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6.09.04 지역 셀 사역2024-04-22 16:18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보았는데 가장 감동적이었던 영화 한 편과 본 것을 후회한 영화 한 편 소개하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님 다시오실 때까지 (ccm)
● 주 어느 때 다시 오실는지 (찬송가 176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coming soon(1)
● 본문 : 베드로전서 4:7
1) 설교 중에 담임목사가 오늘의 시대인 21세기가 1세기보다 더 마지막 때라고 강조한 이유를 설명해 보자.
① AD 1세기의 영적 기상도:
② AD 21세기의 영적 기상도:  

2) 마지막의 마지막 때에 성도들이 해야 하는 영적 준비 사항을 말해보자.
① 테마를 참고하여 말해 보자.

② 구체적으로 1번 항목을 행하는 삶을 또 다른 두 가지의 내용으로 설명해 보자.
  a.
  b.  

3) 위 항목 2번의 하부 항목 ①②를 적용하여 내가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할 나만의 영적 교만함과 근신하기를 싫어하는 요소들을 들추어내고 그것과 싸울 수 있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
① 영적인 교만함:
② 반드시 근신해야 할 나의 요소들: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 말씀 축제 4번의 집회 집중하기와 독려하기.
● 가을 열린 모임을 통해 영혼 구원의 결실을 위해
● 대학 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을 위하여
(명단:서혜린, 섭현우, 김현동, 민예은, 신요한, 이장규, 조재영, 차수빈, 김예준, 권나윤, 김민지)
● 환우들의 쾌유와 강건함을 위하여
● 지역 셀의 피 선교지를 위해
● 담임목사의 첫 번째 집필 서적이 전국에 있는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제시할 수 있도록
● 각 셀 원들을 위한 중보
● 부교역자 충원을 위한 중보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9월 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27번째 강해)
제목: Coming soon (1)
본문: 베드로전서 4:7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심이라는 사건은 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입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면서 아름다운 신앙인이었던 블레즈 파스칼이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쪽에 내기를 걸겠다”고 말한 것처럼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심이라는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절대적인 사실에 대해 ‘주님이 이 땅에 언제 오시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심정적으로 가늠은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가늠의 척도를 상당수 여러 곳에서 개진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인 베드로전서 4:7절 전반절의 추론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우리나라 번역 성경에는 ‘만물’ 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번역은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위로를 줍니다. 왜냐하면 ‘만물’이면 대상 자체가 인간이 아닌 어떤 자연의 것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 것이라는 위안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판톤’의 문자적인 의미는 ‘all things’로서 예외가 없는 피조 세계의 전체를 지칭합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과 나를 포함한 피조 세계의 일체의 것들을 포함하여 그것들의 마지막이 당도했다는 말입니다. 예외가 없고 아량을 베푸는 열외지역이 없다는 말입니다. 당신도 나도 끝을 볼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마지막을 어떤 상태로 맞이하게 될 것인가? 의 차이만 존재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정설입니다.
  본문 7절에 이어 나오는 ‘마지막’ 이라는 단어의 해석에 접근해 봅시다. 여기에 기록된 ‘텔로스’라는 ‘마지막’ 이라는 의미의 헬라어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마지막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한 자들의 마지막이라고 해석한 학자가 있습니다. 미국의 풀러 신학대학교 교수인 램지 마이클스 교수는 본문 7절 전반절에 기록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는 이 대목을 4:17절에 있는 말씀과 연관하여 설명을 합니다. 베드로전서 4:17절을 읽어보십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램지 교수는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17절에 기록된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맞는 마지막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맛보지 않게 되는 마지막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램지의 의견을 동의한다면 마지막은 반드시 두 개의 상태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시간의 날은 신자들에게는 완벽한 구원의 완성을 보는 날이겠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인과응보의 날이 될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인 우리들은 이 마지막이 완벽한 구원을 맛보는 날이 될 것이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공평하신 대가를 치르게 될 날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마지막 날은 신자나 불신자에게나 공히 너무나도 중요한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활동했던 AD 1세기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이어 받은 원 그리스도 공동체 기간이었습니다. 이 원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은 당시 엄청난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로마의 네로 치하로부터 시작하여 313년까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지하로 숨어들어가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엄청난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전하고 있는 오늘 본문의 메시지가 21세기 가장 안락하고 편안한 교양으로 기독교를 택하는 어처구니없는 오늘의 기독교인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순교적 공동체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편지의 수신자들인 소아시아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베드로를 통해 접하고 있는 ‘만물의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의 긴박성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지하 도시에서 제대로 신선한 공기도 마시지 못하고 숨죽이며 살던 그러나 그곳에서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의 찬양의 가사 대로 살던 그들은 정말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의 다시 오심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 일을 두고 상당수의 불신자들과 안티 크리스천들이 건수를 잡은 것처럼 흥분하며 교회를 공격하지만, 주님께서 베드로 시대에 그토록 사모하고 기대하던 주의 백성들을 위해 재림하시지 않고 그들을 실망시키신 것은 그때는 마지막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흰옷을 입은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지하에서 분연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주님 뜻대로 살던 최고의 신앙적 전성기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다가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고 손들어 주시지 않아도 너끈히 주 바라기로 살기에 충분한 군사들이 넘쳐나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긴박성은 AD 1세기가 아니라 AD 21세기가 진정으로 마지막 때라는 긴박성이 있습니다. 