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6.07.10 셀 사역2024-04-22 16:17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후반기 영적으로 꼭 이루고 싶은 소망 한 가지씩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ccm)
● 하늘가는 밝은 길이 (찬송가 493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그 끝은 선해야 합니다.
● 본문 : 베드로전서 3:13-17
1)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한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를 능동적 차원과 수동적 차원에서 말해 보자.
① 능동적 차원 (본문 13절 참고):

② 수동적 차원 (본문 17절 참고):  

2)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현대적 감각으로 삶을 적용하여 말해 보자.
① 본문 14절 참고:

② 조정민 목사의 어록과 연관하여:  

3) 우리들의 삶의 끝이 다할 때까지 간직해야 할 소망을 베드로는 무엇이라 역설하고 있는가?
① 본문 15절 참고:
② 1번을 나눈 뒤에 그 소망이 흔들리지 않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
③ 베드로가 말한 소망을 우리들이 끝까지 붙들고 갈 때 주님이 주시는 내 삶의 끝자리에서 주시는 선물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6:9절)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환우들을 위해 (최정희 집사, 안동철 형제, 최순남 권사 등)
② 루존 교회의 이전과 피선교지를 위해
③ 교회하교 여름 사역들을 위해
④ 부교역자 사택공사를 위해
⑤ 담임목사의 후반기 사역 승리 중보와 책 출간을 위한 출판사와의 좋은 계약을 위해.
⑥ 카이캄 충북 지역 총회를 위해 (14일)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2016년 7월 10일 주일 오후 예배 (베드로전서 23번째 강해)
제목: 그 끝은 선해야 합니다.
본문: 베드로전서 3:13-17

  베드로 사도는 네로의 박해를 예견하고 앞으로 닥칠 불과 같은 시험을 순교적 영성을 갖고 잘 이길 것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소아시아의 여러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전했습니다. 네로의 대박해가 AD 64년에 시작되고 이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인들을 정식으로 인정한 콘스탄티우스 대제의 선언이 AD 313년이니 어림잡아 280여 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소아시아와 로마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 고난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6-7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또한 베드로전서 2:19-21절도 비슷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당시의 영적인 상태와 분위기 그리고 기상도를 엿보게 되는 정보들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주님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이기고 기뻐하자고 역설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은 또 다른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경성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본문 13절). 성경의 전반적인 흐름은 율법적인 행위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율법주의자들이 율법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상과 싸우셨고, 바울도 율법주의자들과는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근본주의적인 교단에서는 아무리 선을 행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 그 이후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뛰어넘어 네로 시대를 살아가는 순교적 영성이 요구되던 시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13절에서 말하고 있는 선행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 받은 자들 중에 순교적 영성의 차원을 걸어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마지막 때의 신앙적 강령입니다. 베드로는 열심을 다해 선을 행하라는 권면으로 역설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선을 행하라고 역설한 이유를 본문은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① 수동적인 차원: 선을 행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3절) ② 능동적인 차원: 선을 행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17절)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본문 17절).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사실을 아우르는 교훈은, 선을 행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끝을 승리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23:39-43절을 보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인 또 다른 두 명의 죄인들이 주님을 비방하고 인정하지 않은 기사를 만납니다. 그러나 유독이 누가복음에서는 그 중에 한 명이 마지막에 주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주님과 함께 낙원에 이르게 됨을 보고합니다. 보수적인 주석가 벵겔은 의미 있는 주석을 내놓았습니다. 두 명 모두 십자가에 달린 초기에는 마태와 마가의 보고처럼 완악했지만 극심한 십자가 위에서의 통증을 경험하면서 생각을 바꾸었고, 돌이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해석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향하여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궁극적인 승리는 끝이 승리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시작이 좋아도 끝을 패배하면 그는 승리한 자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끝에 승리를 경험하는 방법을 본문에서 제시하는데 그것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에 거하던 99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찾아오신 기사가 담겨 있습니다. 24년 전인 75세 때에 아브라함에 오셔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라는 말씀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하시면서 내 년 이 맘 즈음에 아들을 얻게 될 것임을 다시 확약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오셨을 때 아브라함의 반응을 살펴봅시다(창세기 18:2-8절). ① 몸을 땅에 엎드려 굽혔습니다. ②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③ 떡을 만들라. ④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으라. 아브라함은 당시 농경 및 육축 문화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을 실천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람의 모양으로 찾아온 여호와께 행한 대접은 ‘선대함’이었습니다.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선을 행하라는 말 역시 선대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틀은 선대함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적이든 아군이든 구별이 없습니다. 구별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그 끝을 승리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본문 17절). 우리 모두 열심을 다해 선을 행합시다. 선을 행하는 구체적 방법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 자체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본문 14절). 오늘의 시대는 고난과는 거리가 멉니다. 고난이라는 단어는 구시대에 성도들을 압박하기 위하여 만든 중세의 산물이라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해서 고난이라는 단어는 금기시 되는 단어입니다.
  베이직 교회를 담임하는 조정민 목사는 ‘하늘의 시간 땅의 시간’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삶이 해석되기를 원하신다. (중략) 교회는 십자가 위에 세워졌다. 교회위에 십자가가 세워진 것이 아니다.” 이 말은 고난을 싫어하는 그리스도인, 고난을 말하지 않는 교회, 교회일 수 없고 그리스도인 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헌데 현대의 그럴듯한 교회들은 이 고난을 회피합니다. 여기에 길들여진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말하면 못견뎌 합니다. 조정민 목사는 “예수님 당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다가 듣기가 불편하여 교회를 떠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시간표대로 움직여 주시기를 원한다. 자기 시간표대로 응답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때에 응답해 달라고 조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의 시간에 맞춰서 일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가 예수님의 시간표를 따라오기를 기다리신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삶이 해석되기를 원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선을 행하면 고난을 받던 시대가 베드로전서가 쓰인 시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17절). 

2) 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가 기록될 당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으로 힘든 시기였습니다. 황제 숭배 이외의 다른 숭배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통치 시대에 국가에 대한 질서를 문란하게 만드는 혹세무민의 반역자들로 인식되었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와 의심의 눈초리와 절대로 가까이하면 안 되는 종류의 하치들로 인식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들은 당시 당할 수 있는 일체의 고난을 당하는 물리적으로 힘없는 소수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언급한 내용 중에 주목해야 하는 구절인 15절을 봅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당시 누군가에 의해서 그것이 핍박의 조소이든 아니면 긍정적인 사람의 호의적인 질문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을 때 반드시 대답할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베드로의 가르침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온유함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가볍게 답변하지 말고 두려운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소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전하는 소망을 베드로는 강하게 역설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그렇게 어렵고 힘든 시절에 흔들리지 말고 담대함으로 나아가야 할 소망을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라고 말하는 순간, 목이 달아나는 시대에 주저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주라고 선포하라는 역설입니다.
  사람의 육체를 죽이는 일보다 더 잔인한 영혼을 죽이는 시대가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야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타협합니다. 21세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정도의 수준이 훌륭해 하는 자찬으로 자신을 세속적 모드에 공개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은혜와 방법이 있는데 나는 그래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괜찮은 사람이야 식의 궤변으로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주를 고백하는 것은 오늘의 시대에 고난 받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교훈은 예수가 나의 주, 나의 그리스도라는 것이 우리가 대답할 소망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로 하여금 초토화된 교회의 영적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불법의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강력하게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에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절). 선을 행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을 기꺼이 당하며 그 예수가 나의 주시며 나의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소망을 잃지 않는 자입니다. 그의 끝은 바울이 말한 대로 주님께서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