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당신에게 제일 자신이 있는 장기는 무엇입니까? | 경배와 찬양 (WORSHOP) ● 시온성과 같은 교회 (찬송가 210장) ●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ccm)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당신은 자신이 있습니까? ● 본문 : 고린도전서 1:1-3 1) 바울이 부르심을 받은 것을 강하게 주장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① 사도행전 9:15절과 ‘사도’(아포스토롤스)라는 원어의 뜻 참고:
② 부르심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담보하는 것입니까? (김기석 목사의 글 참고) |
2) 바울 사도가 갖고 있었던 교회론이 바람직한 것이었다고 담임목사가 말한 이유는 무엇은 근거한 것입니까? ① 본문 2절 참고:
② 마태복음 16:16-18절 참고: |
3) 나는 영적으로 분명한 정체성과 자존감을 갖고 자신 있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나누어 보십시다. 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나누기: ② 위에서 이야기된 부르심의 의미와 올바른 교회관을 갖고 있었던 바울처럼 우리 스스로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교회론을 상기하고 교훈하기: ③ 그런 교회와 성도가 되기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기: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 환우들을 위한 특별 비상 기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참여하기 독려하기 ● 대학 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을 위하여 (명단:서혜린, 섭현우, 김현동, 민예은, 신요한, 이장규, 조재영, 차수빈, 김예준, 권나윤, 김민지) ● 지역 셀의 피 선교지를 위해 ● 담임목사의 첫번째 서적의 선한승리를 위하여 ● 가을 열린 모임의 준비와 승리를 위하여 ● 부교역자 충원을 위한 중보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6년 9월 2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두 번째 강해) 제목: 당신은 자신 있습니까? 본문: 고린도전서 1:1-3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에 나오는 소설 속 내용은 비정상적이었던 일본군에 대한 잔혹함을 고발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 속에도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비정상적인 것에 대하여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대처해야 할지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은혜와 도전을 받습니다.
● 더 강력한 영적 자존감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본문 1절). 바울은 고린도전서 외에도 자신이 쓴 또 다른 서신서에서 본문 1절과 같은 방법으로 수신자에게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사도라는 수식어를 본인에게 스스로 붙였다는 점입니다. 주전 2세기 작으로 여겨지는 위경의 분류에 들어가는 ‘바울과 데클라 행전’을 보면 바울의 외모가 묘사되어 있는데 그는 외모적으로 호감이 가는 얼굴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런 외형적인 초라함은 그가 세운 교회에 침투한 이단종파 지도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폄훼되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상당히 많은 지역에서 그의 사도직에 대한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 일반적 주류들의 해석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사도라는 호칭으로 초대교회에서 불리고 있는 사람은 12명의 제자 외에는 없는데 사울이 본인 스스로가 사로라고 칭했으니 이런 공격을 하기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도직에 대한 공격을 받았던 바울은 자신의 또 다른 서신에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사도의 직을 받은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라디아서 1:11-12절). 바울은 자기를 흔들고 있는 사도권에 대하여 분명한 자존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인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인해 사도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렇게 본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사도의 직을 받게 되었다는 강력한 자존감을 잃지 않고 사역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1) 그는 분명한 부르심의 소명의식이 있었습니다. 본문 1절 중반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라는 구절 중 ‘부르심’이라는 명사로 번역된 헬라어 성경 ‘클레토스’는 ‘지명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 43:1절에서 이사야가 말한 바로 ‘지명하여 불렀나니’의 맥락이 바로 ‘클레토스’입니다. 수많은 대중들 가운데에 있는 지명자가 찍혀 불림을 당하는 상태가 바로 ‘클레토스’입니다. 사도행전 9:3-7절에서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은 일행들과 예수 믿는 자들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목할 것은 일행 중에 사울과 함께 가던 자들 중에는 단 한 명도 부활의 주님이 사울에게 행한 말을 듣지 못하고 오직 사울만이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지명하여 불림을 당한 것은 내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며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명한 택한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발신자인 바울은 예수 핍박자의 대부였습니다. 주님을 공격하던 자이었던 자기를 부르셨다라는 사실은 한량없는 은혜였습니다. 그의 부르심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흔들릴 수 없는 본인의 영적 정체성이자, 자존감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사도로 ‘클레토스’ (부름)된 자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주님은 바울을 그렇게 부르셔서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라는 단어 ‘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바울을 부르신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절). 