오늘 시대의 영적 기상도는 ‘추수할 것이나 사람도 너무나 강퍅해서 별로 없고 추수할 일군은 그래서 더 더욱 빈곤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가리켜 진정성이 있는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깨어 있는 목회자들은 ‘무통분만의 시대’라고 정의합니다. 통증을 가급적 느끼지 않고 해산하려는 모성애가 사라진 시대라고 진단하기에 이것이 바로 지금 베드로가 말한 ‘마지막 때’인 것입니다. 지금 그 때가 임박해 있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가장 그 때가 임박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첫 번째의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1) 하나님과 긴밀하게 소통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본문 7절). 베드로의 첫 번째 일성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기도의 회복은 전제가 있습니다. “The end of the world is coming soon therefore, be earnest and disciplined in your prayers.”(영어성경 NLT 번역).
“세상의 마지막이 개봉박두 직전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기도함에 있어서 더욱 진지함과 훈련됨으로 행하라”
  정신을 차리고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과 소통함에 있어서 더욱 열심을 내고 잘 훈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소통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소통하는 방법, 교제, 그리고 확신을 위해 영적인 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열정을 갖고 있는 자는 자기의 영성을 든든히 하는 것에 소홀하지 않습니다. 나를 부인하지 않고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이 훈련되어 있지 않은 자는 주님의 조명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첫 번째 수난고지를 선포하셨을 때 병행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강력하게 외치신 말씀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4-25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정신을 차릴 때 진정한 소통이 가능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마지막의 마지막 때입니다. 소통하는 자들이 승리합니다. 소통하는 자는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2) 근신하는 자가 소통할 수 있습니다.
  본문 7절 하반절에 기록된 ‘근신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네파테’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맛이 있는 술을 보고도 유혹받지 않는 禁酒(금주)의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소통하는 정신 차리는 기도의 주인공들이 되려면 기도하는 삶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들과 단절해야 한다는 해석입니다. 이 말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얻어지는 소통이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인정한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나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경제적인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고, 건강도 유지할 수 있고, 자녀들도 승승장구하고, 이 땅을 사는 데 별로 불편하지 않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습니다.
  D.L MOODY의 어록 중에 “하나님은 자기 자신으로 꽉 찬 사람 외에는 누구든지 비워진 채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이 촌철살인은 하나님도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불신앙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강력한 선포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믿는 사람은 결코 기도하는 자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불신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의 것이 최고인지 아는 자는 자기가 근신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으며 포기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에 하나님을 찾을리 없고 주님과 소통하려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조금도 양보하기를 꺼려하는 자는 아직도 기도의 祈(기)자도 모르는 인생입니다.
  김기석 목사의 책 ‘내 영혼의 작은 흔들림’에 보면 김 목사의 이런 기도문이 실려 있습니다. “풍요와 편리함에 중독된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자기 삶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 우리 속에 거칠고 뾰족한 것들을 녹여 주십시오. 우리 가슴에 먼저 평화 세상이 열리게 해 주십시오.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가 먼저 돌이켜 생명을 살리는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교회와 성도들의 가슴에 그리스도의 꽃이 피어나 생명의 향기를 발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이 기도를 드리는 자는 자기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근신할 수 있는 자이며 그것을 전제하는 자입니다.
  지금은 마지막의 마지막 때입니다. 그 마지막 때는 이제 막 개봉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의 개봉 박두의 시대에 그러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도해야 합니다. 폼 잡고 상석에 앉아 기도하는 신 바리새인들 되지 말고 말석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던 신 세리가 되십시다. 그러려면 정신을 차려야 하고, 근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엎드릴 때 그때에 비로소 당신은 당신의 주군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