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방학 동안 하나님이 주신 가장 은혜로웠던 간증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 나 (ccm) ●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찬송가 407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무너지지 말아야 할 이유 ● 본문 : 베드로전서 4:3-6 1) 4절에 기록된 ‘이상이 여겨’를 설교를 참고하여 오늘의 언어로 해석해 보고 적용해 보자. ① 헬라어 ‘크세니존타이’의 어원적 해석을 참고하라. ② 정상적인 삶에 대한 비정상적 삶의 공격이라는 테마를 삶으로 연결시켜 보자. |
2) 정상적인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는 자들이 무너지지 않는 두 번째의 이유를 나누어 보자. 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베드로전서 4:5-6절을 함께 먼저 읽자. ② 1번 항목을 기초로 셈하시는 하나님의 셈 방법을 나누어 보자. (불신자와 신자– 요한복음 5장 참고) |
3) 성도들이 넘어지는 요인을 3절에서 다양하게 열거하고 있다. 가장 피부로 와 닿는 무법한 우상 숭배를 현대적인 언어로 풀어보자. ① 오늘날의 무법한 우상숭배란? ② 우리들이 영적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준비해야 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 가을열린모임을 위한 말씀 축제를 위하여(9월 4일~ 7일) ● 대학 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을 위하여 (명단:서혜린, 섭현우, 김현동, 민예은, 신요한, 이장규, 조재영, 차수빈, 김예준, 권나윤, 김민지) ● 환우들의 쾌유와 강건함을 위하여 ● 여름 휴가철 재충전하는 건강한 휴가를 보내기 위하여 ● 담임목사 책 출간에 따른 선한 영향이 독자들에게 임하도록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8월 28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26번째 강해) 제목: 무너지지 말아야 할 이유 본문: 베드로전서 4:3-6
영적인 것에는 눈감고, 반드시 썩고 사라질 육적인 것에 대해서 천착하는 미련함이 우리들을 옥죄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경계하고 경고하신 것을 보기 좋게 거부하고 자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오늘의 사람들에게 비일비재하게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만의 일이 아니라 2,000년 전에 이런 일들이 소아시아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베드로는 직시하고 그들을 향하여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교훈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본문 3절).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눈감고 보이는 것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 자행했던 몇 가지의 일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음란함, 정욕, 술 취함과 방탕, 향락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무법한 우상 숭배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점층법을 보면 이렇게 지적한 눈에 보이는 정욕적인 것만이 믿을 만한 것이라고 열거한 뒤에 이것들은 이방인들이 행하는 뜻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방인들이 행하는 뜻이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행실을 닮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오늘의 언어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 가치에 함몰되어 있는 자들의 행위를 본받거나 따르지 말라는 권고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베드로 사도는 이런 악한 일들을 따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본문 3절 하반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때로 족하니라” 이 말은 한 번 실수한 것을 가지고 두 번 실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연이어 같은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수는 한 번 한 것으로 족하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인간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연약한 존재이며, 죗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베드로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 번 실수하여 넘어진 세속적 가치에 두 번 넘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요지부동은 ‘지나 간 때로 족할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성경은 두 번 넘어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태도, 즉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반응은 그렇게 사는 것을 비웃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두 번 넘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극한 방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을 도리어 이방인들은 이상하게 여긴다고 베드로는 경성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늘 설교의 중요한 교훈을 받습니다.
1) 마지막 때의 영적 상태는 그 날의 도래가 가까울수록 정상적인 삶을 비정상적이라고 공격하는 시대라는 교훈입니다.
베드로가 전하고 있는 본문 4절 하반절 “이상이 여겨 비방하나”라는 구절을 보면 ‘이상이 여겨’라고 번역된 헬라어 ‘크세니존타이’의 어원적인 의미는 주인이 손님을 맞이할 때 아주 낯설게 대우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근래 젊은이들이 말하는 단어로 바꾼다면 ‘썰렁하게 하다.’ 정도가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매우 바르게 살아서 만나는 사람마다 예의바르게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힘께 하는 사람들이 인사하는 것과는 담을 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주 버릇이 없는 부류들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 예의바르고 인사성이 아주 풍부한 사람이 속하게 될 때 그 인사성이 바른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버룻이 없는 사람이 그 사람이 인사를 하고 예의 있게 행동을 할 때 아주 낯설게 대하며, 썰렁하게 대우를 합니다. 그럴 때 쓰는 단어가 ‘이상이 여겨’ 즉 ‘크세니존타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오늘 주 안에서 신실한 자로 살아가는 자들이 이런 ‘크세니존타이’의 모욕을 당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적반하장으로 공격하는 일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바로 오늘입니다. 이런 일들은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곤 합니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책을 쓴 혜민 스님이 “다른 사람에게보다 본인한테 먼저 착하게 사세요. 너무 타인의 요구에 맞춰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 안의 욕망이나 감정에 소홀해진다는 점입니다.” 라고 갈파했습니다. 이 한 마디에 우리는 철없이 열광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라면 더 이상 내가 나에게 나를 더 너그럽고 착하게 대하면, 나는 내가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으로 둔갑하는 일, 내가 비정상적인 것을 숨기기 위해 정상적인 사람들을 역설적으로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몰고 가는 일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질 나쁜 일들입니다. 적어도 이 시대는 도무지 정상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정상적인 것을 유지하면 어떻게 하든 그 정상적인 것을 파괴하려는 시대가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아픔의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정상은 항상 비정상에게 공격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까지 우리들의 공간은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통치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지 맙시다. 그것이 시대의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사안을 영적으로 분별할 때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경성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이 길이 고단하고 좁은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 길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말며 굳세고 담대하게 정상의 길에 서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 셈하실 날이 올 것을 믿기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장차 하나님 앞에서 책망 받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메시지는 죽은 신자들에게도 선포되었습니다.(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비록 그들이 죽었지만,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주신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본문 5-6절, 유진 피터슨의 번역). 베드로가 설파한 명확한 복음은 이방인들, 구원 받지 못한 자들, 정욕적으로 사는 자들, 한 번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죄의 자리에서 즐기는 자들, 정상적으로 사는 것을 이상이 여기는 비정상적인 자들 모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셈하시는 심판대 앞에 선다는 사실을 성경이 약속하기에 오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에 외로울 수밖에 없는 신실한 자들은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5절). 또한 이렇게 불신자들의 심판도 분명히 하셨지만 6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 중에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주 안에서 영생을 얻은 복의 사람들임을 베드로는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심판은 확연히 다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자신의 복음서에 인용하였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24-29절). 신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자는 심판의 부활이 임하게 된다는 말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무기는 셈하시는 하나님이 셈하시는 날을 반드시 오게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0절을 보면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바울도 비슷한 선포를 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8-10절). 오늘 설교를 통하여 또 한 번 곱씹게 되는 은혜는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셈하시는 그 날 결코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셈하시지 않는다는 점에 위로를 받습니다. 요한계시록 21:3-4절이 큰 위로가 됩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고 되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을 외롭게 주의 이름으로 분투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응원하심은 물론 반드시 공평하게 셈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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