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가 경험했던 멘붕 상태의 황당했던 일은? 또한 극복했던 방법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환란과 핍박 중에도 (찬송가 336장) ●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찬송가 461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모름지기 ● 본문 : 고린도전서 1:1-3 1)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10가지의 제반적인 문제들이 무엇이었는지 훑어보십시다. ① 10가지의 제 문제들:
② 10가지의 제 문제로 인해 바울과 소스데네가 편지를 쓰면서 천착한 것은 무엇일까요?: |
2) 위의 설명 10가지를 전제하면서 도출해 낸 성도라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설교 주제 참고 ① 설교에서 소개된 대표적인 사람 세 명을 말해 봅시다.(사도행전 4장, 아모스 7장) |
3) 담임목사가 제시한 성도들의 압도적인 권위란 무엇이었습니까?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제목 ● 환우들을 위한 비상 기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참여하기 독려 ● 대입 지원자들을 위해 ● 지역 셀 피선교지의 승리를 위해 ● 가을 열린 모임 사역을 위하여 ● 부교역자 충원을 위한 중보 ● 담임목사의 첫 번째 서적의 선한 승리를 위하여 2) 헌금 3) 광고 ● 가을 열린 모임 2주차 사역에 최선 다하기 ● 담임목사 저서 북 리뷰 작성할 수 있는 교우 독려하여 인터넷에 게재 독려하기(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6년 10월 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네 번째 강해) 제목: 모름지기 본문: 고린도전서 1:1-3
바울과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안부 인사를 전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본문 2절 전반절). 이 구절에서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의 정체성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신자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도’라는 단어 헬라어 ‘하기오이스’를 설명하기 위해 학자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단어가 ‘구별되다.’입니다. 영국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톰 라이트는 ‘하기오스’를 “나는 옷가지가 많지는 않지만, 내가 가장 아끼는 옷 즉 가장 특별한 상황에만 입는 옷이 한 벌 있다. 이 옷이야 말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도’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의미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나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여러분, 곧 예수께서 깨끗하게 하시고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위해 구별된 신자들에게 이 편지를 보내드립니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소스데네가 이 편지의 수신자를 이렇게 못 박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고린도 교회 안에 밀어닥친 세속화로 인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가 어려운 영적 상태를 감안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영국 더램 대학교 교수인 C.K 바레트 교수의 말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발을 내딛은 뒤, 우여곡절 끝에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자신의 또 다른 사역을 위해 에베소에 머물 때는 고린도교회를 세운 지 시기적으로 4-6년이 지난 간극이 있습니다. 이 4-6년 동안의 시기적 간극은 유감스럽게도 고린도교회의 부흥의 시기가 아니라 교회 안에 밀려들어온 고린도의 세속적 쓰레기들로 넘실거리던 말 그대로 영적 랜덤의 상태였습니다. 이 기막힌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바울과 소스데네는 냉정함을 되찾고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편지하는 글에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이 영적 정체성의 회복이라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메시지를 화두로 던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어느 정도였기에 바울이 구별됨을 강조한 것인지 듀크 대학교의 리처드 헤이어스 교수가 쓴 주석서를 보면 이런 문제점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⓵ 공동체 내에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었던 파당의 문제 ⓶ 공동체 내에 있었던 영적 교만함 즉 은혜가 선물임을 인정하지 않고 본인들의 자고한 지식이나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는 자신감 ⓷ 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의 낯부끄러운 음행들과 그들을 품는 악함 ⓸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고소 사건 ⓹ 결혼과 독신에 대한 편견과 성적인 타락의 합리화 ⓺ 우상제물을 먹는 것에 대한 비난 ⓻ 사도로 사는 것에 대한 권리 포기를 부인하는 일 ⓼ 예배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적 차별과 헤어스타일에 대한 편견 ⓽ 그릇된 은사 주의 ⓾ 부활 신앙에 대한 제 문제들. 오늘 본문을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은 바울과 소스데네가 하고 싶었던 말은 세속의 가치와는
다른 구별됨의 모습으로 회복하라는 메시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선전포고의 책입니다. 교회 같지 않음에 대하여, 성도 같지 않음에 대하여, 교회 안의 불신앙에 대하여, 교회 안의 가짜들을 향하여 외치는 쓴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모름지기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 모름지기 성도는 압도적인 구별됨을 살아내는 사람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고기를 잡는 것이 그들의 업이었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베드로와 요한이 병자를 일으켜 세운 일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들이 이후에 선포하며 외쳤던 메시지에 산헤드린 유대 종교 지도부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에게 누명을 씌워 십자가에서 죽게 함으로서 유대 종교의 흔들리던 위상을 다시 되찾은 대제사장 안나스와 그의 사위인 가야바 그리고 또 다른 제사장 문중들이 다 모여 산헤드린 종교회의 불려온 요한과 베드로를 심문합니다. 