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영상

제목누군가 나를 위하여2024-03-13 18:26
작성자 Level 10


기본 정보

설교제목
: 누군가 나를 위하여
분 류
: 절기 예배
설교자
: 이강덕 목사
설교일
: 2019년 12월 25일
성경본문
: 누가복음 1:26-38

본문내용

 

2019년 12월 25일 성탄절 예배 설교

 

제목누군가 나를 위하여

본문누가복음 1:26-38

 

서론)

 

주일이 되면 아내가 제일 먼저 2층 유아 예배실에 내려와 방에 설치된 온돌 필름에 스위치를 올립니다.

유아들과 엄마들이 추운 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몇 주 전아내에게 일이 있어서 이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그 주일에 1부 예배에 참석했던 유아의 부모들이 유아 예배실에 들어갔다가 추워서 다시 본당으로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다가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① 유아 부모들이 입장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교회에 있는 유급 사역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지월급을 받는 사람들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

② 그러나 또 하나의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내가 그 동안 따뜻하게 유아실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세밀하게 예배를 돕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는 감사의 소회 말입니다.

우리는 아주 가끔나에게 주어지는 일련의 안락 함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왜 착각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주어진 안락함은 당연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안락함을 맛보기까지는 그 누군가의 섬김 혹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고 나면 주일 결석자에게 설교 동영상을 개인 SNS 상으로 보내도록 부 사역자에게 지시했습니다.

이모저모의 일로 인해 주일을 범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담임목사의 주일 설교를 들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에 교회에서 행하는 배려입니다.

한 편의 동영상 설교가 교우들에게 들어가기까지는 토요일에 담임목사의 설교 원고가 탈고되면 그 원고를 가지고 영상실 컴퓨터에 막 세팅 작업의 수고를 거치고이어 영상부원이 제작한 설교 동영상을 교회 홈페이지에 코딩하여 링크한 뒤에결석자를 파악하고 그 결석자에게 개인적으로 송출하는 수고가 전제합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두 학기를 대학원에서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목사 후보생들에게 정글 같은 현장에 나와 당황하지 않도록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강의했습니다.

두 학기 강의를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강의보다 두 번째 강의가 훨씬 수월했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전 학기 자료가 그 기초를 이루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부족했던 강의 내용을 감안해서 보충했고더불어 첫 학기에 유감스러웠던 부분은 최선을 다해 보강했기에 첫 학기보다는 두 번째 학기가 수월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정년 교수 트랙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한 강의를 맡은 강사이기에 느끼는 무게감이 조금은 다를 수 있겠지만제 개인의 생각으로는 교수가 목사보다는 부담감에 있어서 한 결 부드럽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매 학기마다 조금의 수정과 보강을 가하면 한 학기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 원고의 내용이 한 줄 같아도 표절했다고 운운할 수 있고공부를 안 하는 목사로 낙인찍힐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매 번 했던 설교를 수없이 반복한다고 실력 없는 목사로 매도당하도 십상입니다.

그래서 매 주마다 설교 준비를 홍역이고산고입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 신자들은 수많은 목회자들의 피나는 수고와 산고 끝에 탄생한 꼴을 먹으며 자란 것입니다.

그 누군가의 수고는 절대로 당연한 것이 아닌데 어떤 때는 그 수고가 마땅히 나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당연시하는 것은 결코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임하는 은혜와 감동의 총체는 그 누군가의 치열한 수고와 노력 속에 배태된 것임을.

그런데 이런 수고와 노력과 섬김과 희생을 전제한 영적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어 오늘 성탄절 절기에 이 은혜를 곱씹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소위 많은 학자들이 수태 고지라는 제목을 붙인 텍스트입니다.

나사렛에서 평범한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이제 얼마 있으면 결혼을 하게 될 정혼의 상태인 처녀 마리아에게 도무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납득하거나 해석할 수 없는 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보고한 기사입니다.

본문 31절입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영국 브리스톨 트리니티 칼리지의 존 놀랜드 교수는 1:21절에 대한 신약적인 주석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노년에 수태하여 임신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말하지만처녀가 임신하는 일을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일어난 적이 없는 최초의 일이다.” (WBC. 누가복음 주석)

놀랜드 교수의 말대로 분명한 것은 마리아에게 고지된 수태 고지의 메시지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교회사의 역사 가운데 부활사건과 함께 마리아의 수태 고지처럼 민감하게 논쟁의 여지가 많았던 신학적 논제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가장 기독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주장은 아마도 예수의 사생아 설 일 것입니다.

