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나의 망설임으로 인하여 낭패를 보았던 에피소드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예수 사랑해요 (ccm) ● 예수 말씀하시기를 (찬송가 511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한 번이든 두 번이든 ● 본문 : 베드로전서 3:18-22 1)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 19절 본문 해석 중에서 우리들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해석을 설교를 참고하여 설명해 보자. ① 옥은 무엇을 의미하고, 영들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② ‘선포하셨다’는 케뤼쎄인의 이 경우의 해석은? |
2)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 19절 본문 해석 중에서 성경적으로 더 타당한 불편한 해석을 설명해 보자. ① 옥은 무엇을 의미하고, 영들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② ‘선포하셨다’는 케뤼쎄인의 이 경우의 해석은? |
3) 담임목사가 설교를 통해 나누려고 했던 교훈이 무엇이었는지 셀원들의 언어로 나누어 보자. ① 제목과 관련하여: ② 구원의 확신과 관련하여: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환우들을 위해(최정희 집사, 안동철 형제, 최순남 권사 등) ② 루존교회의 순조로운 이전과 피선교지를 위해 ③ 교회 학교 여름 사역들을 위해 ④ 부교역자 사택 공사를 위해 ⑤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험생들을 위해 ● (서혜린, 섭현우, 김현동, 민예은, 신요한, 이장규, ● 조재영, 차수빈) ⑥ 담임목사의 후반기 사역 승리와 책 출간이 출판사와의 좋은 조건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6년 7월 17일 주일 오후 예배 (베드로전서 24번째 강해) 제목: 한 번이든 두 번이든, 본문: 베드로전서 3:18-22
오늘 본문은 난해한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본문 18절). 주후 1-2세기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실은 중세 전까지 계속해서 왜곡되고 변질된 내용 중에 하나였습니다. 기독교 초기 시대부터 시작하여 중세에 이르기까지 이런 기독론에 있어서 이단 사상들이 팽배했습니다.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기절했다든지, 제자들이 너무 주님을 사랑해서 환상을 보았다든지,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찾아온 것은 영혼이었다든지 등등 여러 가지로 예수님의 부활과 죽음을 부인한 일들을 다반사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한 구절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확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을 전제하고 난 뒤에야 이어지는 난제 중의 난제인 19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본문 19절). 이 구절의 유진 피터슨의 번역을 살펴 봅시다. “그분께서는, 전에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아 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힌 세대들을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번역은 우리들이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 중에 원문에는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만 고백하고 있지 않은 한 구절을 포함하여 해석한 결과입니다. 아리우스라는 이단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주후 325년에 니케아에서 만든 신앙의 고백서가 주후 750년에 이렇게 확정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하느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나시고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묻히셨으며,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公敎會)와 모든 성도의 상통(相通)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몸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바로 이 대목입니다.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He descended into hell.) 니케아 신경 원문에는 ‘지옥에 내려가시어’, ‘혹은 저승에 가시어’ (가톨릭) 등등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유진 피터슨은 그 내용에 충실하게 맞추어 해석한 것입니다. 이 관점은 오늘 우리들이 보는 관점과도 대단히 흡사함을 보여 줍니다. 19절의 해석을 통상적으로 복음주의권에 있는 학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다는 것을 당연히 동의합니다. 굳이 크로노스의 시간표로 적시한다면 유대인들의 안식일인 토요일인 그 다음 날에 부활하셨다는 복음적인 이해를 받아들이기에 주님은 금요일 오후 3시 즈음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금요일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신 주님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일수로 계산할 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약 3일이라는 시간적인 함수관계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3일이라는 물리적인 시간, 주님이 행하신 사역이 바로 감옥행(?) 즉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곳에 가신 이유를 20절에서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노아의 날에 구원을 받은 사람은 총 8명이었습니다. 무려 120년 동안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심판을 유예하시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지만 결국에 구원을 받은 사람은 8명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다리셨지만 끝끝내 노아를 통해 행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거절하여 멸망을 당한 자들입니다. 기독교의 아주 고전적인 교리에 근거한다면 지옥에 있는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사도신경의 글자대로 해석한다면 저승(underworld)에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말한다면 감옥(prison)에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이들에게 내려가셨다는 것은 신교나 구교나 공히 같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두되는 문제가 19절에 기록된 ‘선포하시니라’라는 단어의 해석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의 복음을 증거 하여 사람을 구원시키는 목적이 있을 때 신약에서 사용된 단어는 ‘유앙겔리제인’ 이라는 독특한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기쁜 소식을 말할 때 ‘유앙겔리온’이라고 지칭합니다. 