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설교하는 사람이다. 존 스토트가 설교하는 이들에게 전했던 사자후를 하나 살펴보자. “설교는 편안한 자들을 불편하게 하고, 불편한 자들은 편안하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실로 지난한 작업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운명적으로 목사는 설교를 해내야 하는 존재다. 그러기에 필수적인 요소가 목사에게 있어야 한다. 독서를 통한 영적 내공이 필요하다. 주어진 시간을 선용하여 벼락과 천둥소리를 내는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목사에게 있어서 책 읽기는 설교를 견고하게 만들고자 하는 일체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부담이자 고통이지만 이 터널을 잘 통과해야 한다. 독서 터널을 통과하기 위한 길을 내는 길라잡이다. 2023년에 기도원에 올라가서 독서 스케줄을 짜면서 제일 먼저 우선순위 리스트에 올린 작업이 시 읽기였다. 나는 시인을 천재라고 정의한다. 시 없이 세상은 존재할까? 라고 묻는다면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답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아!, 목사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 나는 나희덕 시인을 좋아한다. 그녀의 시집을 읽을 때마다 황홀해진다. 크리스천 시인이기에 그렇겠지만 좀처럼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시에서 은혜(?)를 받는다. 나는 MBTI 가 ISTJ이다. 아주 오래전에 검사한 성향인데 다시 컨펌하지 않아도 나를 기막히게 발가벗긴 결과물이기에 단 한 번도 재 검사를 해 본 적이 없다. 왠지 나희덕 시인의 성향이 나하고 비슷할 것 같다는 생뚱맞은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그녀의 시에 나타난 수없이 많은 메타포에서 그것이 발견되기에 말이다. “神도 이렇게 들킬 때가 있으니!” (『어두워진다는 것』의 上弦에서 발췌) 시인이 새벽녘에 앉은 능선에 걸려 있는 희미한 상현달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읊조렸다. 세상에나 신만이 갖고 있는 신비스러운 수줍음을 상현달이라고 표현한 이가 시인 말고 또 누가 있던 말인가! 년 초에 김상욱을 만났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으로 만났다. 워낙 유명 인사이기에 그의 명성은 익히 일고 있지만, 책과 만나면서 자연과학자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의 레벨인지를 체휼하면서 경이로웠다. 공교롭게 같은 달, 유시민 작가가 무척 공을 들인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병행해 읽었다. 유 작가의 도전은 실로 엄청난 도전이었음을 작가의 책을 섭렵하며 경험했다. 하지만 나는 왜 문과 남자가 과학 남자에게 대들지 말아야 하는가를 두 책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consilience)을 이야기했지만, 전공한 것 외, 다른 학문적 기웃거림은 극히 조심해야 하는 영역임을 각인했다. 더불어 문과적인 소질로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 감사했다. 절친 차준희 교수가 『예언자들』을 읽고 나서 유대교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에게서 많은 공부를 했다고 술회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개신교 구약 성서학자인 친구는 비판적 성찰로 헤셀에게 다가가야 함을 내게 코칭했다. 친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십분 이해하고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은 내게 너무 소중한 선생님이다. 한국어판으로 번역된 헤셀의 작품은 내 기억으로 거의 다 섭렵했다. 읽을 때마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은 유대교 선생에게 고개를 숙인다. 이렇게 개진하면 너무 설레발일까? 헤셀을 읽지 않고서 유대교와 삶의 철학을 논하지 말라. 헤셀이 말한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를 교리상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다.” (『사람을 찾는 하나님』, 한국기독교연구소, 이현주역, 264쪽) 헤셀에게는 종교적 사유가 천박하지 않다. 그에게 종교는 철학이요, 삶이요, 행동이요, 현재와 미래를 잇대는 가교다. 목사는 설교를 통해 공동체 지체들에게 이 가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자다. 어찌 헤셀을 간과할 수 있겠는가! 정용섭 선배를 만난 지가 아주 오래 전이다. 선배의 전공인 판넨베르크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시기가 네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선배가 지적한 한국교회의 대표적 설교자 비평을 밑줄 치며 읽었다. 