2세기 헬라 철학자인 켈수스에 의해 주창된 로마의 군인인 판테라와 마리아가 불륜을 저질러서 낳은 아들이 예수라는 공격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동정녀 탄생을 성경의 저자 특히 마태와 누가가 도입하여 동정녀 탄생을 만들어냈다는 주장까지 너무 많은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비평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성탄 설교라는 제한된 시간과 지면으로 인하여 이 내용을 여러 교우들에게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신학적 내용들을 소그룹 사역에서 함께 나눌 것을 약속하며 열거하지 않겠지만 오늘 우리들이 생각하고 인정해야 하는 한 가지의 사실을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대전신학대학교 허호익 교수의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예수에 대한 꾸며진 전설들은 수 백 년 혹은 수 천 년의 구전을 거쳐 비교적 후대에 문서로 기록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이에 비해 예수와 관한 최초의 전기는 예수가 죽은 지 30년 즈음 되자마자 마가복음으로 기록되었다예수의 성령 잉태와 동정녀 탄생에 관해서는 예수가 죽은 지 40년도 못되어 누가와 마태에 의해 공개적인 문서로 기록되었다그것보다 더 논쟁이 된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최초 기록 공개는 예수가 죽은 지 20년 만에 기록된 것이므로 그 속보성과 정확성은 다른 어떤 고대 문서와 비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허호익, “예수 그리스도(), 동연간, pp,197-198.)

무슨 말입니까?

성경에서 증언한 동정녀 탄생의 메시지는 역사적으로 앞선 증언이라는 권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신학자의 주장을 한 가지의 예로 들었지만 예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역사적 탄생의 사실들을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팩트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성경이 내증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날벼락과도 같은 가브리엘 천사의 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두려워하며 천사에게 제일 먼저 질문한 내용은 어떻게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자연적인 이치로 남자를 알아야 잉태가 가능한 일인데 그렇지 못한 나에게 어떻게 이 일이 물리적으로 가능한가는 물었습니다.

본문 1:35절을 읽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동정녀 탄생에 대한 증거는 성령이 행하신 일이라는 증거였습니다.

성령이 일하신 증거의 또 하나의 증언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본문 36절도 함께 나누겠습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세례 요한의 잉태는 기적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의 잉태 전언은 놀랜드 박사의 말대로 기적이었습니다.

가임의 생리적 현상이 완전히 끝난 여성에게 잉태는 역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한 결 더 높은 차원의 초월적인 현상이 마리아에게 가능했던 이유는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의학적인 지식에 대하여 문외한이기에 더 생리학적인 차원에서 처녀의 임신에 대하여 더 이상 논하기를 중단하려고 합니다.

다만 오늘 담임목사가 성탄의 아침에 교우들과 나누려는 스펙트럼은 다른 데에 있음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 마지막절인 37-38절을 읽겠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 구절을 액면 그대로 적용하면 다가오는 감동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신앙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를 보게 되는 측면입니다.

물론입니다.

대단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2019년 성탄의 아침에 제가 교우들과 함께 나누려는 교훈의 실체는 바로 이것입니다.

 

※ 나에게 은혜가 임하기까지는 누군가의 절박한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교훈입니다.

 

성탄절의 주인은 아기 예수님입니다.

흔들지 말아야 기초이며 본질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주연이 아닌 조연의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성탄절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리아라는 처녀의 철저한 희생의 각오가 전제했다는 것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의 결혼 과정은 반드시 정혼이라는 과정을 거칩니다.

12-14세에 가문끼리이든 아니면 개인의 관계이든 상관없이 정혼이라는 중간시기를 거친 후에 결혼에 임하게 되는 것이 유대인의 결혼과정입니다.

만에 하나 정혼의 과정에 약혼자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것은 파혼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여성 측에서는 잘못하면 유대의 율법에 기인할 때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두려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에서 보이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네게’ 라는 단어입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임신에 대한 수용을 네게’ 즉 마리아 자신에게 적용한 고백은 마치 부림절이 있게 했던 구약의 에스더가 고백한 죽으면 죽겠습니다.’ 와 같은 심정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다니엘 6장을 읽다보면 가슴 뭉클한 감동이 전해지는 구절을 발견합니다.

이 장은 우리들이 잘 아는 것처럼 이방인이었던 다니엘에 메대 제국의 3명의 총리로 등극을 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혜로 앞서나가자 메대 출신의 다른 총리들과 또 다른 고관들의 시기 질투로 인해 그들이 다니엘을 잡기 위한 덫을 놓은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30일 동안 바사 땅에서는 다리오외의 어떤 다른 존재에게 절하고 경배를 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자는 덫에 다니엘이 걸리고 그를 총애하던 다리오도 어쩔 수 없이 함께 걸리는 기사를 소개합니다.

