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6.07.03 셀 사역2024-04-22 16:17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지난 6개월 동안 셀 사역을 진행하면서 제일 셀을 잘 섬긴 지체에게 조그마한 선물하고 격려하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복음성가)
●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찬송가 508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 본문 : 베드로전서 3:10-12
1) 하나님의 나라에서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백성이 가져야 할 신앙적 태도를 입술과 관련하여 나누자.
*말을 선용하라는 교훈의 구체적인 행동 강령을 세 가지로 말해 보자. (본문 10절 참고)


  

2) 화평을 이루는 자라는 삶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① 본문 11절을 참고하라.

② 고린도후서 5:18-21절에서 바울이 말한 주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말해보자.  

3) 교훈들을 적용해 보자.
① 내 입술로 살인한 일들이 있으면 돌이켜 회개하자.

② 나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함께 나누며 공유해 보자.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환우들을 위해 (최정희 집사, 안동철 형제, 최순남 권사 등)
② 루존 교회의 이전과 피선교지를 위해
③ 여름 행사들을 위해
④ 부교역자 사택공사와 청빙을 위하여
⑤ 담임목사의 후반기 사역 승리를 위해 중보와 책 출간을 위해 출판사와의 좋은 계약을 위해.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7월 3일 주일 오후 예배 (베드로전서 22번째 강해)
제목: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본문: 베드로전서 3:10-12

  복음의 정수인 요한복음 14:6절의 핵심은 바로 그 앞절인 2-3절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이 예비해 놓으신 그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나무나 큰 위로가 됩니다. 이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반드시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는 나라입니다. 다만 이 하나님의 나라는 사모하는 자들의 것이며, 그 나라에 합당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요한계시록 21:1-2절의 말씀대로 신부가 신랑을 위해 예비한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이 나라는 합당한 자들의 것임을 밝힙니다. 이어지는 계시록 21:7절을 보면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반대로 이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요한계시록 21:8절). 하나님의 나라에 누구든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성경적 예언은 우리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용기와 위로와 소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기대하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는 것을 아주 색다른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본문 10절). 부름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행하여 할 세 가지의 신앙적 덕목이 하나님이 선포하셨던 본질적 사역에는 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결단이 필요하며, 더불어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늘의 위로와 복을 받는 방법임을 상기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과관계 전치사 ‘그러므로’ 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적어도 전술한 세 가지의 삶을 사는 백성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이런 복을 받은 백성이라면 그러므로 더욱 더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또 다른 삶을 목적해야 함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 날을 소망한다면’ 이라는 해석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그래서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따르는 신앙인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설명합니다.

1) 말을 선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본문 10절). 베드로는 입술과 관련하여 세 가지를 열거하면서 까지 성도의 삶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① 혀를 금하라. ② 악한 말을 그치라 ③ 입술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혀를 금하라는 말은 야고보 사도의 말을 참고하면 말을 적게 하라는 것입니다(야고보서 3:1-12절).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이런 말과 혀 놀림의 위험성 때문에 야고보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역설한 것입니다(야고보서 1:19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박노해 시인의 ‘깨끗한 말’ 중에 나오는 시어를 하나 소개합니다. “말의 뿌리에 흙이 묻어 있지 않은 말/ 말의 잎 새에 눈물이 맺혀 있지 않은 말/ 말의 꽃잎에 피가 배어 있지 않은 말을/ 나는 신뢰할 수 없으니” 시인은 오늘 회자되는 말은 너무 많은 데 참 말이 없다는 그래서 참 말이 그리운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의 수단으로 이용하셨던 것이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보기에 좋았던 것은 하나님이 선포하신 말에 숨이 들어가 있어 그 숨이 도달한 일체의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에도 걸작이 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참 아쉽고 유감스러운 것은 태초에는 이렇게 말에 숨이 있는 ‘다바르’가 있었는데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는 ‘다바르’가 상실된 점입니다. 말은 홍수처럼 쏟아지는 데 들을 말이 없다는 점이 슬픕니다. 같은 맥락으로 ‘말은 많은 데 말이 없다. 참 말이 없다.’는 말은 아픔입니다. 그래서 숨이 있는 말이 그립습니다. 말을 선용하라는 것은 숨이 있는 말씀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말이 많은 것은 언제나 실수투성이지만 말씀이 있는 곳에는 실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에게 임하는 분복이 바로 좋은 날을 보는 분복입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은 말을 적게 하되 하고 싶은 말은 말의 숨이 있는 말을 합시다.

2) 화평을 이루는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성경의 선은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화평을 구하고 그것을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화평의 선을 강조하였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로마서 12:18절). 중요한 것은 이 화평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악을 떠날 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악을 떠나면 선을 행합니다. 악을 떠나 선을 행하면 그때야 비로소 화평이 옵니다. 반면 악을 행하는 어떤 공동체나 개인에게 화평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현자가 한 말은 정답입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기 때문이다.”(환경운동가 A J. 무스티 목사)
  베트남 작가인 바오 닌이 쓴 ‘전쟁의 슬픔’에 담긴 글 중에 바오 닌은 전쟁에 참여한 자였기에 그 기막힌 전쟁의 후기를 소설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잊어서는 안 된다. 전쟁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죽은 자와 산 자, 우리 모두의 공동 운명인 것이다.” 미국과 당시 월맹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죽었습니다. 남과 북 상관없이 이 전쟁을 왜 해야 하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정말로 쓸데없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상처는 씻을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은 둘 다 패자인 셈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알기에 칼을 쓰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쓴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면 그 분은 화평을 몸소 실천하신 분입니다. 고린도후서 5:18-21절에서 바울은 주님의 사역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인간과 하나님의 막힌 담을 허물어주신 화목의 메신저였습니다. 화평을 이루어야 하는 성도의 의무는 마땅히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화평을 이룬 자는 반드시 그 날이 좋은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 이런 피스메이커들은 오늘 부른 찬송을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서 부르게 될 것입니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 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본문 12절). 주님은 그 좋은 날을 이렇게 준비하고 계심을 베드로의 입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보고 계심을. 주님의 귀는 의인들이 했던 말에 기울이심을. 그러나 주님의 얼굴은 악을 행한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말을 제어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씀을 숨을 쉰 자들과 악을 버리고 화목하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대로 산 자들은 그 날이 참 좋은 날이 될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하는 두 번째의 편지에서 이렇게 선언하며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경성시켰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