아들이 밑줄 친 세 권을 앗아갔다. 설교 준비할 때 선배의 책이 필요했는데 아들에게 빼앗겨 거금을 주고 다시 구입한 수고가 아까와 다시 열었다. 현장에서 설교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은 읽으면 뼈를 깎아야 하는 쓴소리가 곳곳에 담겨 있지만, 외면하지 말고 반면 혹은 진면 교사로 삼아야 하는 금언들이 지천이다. 아프면 아플수록 그만큼 희망이 있다는 방증이리라 믿고 독서의 끈을 이어갔으면 하는 양서다. 섬기는 교회, 공 예배 (주일, 수요 예배) 시간에 요한 공동체를 중심으로 집필된 복음서와 서신 서 강해가 한참이다. 6개월 전 즈음에 강해 사역을 미리 준비했다. 설교자가 감당해야 하는 강해 설교의 부담감은 이론으로 형용 불가다. 하지만 질이 떨어지지 않는 강해 설교는 준비한 만큼 결과를 얻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기존의 해 왔던 방식으로 강해 자료들을 모아 독서에 최선을 다했다. 조심스럽지만 팁 하나, 열자. 도올 김용옥 박사의 『요한복음 강해』에 색안경끼자 말고 도전해 보시라. 후회하지 않는 공부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리처드 보컴의 『요한복음 새롭게 보기』는 수준 높은 양서이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을 읽다가 알고리즘 형식으로 소개된 800권의 참고문헌들을 보았다. 그 중, 100권은 이미 나도 섭렵했지만 700권은 거대한 담처럼 느껴졌다. 대중 평론가의 지적 수준이 이 정도인데 목사가 그들에게 뒤지면 되겠나 싶어 매달 도전하고 있다. 8, 9월은 그렇게 독서하기에 발을 디뎠다. 최재천 교수 이야기도 화두로 던지고 싶다. 흔히 독서 영역에서 흔히 ‘넘사벽’으로 알려진 최재천 교수의 작품인 『숙론』, 안희경 작가와 공동으로 낸 인터뷰 작품 『최재천의 공부』는 현장 목회자라면 2024년이 다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필독 도서로 추천하고 싶은 양서다. 특히 『숙론』에 전개된 이슈들에 대해 저자는 국회의원들에게 읽히고 싶은 책이라고 밝혔지만, 나는 목사인 우리 동역자들이 숙독해야 하는 도서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 리더십을 세우고, 위임받은 양들을 이끌어야 하는 목사들이 지녀야 할 청종의 의미를 상투적이지 않은 글감과 사례를 통해 도전해 준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아야 할 아픈 한국교회의 중심에는 목사들이 있기에 말이다. 김기석 목사는 내겐 소중한 글벗이다. 현직에서 물러난 선배가 너무 부럽다. 더불어 선배에게 더 치열하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이 내겐 있다. 그에게 가까이 하면 손해 보지 않는다. 목사로 살아가는 내 자아와 정체성이 그와 가까이 하면 더 견고해진다. 선배가 작년과 올해에 집필한 책을 읽다가 끝내는 훌쩍거리기까지 했다. 그가 강단에서 내려온 것이 부럽지만, 내게는 떨어질 부스러기를 주울 수 있는 길이 좁아져 못내 아쉽다. 선배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엘리위젤의 『나이트』를 읽었을 때,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만났을 때 소름 끼치도록 좌절하고 끝내는 소리를 쳤지만, 장 아메리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토록 지독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리 기저 깊은 곳에 악마성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악마성처럼 절망적인 악함은 해석이 안 된다. 해석이 안 되는 악마성에 대한 아메리의 절규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늦깎이로 만난 『죄와 속죄의 저편』은 매우 엄중했다. 나는 극단을 선호하지 않는다. 극단을 선호하지 않으니, 극단을 이념화한 극단주의(extremism)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제임스 콘이 말한 신학적 담론에 대한 그의 함의를 100% 동의하거나 수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콘이 일갈한 보수적 신학이 갖고 있는 폐쇄성에 대해서는 복음주의권에서 목사로 사역하는 나에게 다시 눈을 크게 뜨게 한 지평적 스펙트럼으로 받아들였다. 블랙 맨이었기에 당연한 처사이겠지만, 그가 강력하게 성토한 크리스텐돔 체계 안에 있는 종교인들이 자행한 인종차별주의라는 죄악질에 대해 목사로서 같은 비평적 색깔을 가져야 함을 뼈저리게 공부하게 한 콘에게 지지를 표했다. 물론 그가 갖고 있는 십자가 신학에 대한 태도는 그를 일견 지지하지만 결국은 그와 같이 갈 수 없는 결의 극단임을 아이러니하지만 깨닫게 해준 양가감정도 콘에게서 배웠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언제나 같이 갈 글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주님이 오라 하실 때까지 이 글 여행만큼은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을 주군께서 주셨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