그들은 잡혀 온 자들이 갈릴리 출신의 무식한 어부들이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었던 터라 이 심문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문을 받던 베드로와 요한의 선포는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예수가 죽을 때 비겁하게 주군을 버리고 도망갔던 나약한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령의 인격적 만남과 충만함을 경험한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이자, 하기오스(성도)이자, 아포스톨로스(사도)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주군이신 예수를 이미 누명을 씌워 죽인 무시무시한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부가 ‘누구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치고 선포하는가?’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외쳤던 선포가 사도행전 4:8-12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목숨을 건 도발이자 복음의 능력으로 무장한 서슬이 시퍼런 선포였습니다. 그러자 사도행전 4:13-14절에서 그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세상의 가치를 갖고 비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오라고 말하는 일체의 세속의 사람들이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영적 정체성을 가졌던 베드로와 요한을 본문 속에서 봅니다. 주전 760년 즈음인 여로보암 2세 때, 북쪽 이스라엘은 국력도, 경제력도 최고점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토는 남북의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 시대를 방불한 정도의 영토를 차지하고 그야말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이 모든 일들은 허상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불과 40년 뒤에 불어 닥칠 나라의 멸망입니다. 북쪽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도 그것이 허상인 이유는 영적인 붕괴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뜻에 정반대되는 신 사사시대를 방불 하는 영적인 흑암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북쪽을 책임지고 있었던 궁정 예언자-길 예언자-는 아마샤입니다. 그런데 그는 권력과 개인적 풍요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는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그를 따르는 수하의 사람들 역시 도낀개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북쪽에는 예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영적 흑암의 시대였습니다. 이 때 남쪽 출신의 아모스 예언자가 하나님의 급하신 부름을 받고 북쪽으로 올라가 외롭게 하나님의 소리를 전합니다. 아모스 7장을 보면 아모스와 아마샤의 한 판 승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샤는 영역을 침범하여 자기의 밥그릇을 위협하는 아모스에게 네 고향 남쪽으로 내려가 거기서 떡이나 먹으며 예언을 하라고 윽박지릅니다. 다시는 이곳 북쪽에서는 예언하거나 경고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협박에 아모스 예언자는 굴하지 않고 자기의 할 말을 힘 있게 전합니다.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고하지 말라 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아모스 7:13-17절.)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한 메시지를 받은 소명이 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아마샤에게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오늘 우리들이 사는 시대의 비극은 아모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시대의 여론에 굴복하고, 야합하고 그래서 예언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언의 목소리를 전하지 못하는 비극이 오늘 우리 시대의 최고의 비극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세상이 성도를 깔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정체성이 없는 가짜 그리스도인의 삶이 도리어 당연한 것처럼 치부되는 것이 이 시대의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이런 세상에 성도의 권위를 갖고 구별된 삶을 살려는 사람은 도리어 이상한 사람으로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영적 지경입니다. “오직 정의(쩨다카)를 물 같이, 공의(미슈파트)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24) 모름지기 성도는 시대의 굴기에 굴복하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살아내는 자들입니다. 모름지기 성도는 일체의 성도답지 않은 것과 싸워내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를 보면 대 제사장 안나스가 예수를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심문하는 장면이 작가의 드라마틱한 각색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전역에서 종교적 최고 권력자인 안나스가 볼품없이 심문당하는 예수에게 이렇게 독백하는 장면은 소름을 끼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체하는 기술을 나는 알고 있다네.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성전의 모든 제사를 경건하게 거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지. 이것은 사회질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거든. 그런 지혜를 나는 나이와 함께 배웠다네.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삶의 방식이 그대의 것보다 현명하다고 본다네. 민족이나 나라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유리하지. 인간이 남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적어도 주거지와 함께 모여 결속을 다지는 장소는 만들어 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세상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라네.” 오늘 우리 기독교 안에 이런 소름끼치는 종교인들이 깔려 있습니다. 세상의 필요에 응답하는 하나님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포장하며 살아가는 종교인의 삶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그 말씀의 권위 아래에서 구별된 자로 살기를 살아내는 모름지기 진짜 성도(하기오스)들이 되십시다. 김기석 목사의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에 보면 이런 일침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들음과 행함, 아는 것과 살아 내는 것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한 고투의 과정이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앎은 특히 종교적 앎은 반드시 교만으로 변한다.” 모름지기 성도는 압도적인 구별됨을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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