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31일 송구 예배 설교
본문: 말라기 4:1-3
본문: 잊지 마십시다.
서론)
12월 31일을 맞이한 오늘 두 단어가 기억의 언저리에서 떠오릅니다.
기적과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의 혜택자는 우리 세인 교회 교우 전체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송구 예배는 더 더욱 절절하고 그 깊이가 있습니다.
송구 예배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아픈 부위들을 도려내는 치유의 말씀이 되고, 더불어 은혜라는 감동이 임하는 말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3개월에 한 번씩 비타민 D 주사를 맞습니다.
나이에 비해 비타민 D 수치가 너무 낮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비타민 D 수치가 낮은 이유는 한 가지로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원인이 있는데 특히 한국 사람에게 가장 흔한 이유는 햇볕을 쬐지 않아 발생하는 경우가 제일 많다는 이야기를 의시에게 들었습니다.
비타민 D가 부족하면 각종 질병에 노출될 수 있기에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충고를 의사는 아끼지 않았습니다.
해서 이제 비타민 D 주사를 맞는 것은 물론, 가능하면 밖으로 나가 빛을 맞는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겨울이 되기 전에 3층 계단에 있었던 화분들을 사택으로 들여 놓았습니다.
일전에 시기를 놓쳐서 아까운 식물들을 죽인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화분을 안방으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창문 커튼을 치우고 화분에 있는 식물들에게 마음껏 창살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게 합니다.
날마다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다육이를 비롯한 식물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는 게 근래 또 보람입니다.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놈들을 보면 얼마나 대견한지 모릅니다.
살아 있는 생물은 반드시 생장 조건 중에 하나가 햇빛을 보는 것입니다.
보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송구예배를 준비하면서 오늘 본문 구절이 떠오른 것은 2020년을 뒤돌아보면서 영적으로 갈가리 찢어진 우리들의 마음이 혹여 하나님이 비추시는 빛을 보지 못해서는 아닐까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도달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은 대단히 중요한 예언이 기록된 메시지입니다.
본론)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공의로운 해에서 떠오르는 광선을 맞으라는 권면입니다.
이 광선은 치료하는 능력이 있다고 예언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익숙하게 잘 알고 있습니다.
해서 많이 인용하며 은혜를 받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어느 때 많이 인용합니까?
환자를 심방할 때입니다.
틀린 본문은 아니지만 오늘 읽은 본문 2절은 단순히 환자에게만 적용하는 그런 좁은 교훈이 아닙니다.
본문에 기록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겠다고 예고된 말라기 예언서는 이 보다도 훨씬 깊은 영적 교훈을 담지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해서 오늘 송구예배를 통해 함께 나누어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교우들에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말라기서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본문 이해를 위해서는 필수적입니다.
말라기서의 시대적 배경은 정경 안에서 어느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 자세히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난처함 때문에 말라기의 시대적 정황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5가지의 간접적인 선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한영신대 정석규 교수의 책에 실린 5가지 설명을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정석규, “구조로 읽는 말라기”, 프리칭 아카데미, 18-19)
① 정경의 위치가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에 위치해 있다는 점은 포로후기라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학개와 스가랴 예언서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점을 알려준다
② 에돔에 대한 멸망이 1:3-5절에 기록되어 있다. 에돔은 주전 587년 유다가 멸망을 당할 때 바벨론을 도와주었는데, 이렇게 친척을 배신한 에돔 역시 이후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다. 그러므로 말라기는 바벨론 포로 후기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적 정황을 기반으로 한다.
③ ‘페하트’(총독)라는 페르시아어가 말라기서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정경 안에 이 단어가 삽입되었다면 특히 유다를 땅을 바벨론으로부터 물려받아 이어 복속했던 주전 538년 이후의 바사 시대를 배경으로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④ 말라기 안에는 엉망진창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성전 제의가 설명되고 있다. 즉 성전 제의의 담론이 있다면 이 책은 제 2성전 재건 시기인 주전 515년 이후 작품일 가능성이 많다.
⑤ 말라기서와 느헤미야/에스라서의 연관성이다. 안식일 준수, 혼합주의의 경계, 십일조 문제 등등의 밀접 교훈을 전제할 때 제 2성전이 재건된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유대로 돌아와 개혁 운동을 펼쳤을 주전 450년 이전까지의 시대적 정황을 깔고 있는 예언서가 바로 말라기서일 것이다.
