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지금까지 살면서 봉사한 사역 중에 가장 인상 깊었고 감동적이었던 내용 소개하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님 고대가 (복음성가) ● 나 맡은 본분은 (찬송가 595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coming soon(2) ● 본문 : 베드로전서 4:7-11 1) ‘뜨겁게 사랑하라’의 ‘뜨겁게’로 번역된 헬라어 ‘엑테네’ 라는 단어의 의미가 가지고 있는 뜻과 현대적 의미를 말해보자. 2) 봉사해야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봉사의 대 전제는 또한 무엇인가? ① 봉사를 해야 하는 이유:
② 봉사의 대전제(본문 10-11절 참고): |
3) 개봉박두의 그 날,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서야 할 것인가?를 재음미하고 그 결단을 위해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 환우들을 위한 특별 비상 기도회의 응답을 위하여 ● 대학 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을 위하여 (명단:서혜린, 섭현우, 김현동, 민예은, 신요한, 이장규, 조재영, 차수빈, 김예준, 권나윤, 김민지) ● 지역 셀의 피 선교지를 위해 ● 담임목사의 첫번째 서적의 선한승리를 위하여 ● 추석 명절을 맞아 각 가정의 영적 승리를 위해 ● 부교역자 충원을 위한 중보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9월 11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28번째 강해) 제목: Coming soon (2) 본문: 베드로전서 4:7-11
그 날이 가까운 21세기 바로 오늘, 주님이 가까이 오시고 있는 이때에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 소통은 아무나,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겸손하게 근신하고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날이 서서히 그리고 긴급하게 다가오고 있는 작금의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성하고 나아가야 하는 요소를 살펴봅시다.
2) 진정성을 갖고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본문 8절). 베드로 사도가 사랑을 하되 뜨겁게 사랑을 하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자들의 밥이 되어 살이 찢기고 뜯어지는 고통과 화형으로 불에 태워지는 죽음을 당하며 순교를 당할 때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먼저 나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그 사랑을 서로 죽어가고 있는 지체들을 뜨겁게 격려하고 사랑하는 것 말고는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뜨겁게’ 라고 번역된 헬라어 ‘엑테네’는 고속도로가 올곧게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그렇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한 사랑, 소아시아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요구한 사랑은 그런 사랑입니다. 내가 비록 어마 무시한 고통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렇게 일직선이 뻗은 것처럼 늘 항상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한 시련과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자들의 먹이가 되고 화형 불에 재가 되는 고통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혀가 잘리고 마차의 바퀴에 깔려 죽임을 당하는 핍박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서로 이렇게 격려하며 노래를 했습니다. “주님은 개선하시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네. 오, 주님 우리도 주와 함께 부활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주전 1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자화상이었습니다.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에 보면 일본 가톨릭 신자들이 선교 초기에 당한 고문과 핍박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명은 한 사람 펄펄 끓는 연못가로 들끓는 물보라 앞에 서서 그 무서운 고통을 맛보기 전에 그리스도교를 버리라는 훈계를 들어야 했다. 죄수들의 옷을 벗기고, 두 손과 두 다리를 밧줄로 묶고 커다란 국자로 뜨거운 물을 퍼서 그들 머리에 부었다. 그것도 한꺼번에 쏟지 않고 국자 바닥에 구멍을 몇 개 뚫어 고통이 오래가도록 했다. 수책형도 있었다. 바다 속에 기둥을 세우고 신자들을 묶는 것이다. 곧 밀물이 들어오면 바닷물이 그 허벅지까지 차오르게 하는 것인데 그렇게 가만히 내버려두면 일주일 즈음 뒤에 고통 속에서 죽이는 방법이었다.” 로마, 일본, 그 밖에 일체의 모든 그리스도인 핍박 국가에서는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엑테네’ 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엑테네의 사랑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먼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갈릴리의 옛 생활의 모습으로 돌아간 제자들에게 153마리의 고기를 잡게 해 주셨습니다. 배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을 하시고 베드로를 제자 삼으실 때처럼 그렇게 고기를 잡게 해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된 제자들은 육지로 올라와 예수님과 어색한 재회를 경험합니다. 불과 얼마 전 ‘나는 맹세하며 저주하노니 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그들은 그 누구도 주님의 책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죄책감에 빠져 있는 제자들과 함께 계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 하셨습니다. 아침 조반을 함께 나누신 주님은 천천히 베드로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한복음 21:15절). 당신께서 직접 지어주신 베드로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베드로의 옛 이름으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아마도 베드로의 마음은 천금만금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직접 자신에게 지어주신 이름을 놔두고 옛 이름을 부르신 것에 대하여 베드로는 참으로 참담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주님이 기억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뜻밖의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지은 죄를 추궁하지 않으시고 제일 먼저 선언하신 선포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말입니다. 무려 세 번에 걸친 요한복음 21장의 선언은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실천하신 사랑은 위대합니다. 잠언 10: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이것을 알았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지금 핍박을 가하고 있는 폭력적인 집단을 향하여 이 사랑으로 극복하고 승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되면 이 사랑을 행하였는지 주님이 우리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실천적으로 이 사랑을 나누는 세인지체들이 됩시다.
3) 선한 청지기처럼 봉사해야 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본문 10절). 성도는 각양의 은사가 다르지만 모두에게 공통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도구로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은사가 선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어떤 이가 그 은사를 누림과 내세움과 교만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그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기보다 개인의 감정적 취향에 따라 행동하는 그 어떤 무엇이지 은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그렇게 사용되는 은사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교활한 술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은사를 소개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주목할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2:4-11절). 이 구절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뚜렷하게 계속해서 반복되며 나오는 단어가 "to another" (각 사람에게) 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든지 예외 없이 은사가 개인적으로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은사를 활용하여 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본문 10절). 가장 중요한 것은 청지기의 사명을 갖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선한 청지기의 봉사를 누가 할 수 있느냐?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본문 11절). 선한 청지기의 역할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힘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갖고 사역을 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봉사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디아코네오’입니다. 오늘날 교회 직분을 말할 때 ‘집사’ 에 해당되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에서 파생된 ‘디아코노스’ 입니다. 이 단어는 수종들 때, 섬길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 시대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섬김의 리더십이요, 섬김의 사역입니다. 교회가 이 단어를 진정성 있게 회복하면 승리할 것입니다. 수졸(守拙)이라는 말의 의미는 비천한 것을 중요시 여긴다는 말입니다. 졸한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이치와 도는 졸을 졸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는 長(장)이나 拙(졸)이나 같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맡기신 은사와 일은 작고 큼이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바울의 천거 멤버들을 보면 이들의 공통점이 보입니다. 바울의 보호자였던 뵈뵈, 바울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으려고 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바울의 절대적인 신뢰자인 더디오, 바울이 너무나도 사랑해서 골로새서를 전하도록 맡겼던 두기고, 바울의 사랑했던 양아들 디모데.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선한 청지기처럼 봉사했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높고 낮음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모두가 귀하게 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 날이 이르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세 가지의 내용을 확인하실 것입니다. ① 하나님과 정신을 치리고 근신하여 소통하며 기도했는지. ② 엑테네의 마음으로 언제나 항상 늘 사랑했는지. ③ 선한 청지기의 마음을 갖고 이웃과 교회와 지체들에게 봉사했는지. 그 날은 오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함께 이런 삶을 살아갑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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