이 단어는 복음을 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본문 19절에 기록된 단어는 ‘유앙겔리제인’이 아니라 ‘케뤼쎄인’입니다. ‘케뤼쎄인’은 엄격하게 말할 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 그래서 번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제를 대상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의 중요성은 1) 구원의 기회는 딱 한 번이라는 경각심을 불러 넣어줍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후, 육신으로 완전히 돌아가셨습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18절 하반절). 주님의 영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주님은 영으로 감옥에 내려가셨습니다. 내려가신 주님은 노아의 시대에 노아를 통해 ‘유앙겔리제인’ 즉 구원의 말씀을 받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했지만 노아 시대의 뭇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쾌락과 탐욕을 위해 살면서 노아의 외침에 대하여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심판의 대상이 되어 죽었습니다. 그들도 육신으로는 완전히 죽었지만 영은 죽지 않고 살아 감옥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감옥에 대한 신학적 논쟁도 만만치 않지만 가장 두드러진 해석 하나만 제시한다면, 교부신학자인 오리겐은 아주 단순하게 이곳이 지옥이라고 천명했습니다. 구약의 외경 에녹 1서를 보면 땅속에 있는 어느 어두운 장소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곳은 아마도 타락한 천사들이 묶여 있는 장소로 상징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장소는 참으로 유쾌하지 않은 장소,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지 않는 장소 등으로 외연을 확장한다면 이 장소는 분명 예수께서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장소로 여겨짐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곳에 있는 영들 때문에 가셨습니다. 주님과 만난 그 영은 과연 누구인지를 밝혀야 합니다. 본문의 정황으로 보면 가장 무난한 해석은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20절). 옥에 있는 자들, 예수께서 직접 찾아가신 이들은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찾아가신 이유는 ‘케뤼쎄인’ 때문입니다. 즉 확인하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거부했지만 나는 이렇게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선포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한 자, 하나님의 엄위하신 말씀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포하다.’라는 ‘케뤼쎄인’은 바로 이것을 강조하는 단어라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증명해 주는 말씀으로 접목됩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때늦은 후회를 합니다.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는 지옥에서 갈증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에게 물을 손가락에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소원에 대하여 반응한 구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누가복음 16:25-26절). 구원의 기회를 잃은 자에 대한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 구절입니다. 구원의 기회가 다시 갱신되거나 되돌려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해석은 구원의 기회는 주어진 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한시적인 은혜임을 분명히 하는 해석입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난해한 해석을 접근할 때 성경적으로 이 해석이 가장 적확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러기에는 너무 야박하고 배타적이라고 공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또 다른 해석이 적지 않은 교회에서 횡행하고 있습니다.
2) 구원의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의 물꼬를 튼 사람은 교부신학자 오리겐입니다. 오리겐의 해석은 예수께서 옥에 내려가셔서 그곳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포한 ‘케뤼쎄인’을 ‘유앙겔리쎄인’의 의미로 해석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가 한 번 실수한 자들에게 당신의 부활하심을 보여주면서 이래도 나를 믿지 못하겠냐? 를 전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해석은 다양한 포괄적 해석으로 확대됩니다. 처음에는 믿음의 확실성이 없어서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은 물론 예수를 알지 못하여 옥에 와 있는 자들에게도 공평하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해석의 유연성입니다. 그래야 공평하다는 것이고, 사랑의 예수님의 속성에도 걸맞다고 적용하는 해석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좋은 해석이고 솔깃하며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응원하고 싶은 해석입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나, 지성적인 공평성의 잣대로 보면 이 해석이 너무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해석은 매력적이지만 성서적 근거가 빈약합니다. 본문 21-22절은 이렇게 구원의 분명한 선긋기를 한 주님께서는 종국에는 이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셨고 이후 모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주님에게 복종하게 되었음을 베드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의 핵심적인 교훈은 설교의 제목과 관련하여 구원의 기회가 한 번이든, 두 번이든 개의치 않고 오늘 내가 구원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회가 두 번 주어진 것이라고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서 판명이 되면 그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그래서 감사, 구원의 기회가 딱 한 번이라는 사실로 판명되는 그것과 상관없이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또 다른 은혜를 맛 볼 것입니다. 한 번이든, 두 번이든 상관없이 오늘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십시다. 구원의 확신과 은혜에 대하여 견고하게 서십시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라고 표현된 ‘옥’과 ‘영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두 팔 벌려 나를 품어주시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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