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면 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인격적인 앎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사도행전 2:1-4절을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성령강림 사건을 술회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나누는 결론이 성령 강림의 결과는 방언을 받음이라고 정의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성령 강림사건이 주는 교훈의 최고의 가치는 방언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 강림의 최고의 교훈은 성령이 각 개인에게 각자 가장 인격적인 방법으로 찾아오셨다는 인격적 체험입니다(본문 3절).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이유는 방언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인격 위에 찾아와 앉으셨기 때문이라는 교훈은 감동의 감동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결정적인 방법은 은사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할 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 앎이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에게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바뀌지 않는 절망이, 하나님을 앎에 있어서 전인격적인 앎을 삶으로 경험한 자는 그의 변화됨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이러한 두 가지의 극단적인 분명한 가름은 앎의 차이에서 나타납니다.
오늘의 설교로 적용한다면 하나님과 예수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마치 구원 받은 자의 자리를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을 알되 인격적인 앎으로, 피상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 앎으로 무장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우리 교회에서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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