법의 권위로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경배한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다리오의 행보를 다니엘서 기자가 이렇게 보고합니다.

다니엘 6:16-18절입니다.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어귀를 막으매 왕이 그의 도장과 귀족들의 도장으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에 대한 조치를 고치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더라 왕이 궁에 돌아가서는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그 앞에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를 마다하니라

우리는 이 구절 다음에 이어지는 다니엘 6:19절 이하에서 하나님이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보호하셨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주목해야 하는 바로 6:16-18절에 대해서는 소홀히 여기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레이스 장로교회를 시무하는 브라이언 채플 목사는 불의한 시대순결한 정의라는 책에서 이렇게 해석한 글을 읽었습니다.

다니엘은 이방 땅에서 거의 1세기가 되는 시간을 사역해서 어떤 결실을 거두었는가거의 없었다왕의 모든 관리가 다니엘에게 등을 돌렸고다리오 왕 역시 자신을 신성시하고 숭배하자는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다.”(브라이언 채플, “불의한 시대순결한 정의”,성서유니온 간,p,213)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바벨론의 벧사살이 비극적인 심판을 받는 것을 눈으로 보았던 세대였지만 이후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외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방신들에게 붙들려 있는 바사 메대의 형극을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가시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절망적일 수 있는 영적 상태가 다니엘 6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저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정치권력에 눈이 멀었기에 어쩔 수 없는 덫에 걸려 있었던 다리오가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진 후에 궁에 돌아가서는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그 앞에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를 마다했다는 이상한 여운을 남기고 있는 글을 보면서 이런 소회에 젖어 봅니다.

다니엘의 수고는 결코 헛된 수고가 아니었다는.

누군가의 희생과 섬김 그리고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대로 살기는 적어도 그것을 보고 있는 어떤 존재와 타자에게 은혜로 열매 맺는 감동이 있다고 말입니다.

마리아가 고백했던 희생의 믿음이 전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의 성육신을 이루는 통로가 되었고 결국 그 희생과 섬김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이끈 감동의 견인차가 된 것이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에게 한 달 전에 기도 부탁을 받았습니다.

때를 맞추어 기도했습니다.

중요한 기도 제목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제목이기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정글 같은 목회 현장이 그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최선을 다한 영적 집중력을 동원하며 중보하고 있습니다.

?

제가 엎드리는 그 엎드림 때문에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응답되는 것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이라는 계절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한 평강과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아기 예수의 탄생을 위해서 육신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는 죽음을 각오하고 주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려면 그리고 그 은혜가 타자에게 임하기를 기대한다면 내 수고가 필요합니다.

내 헌신이 필요합니다.

내 섬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성탄은 어떤 의미로 진정한 성탄일 수 없습니다.

 

결론)

 

이제 너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몇 주 전에 지체와 우연히 SNS 상에서 채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임직의 일로 내용을 전하다가 잘못된 문자를 전송해서 그 내용을 바로 잡기 위한 메시지를 보냈는데 지체에게 이런 글이 도착했습니다.

목사님저는 목사님과 사모님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조금 더 세밀하게 중보 하겠습니다.”

뜻밖의 따뜻한 메시지를 받고 마음이 쿵했습니다.

해서 이렇게 지체에게 답신을 보냈습니다.

지체님저는 지체님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저도 지속해서 중보 하겠습니다.”

메시지를 나누다가 이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아프지 않은 진정성이 존재할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떤 유행가 가수가 불렀던 노래의 가사처럼

아픈 큼 성숙해지는 것이 인간사일 텐데하물며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이 주님의 아파하심 그리고 그 분이 이 땅에 오시기까지의 수고와 아픔을 인지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를 신앙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의 신성함을 꿰뚫어 보는 소박한 통찰이 없다면 정교한 사변이라는 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헤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한국기독교연구소,p,31)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2019년 성탄절은 나에게 은혜가 오기까지 존재해야만 했던 그 누군가의 수고와 헌신을 삶으로 인정하고 통찰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기를 바라며절대로 자신의 거짓된 창문을 통해 만들어내는 천박한 종교인들이 되지 않기를 아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해 봅니다.

 

성탄의 아침이지만 이 찬양을 하나님께 드려 보십시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약함을

사랑으로 인도 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이전채널고정 Level 102024-03-13
-누군가 나를 위하여 Level 102024-03-13
다음진짜입니까? Level 102024-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