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구주를 생각만 해도 (찬송가 85장) ● 모든 상황 속에서 (ccm)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하나님 생각하기 ● 본문 : 베드로전서 2:18-25 1) 빈 집(마 12:43-45)이 의미하는 바를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 요한복음 10:10b-
● 임영수 목사의 설명: |
2) 베드로 사도가 본문에서 오늘 우리에게 권고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 본문 18절의 의미:
● 본문 19-20절의 의미: |
3)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소유해야 할 신앙의 가치는 무엇이며, 내 삶에 승부수를 걸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적용해 봅시다. ● 본문 19절(‘쉬네이데시스’): ● 내가 승부수를 걸어야 할 것: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독거노인 초청 위로회 사역을 위하여 ② 환우들을 위하여(최정희 집사, 안동철 형제 등등) ③ 담임목사님의 건강과 원활한 책 출간을 위하여 3) 헌금 4) 광고: 5)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2016년 5월 29일 주일 낮 설교 (베드로전서 18번째 강해) 제목: 하나님 생각하기 본문: 베드로전서 2:18-25
박노해 시인의 에세이 ‘다른 길’에 나오는 내용 중 티벳에서 만난 청년인 똥꼬하단과 나눈 대화에서 하루 일당으로 1만원을 받는 청년이었는데 6개월 동안 열심히 일을 한 후 티베트 불교의 성지인 랑무스 사원까지 오체투지 순례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성지순례를 떠나면서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는 내 영혼을 위한 순례를 떠나려고 합니다. 돈은 빛나도 내 마음이 어둠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심신의 극한으로 오체투지 순례를 행하다보면 나를 괴롭히는 욕망의 찌꺼기는 사라지고 어느 순간 그저 텅 빈 몸과 마음이 나를 이끌어 갑니다.” 오체투지(五體投地)란 무릎을 꿇고 두 팔꿈치를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오체를 부처에게 엎드리는 절을 하면서 고도 3,000 미터가 넘는 랑무스까지 절을 하며 나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에 다다르는 수행법입니다. 그런데도 젊은 청년은 그 길을 떠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나의 욕망의 찌꺼기를 완전히 소멸시켜 주는 부처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나에게 일러주는 그 깨달음과 가르침에 그는 집중한 것입니다. 그는 오체투지를 통해 텅 빈 몸과 마음이 나를 이끌어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하자면 똥꼬하단은 텅 빈 몸을 경험한다고 했습니다. 텅 빈 마음이 본인을 이끌어간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가 말한 텅 빈 마음은 법정이 말했던 텅 빈 충만에 가까울 것입니다. 반면 우리 기독교 신앙은 텅 빈 충만이 아니라 그냥 충만함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여정은 비어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b).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빈집은 위험합니다(마 12:43-45절). 더러운 귀신이 한 사람에서 나갔다가 쉴 곳을 찾지 못해서 이전에 내가 나온 집으로 다시 돌아가리라는 마음을 먹고 돌아왔더니 그 집은 비어 있었고 심지어 청소되고 수리까지 되어 있는 최적의 장소임을 알고 일곱 귀신들을 데리고 다시 들어가 그 사람의 상태가 더 악화되었음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빈 집이라는 상징의 언어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 정도임을 모세골 공동체 섬김이인 임영수 목사께서 이렇게 정리하셨습니다. ① 종교적인 외식주의 ② 영적인 한가함 ③ 정신적 공허함입니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재함이라는 점입니다. 종교적인 외식주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은 부재하십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긴장하지 않기에 마땅히 한가함을 즐기고 하나님의 부재함의 결과는 빈 집의 상태입니다. 법정이 말한 텅 빈 충만은 소유욕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롭다는 가르침으로는 시의 적절하지만 기독교적인 신앙의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 신앙의 극치는 “하나님 생각하기에 얻어지는 충만함의 은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본문에서 종으로 있는 자들의 역할과 태도를 적시합니다(본문 18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이 구절만 보면 종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환’의 번역인 헬라어 ‘오이케타이’는 다른 성경에서는 흔히 ‘둘로스’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해서 ‘사환’의 의미는 종입니다. 베드로는 종들에게 행할 항목을 지극히 평범한 내용으로 직설했습니다. ①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라. ②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그렇게 하지 말고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엄격한 잣대로 바라보면 이 베드로의 권고함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존의 종과 상전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재확인한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경적인 권고는 이전에 바울도 명령한 내용이었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에베소서 6:5절),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22-23절). 여기까지는 바울이나 베드로나 크게 다르지 않은 주후 1세기의 상황에 순응하라는 정도의 가르침으로 종들에 대한 권고를 마감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19-20절 말씀은 깊이 음미해야 할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했습니다.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 죄로 인하여 매를 맞는 것은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임을 베드로는 분명히 합니다. 누가복음 17:9절을 보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종은 시킨 일을 하는 자이지 시킨 일을 했다고 사례를 받는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종이 죄를 범했습니다. 죄를 범한 종은 매를 맞는 것이 당연하고 매를 맞았다고 칭찬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베드로의 오늘 본문에서의 선언은 냉정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사무적이고, 딱딱해 보이는 베드로가 그런데 예외 조항을 두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합니다. 그 예외 조항은 두 가지의 경우입니다.
1)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였음에도 슬픔을 참는 경우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을 위한 싸움을 해서 하나님을 반하는 자들을 척결한 것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세벨의 분노를 사서 쫓기는 신세가 되어 호렙산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신세가 너무 처량해서 엘리야는 참지 않고 그 화를 하나님께 돌립니다(열왕기상 19:14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또한 민수기 20장을 보면, 므리바에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먹을 것이 없고 물이 없다고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첫 번째 불평이라면 모세도 이해했을 것이나 이 불평은 지난 38년 동안 광야의 곳곳에서 자행되던 불만이었습니다. 모세는 회막 문에 들어가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임하였고 또 다시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할 것임을 시사하셨습니다(민수기 20:10-11).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성경이 주는 메시지는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경우는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형극 앞에서 베드로가 선언하고 있는 것은 슬픔을 참으면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2) 선을 행하고도 고난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특별히 이 경우는 주님과 관계되어 등장한 경우가 많습니다. 300 데나리온의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향해 유다는 이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팔아 그들을 구제할 것이지 낭비했다고 공격하며 그녀를 비난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바울은 심각한 핍박을 받아 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런 경우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역설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는 앞서 언급한 두 경우의 결과를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찬하며 본문을 마무리합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신앙의 노정에서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당할 때와 선을 행하였는데도 고난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어떻게 이것을 참을 수 있는가의 해답이 오늘 본문 19절에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정답은 하나님 생각하기입니다. ‘쉬네이데시스’의 번역인 ‘생각함으로’는 문자적으로 ‘인식하기’, ‘의식하기’입니다. 주님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자는 애매한 고난을 참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자는 선을 행하였으니 고난이 그 대가로 돌아와도 인내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가능함을 이어지는 본문 21-24절에서 제시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이 먼저 그 일을 당하셨으며, 주님이 먼저 억울한 일을 당하셨지만 인내함으로 참으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에 개의치 않으신 주님이 먼저 이 일을 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승부수는 주님 생각하기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에 당하는 이모저모의 고난들을 이겨냅시다. 바울이 이것을 알았기에 이렇게 일찍이 갈파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9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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