어떤 의미로 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하여 보내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가 약해진 이유는 부름 받은 이유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세상 사람들보다 못해진 이유는 부름 받은 이유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김기석 목사의 신간인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에 담긴 내용 중에 “예수님은 당신의 아름다운 일을 함께 하자고 우리를 부르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대상화할 뿐, 그 분을 따라 걷지 않는다. 따르는 것보다 경배하는 것이 쉽다. 따르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좁은 길을 걸으려는 이들은 많지 않다. 주님을 경배하는 찬양소리는 드높지만 지금도 주님이 걷고 계시는 그 십자가의 길은 한적하기 이를 데가 없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금 외로우시다.” 부름의 이유는 따르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 가슴을 때립니다. 그럴듯한 경배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며 결코 그 분을 따르는 것에는 손사래 치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향한 선전포고와 같은 말이 가슴에 절절합니다. 목사를 목사로 부르신 이유는 목사직을 갖고 더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장로를 세운 이유는 평신도들에게 장로라는 것을 통해 대접해달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안수 집사, 집사, 각종 직분자들을 세운 것은 휘두르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체의 자리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 하고 섬기라고 세운 것이며 부른 것입니다. 중세 암흑 같은 가톨릭에 목숨을 걸고 항거하며 나온 자들이 개신교인(the protestant)들입니다. 중세 가톨릭은 철저히 계급주의(hierarchy) 체제였습니다. 이것을 항거하여 나온 것이 개신교회라는 말입니다. 헌데 개신교회는 더 심각한 새로운 계급주의(neo-hierarchy)가 형성되는 아이러니 공동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모순이 생기게 된 것은 부르심의 의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소명의식이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수많은 내외적인 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그에게 주님이 주신 부르심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인식하고 그 부르심에 겸손하게 순종하여 세속적 가치에 함몰되어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증언하는 신실한 교회와 그 어떤 상황에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부르심의 초심을 잊지 않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시다.
2) 바울은 분명한 교회론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사유화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이 편지를 주후 53-55년경에 작성했습니다. 더불어 바울은 고린도에 첫 번째 발을 디딘 것이 주후 50년 3월경이라고 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바울은 악조건을 이기고 교회를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세운 뒤, 그는 다시 전도의 여정을 떠났습니다. 굳게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던 바울은 참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가슴으로 세운 교회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이런 와해 앞에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교회를 세운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구절이 중요한 까닭은 바울의 교회론이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인사말에서 충분히 ‘내가 3년 전에 세운 교회’, ‘고린도에 세워진 내가 개척한 교회’ 라고 지칭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호칭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명칭은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교회론은 주님의 교회론과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수고하여 세운 그리고 개척한 교회에 대하여 소유권이나 주도권을 주장하거나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노력과 수고를 세운 교회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모든 교회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에 분명한 신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너지는 이유 중에 또 하나는 교회의 사유재산화입니다. 특정한 누구의 것으로 교회가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그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반응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8절).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 중에 주님의 교회가 아닌 교회는 단 한 교회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교회를 사람이 사유화하는 것에 있습니다. 내 맘대로 만들 수 있는 사유화된 교회가 교회일 수 없고 그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자가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교회는 이미 사유화된 교회입니다. 힘이 있는 한 집단이 교회를 좌지우지 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오늘 날의 교회는 하나님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수단이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목적이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성공이 목적이 된 작금의 영적 참담함을 우리는 여지없이 목도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생체에서 간을 꺼내 보이며 자랑스러워하며 도리어 그것을 못 견뎌하는 자들을 어딘가 부족한 존재처럼 비상식화 시켜버리는 무시무시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고 투쟁하며 하나님께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그 분명한 소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로 믿고 섬기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