종합하면 말라기의 연대적 정황은 이렇습니다.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와 선포에 따라 열심을 다해 성전 재건을 완성했는데(주전 515년), 이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좌절, 분노, 배신감 등등으로 인해 유대 신앙공동체는 급격히 무너져가고 있던 시대였던 515-450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열왕국 시대처럼 이스라엘 공동체가 영적으로 급격히 몰락되던 시기였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가 더 위험한 이유는 이들은 한 차례 말도 안 되는 다윗왕조의 멸망을 쓰라리게 경험한 이후 세대들의 무너짐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신앙에 대하여 회의를 갖기 시작했고, 다윗의 언약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질문하며 하나님께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하나님이 있기는 한 것인가? 도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적 붕괴를 가져오고 있는 시대적인 정황이 말라기 예언서에는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말리기 시대에 살고 있었던 자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대들었습니까?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1:6절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7절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2:17절입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3:13절입니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참담했던 이 시대의 영적 기상도입니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말라기 시대의 유다 공동체는 어디에서부터 손을 써야할지를 모르는 지경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 저항하던 백성들은 거칠게 하나님께 대든 것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나님께 시위합니다.
제물들을 엉망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보란 듯이 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짓들을 몰라서 행한 것이 아니라 고의로 범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증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 역시 가장 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으로 경고하십니다.
말라기 1:8-10절은 하나님과 유다와의 대립구도의 각이 극이었음을 알려줍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여기까지만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립의 구도는 강대강인 것처첨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분노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분노하셨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이 갖고 계셨던 계획을 본문에서 선언하십니다.다시 본문 2절을 읽겠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라기 예언이 선포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 신앙에서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해서 이들은 당시 바사 제국 하에서 편만하게 퍼져 있는 태양신들을 섬기는 우상에 함몰되어 있었습니다.
바사에서는 태양을 아후라마즈다라고 부르는 신으로 섬겼습니다.
애굽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태양을 날개가 달린 신으로 추앙했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예언자는 이 두 가지의 우상 숭배를 일거에 날리는 예언을 이렇게 남긴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에게만 공의로운 해가 떠오른다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만군의 야웨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가 믿고 있는 태양은 헛것이라는 정면 돌파를 예언자는 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 태양에서 치료하는 광선이 비춰진다고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마르페 베크나페하’ 즉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를 원어에 입각하여 직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날개 아래에서 치료함으로서”(with healing in its wings.)
왜 이렇게 번역을 할 수 있는가 하면 ‘광선’이라는 단어가 ‘날개’라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구약학자 매튜스(Mattews)는 2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참된 경배자들인 너희에게 승리의 태양이 그 치료하는 날개와 함께 떠오르고, 너희는 자유롭게 되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면서 놀 것이다.” (랄프 스미스. “말라기 주석-WBC 32”, 솔로몬 간,481.)
그렇다면 2절을 이렇게 신약적인 의미를 넣어 오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인류의 빛 되시며 어둠을 몰아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혜가 임하여 우리들의 답답한 것을 해결해 주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시며 하나님의 그 큰 날개 아래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셔서 마치 우리들은 외양간의 구속된 울타리 안에서 해방된 송아지처럼 참된 자유와 기쁨을 맛보게 되리라”
그렇습니다.
이 해석이 2021년에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한 획도 틀림없이 임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구절에 도착했습니다.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습니까?
그러나 조금만 더 견디십시다.
예언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면서 희망을 거침없이 전합니다.
‘내가 정한 날’이 있다고 야웨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이 되면 악인들을 너희 발바닥 밑에 있는 재와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궁극적 승리가 임할 것을 강력하게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송구 예배의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아주 가끔 2020년을 보내면서 흔들릴 때가 있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목사인 저도 이렇게 흔들렸는데 여러분이야 오죽하겠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유혹을 받았습니다.
시편 42:2-3절입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아마도 2020년, 우리 중에 상당수는 시편 42편의 시인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레퍼토리 때문에 힘들었을 것입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비아냥거릴 때마다.
마음이 상하고 상해 썩어 몽글어졌을 것입니다.
승려 혜민이 여론의 질타를 받는 기사가 실렸을 때였습니다.
댓글 기사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차라리, 먹사하지 그랬니?”
참담했습니다.
세속의 공격과 삿대질이 이제는 그 도를 넘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런 공격을 당하면 분노가 극에 달해 견디지를 못하겠지만 그럴 때 저는 위로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말씀에서 시인이 이렇게 공격을 당했을 때 이렇게 노래했던 바로 그 말씀입니다.
시편 42:4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여류 작가인 레베카 솔닛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투항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마저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레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창비, 174.)
코로나 19의 괴물에 투항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코로나 19보다 크십니다.
세상의 공격에 투항하거나 주눅 들지 맙시다.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는 분입니다.
잊지 마십시다.
2021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하실 것을.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