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1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9) 제목: 학생 정신 본문: 요한복음 1:35-42 서론) “목사는 공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공부는 다 소용없다고,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처럼 무책임한 말이 없다. 목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욕정에 휘둘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옛사람은 ‘인간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지키려는 마음은 극히 희미한 것이니 정신 차리고 오직 하나로 모아, 그 핵심을 꼭 붙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핵심을 붙들기 위해서는 늘 인식에의 목마름을 품고 살아야 한다. 시대정신을 분별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 위태롭게 허둥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삶의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도록 만드는 시대정신과 맞서기 위해서는 지향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사가 공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공부하지 않는 목사는 사람들을 오도하기 쉽다. 스스로 길을 잃은 목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이강덕 목사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목회자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을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 말하지만, 또 그 말이 은근한 자부심을 숨기기 위한 위장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는 학생 정신에 충만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목사다운 목사이다. 눈 밝은 그가 내 책 열세 권을 읽고 서평을 적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왠지 나의 허술하고 부실한 사유 세계를 간파했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자면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조금 안 후에 그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강덕 목사는 그렇지 않다. 그는 일종의 전작주의자인 모양이다. 이런 사람은 말리기 어렵다. 책 말미에 덧붙인 참고도서 목록만 봐도 얼마나 치열한 인식욕의 소유자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인식욕이 아니다. 그는 참의 길을 맹렬하게 탐색하는 진리의 순례자이다. 그가 열어가는 인식의 세계를 통해 많은 이들이 낯설지만, 황홀한 세상과 만나 현실의 인력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멋진 글벗과 만났다는 사실이 참 즐겁다.” (이강덕, 『시골 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 동연, 2018, 7〜8쪽) 두 번째 집필 도서인 『시골 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 출간할 때 김기석 목사가 보내 준 추천의 글에 담긴 내용의 일부입니다. 이 글이 감사했던 이유는 부족한 사람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해 준 감사 때문입니다. 학생 정신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해 준 것이 참 고마웠습니다. 제게는 너무 큰 격려요 응원이었음을 오롯이 기억합니다. 제가 달려온 목회의 뒤안길에서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초점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방향성이 있습니다. 지성적 영성을 상실하지 않는 목사입니다. 교우들이 제게 많이 들었던 멘트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러운 대목이지만, 뭐 그렇게 인식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성적 영성은 누구에게나 함부로 붙일 수 있는 문구가 아닙니다. 지성은 공부하는 자가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일이며, 영성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이 온전하지 못한 자에게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이해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적 영성은 학생 정신이 없는 이에게는 아예 관심의 대상이 아니거나 이해 불가의 고유한 영역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정신이 없는 자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천박함입니다. 영혼이 실리지 않은 삶이 얼마나 가볍고 어리석은지 재삼, 재사 강조하지 않아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천박한 삶을 살아가는 자는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감정적으로 첫 번째 떠오르는 생각이 정답이라고 확신하고 그 어리석음을 믿음으로 착각하며 행동하는 우를 수없이 범합니다. 하지만 학생 정신이 있는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보다는 의미에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의미에 관심을 둔 이들은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공부하며 생각하며 삽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입니다. 이것보다 예수 믿는 이들에게 더 큰 의미는 없습니다. 최고의 의미, 즉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묵상하고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최고의 학생 정신입니다. 본론)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애논 근처에서 세례를 베풀던 세례자 요한에게 많은 사람들이 영적 감동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기 수하로 들어온 이들을 향해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님을 선포했고 불과 얼마 전에 자기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놀라운 자기 정체성 지키기입니다. 애논 근처에서 활동하며 또 다른 세례를 베풀던 예수께서 주변 지역을 거니는 것을 본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보고 다시 또 이렇게 선언합니다. 본문 35〜36절입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언하는 세례자 요한 옆에는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수하에 들어온 두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고 보고합니다. 두 사람 중, 한 명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40절 본문은 그가 안드레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하지만 또 한 명의 제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익명의 제자로 본문에 등장합니다. 본문 37절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시사합니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안드레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익명의 제자는 스승인 세례자 요한이 두 번(29절, 36절)에 걸쳐 선언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예수에게로 제자의 동선을 바꾸기로 하고 예수에게로 떠납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하에서 예수의 수하로 갈아타기를 한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대단히 위험한 일이자, 세례자 요한을 배신한 일이기도 하기에 해석하기에 따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비신사적 행동입니다. 이것을 어느 정도 감안 한 예수께서 본문 38절 전반절에서 의미심장한 질문을 안드레와 또 다른 제자에게 던집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 구절을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표준새번역 버전으로 38절 전반절을 살피면 그 무게감이 다가옵니다. 두 제자에게 주께서 질문하신 내용은 나를 쫓고자 하는 분명한 의미가 있는가를 하문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따르던 선생이 분명히 있는데 그 선생을 버리고 나를 따르려는 영적 의미가 있는가를 질문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한 질문의 의도는 학생 정신이 있는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선생 즉 스승을 따르려는 제자에게는 아주 분명하고도 명확한 학생 정신의 의미가 있어야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이 의미의 상실이나 부족은 스승을 따르는 학생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오늘 설교를 통하여 예배에 참석한 교우들에게 묻겠습니다. 1) 여러분은 예수를 따르는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본문으로 다시 들어가 보십시다. 38절 후반절입니다.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주님의 하문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 되기를 포기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기로 전향한 두 명의 제자가 반응한 답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지금 거주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질문합니다. 질문에 대해 성찰하기에 앞서 이들이 예수를 부른 호칭입니다. ‘랍비’라고 부릅니다. 번역하면 ‘선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자기의 첫 스승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호칭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했고, 나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만한 자격도 없는 자라고 고백하며 예수에 대한 가치를 최고로 극대화했지만, 막상 이런 선언을 들었던 안드레와 또 다른 제자 한 명이 예수에 대하여 호칭한 이름은 선생이었습니다. 위대한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자신의 책에서 이 단어에 대해 대단히 의미심장한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랍비-하나님의 길을 가르칠 수는 있으나 자신은 그 길이 아님-에 불과했다.”(레슬리 뉴비긴, 『요한복음 강해』, IVP, 40쪽)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을 떠나 예수에게로 가기는 했지만, 아직 두 제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반신반의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거주하는 장소에 따라 그의 신분, 가치를 판단하고 따를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를 판단하려는 여지가 있음을 요한복음 저자는 간접적으로 고발한 셈입니다. 주님이 이들의 저의를 모를 리 없습니다. 해서 주님은 곧바로 이렇게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와서 보라” 너무 단순한 답변처럼 여겨지지만, 이 선언만큼 분명하고 명징한 답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은 선포하신 것입니다. 내게로 와서 내 삶의 내용을 눈으로 지켜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두 명의 제자에게 준 것입니다. 주님의 단호한 답변을 받은 안드레는 이윽고 자기 형제 시몬에게 가서 주님이 거주하시는 곳을 보고 영적 회심을 경험합니다. 그 회심의 증거를 본문 40〜41절이 제시합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랍비로 예수님을 지칭하던 안드레가 주님이 기거하시는 장소를 눈으로 보고 목격한 뒤에, 호칭이 급변화하였음을 보고합니다. 안드레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반전한 셈입니다. 안드레의 영적 회심은 형제 시몬에게 예수를 전함으로 그를 전도하는 계기까지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거나 머물 이유가 없어진 셈입니다. 안드레의 이런 복음적인 행위가 기독교 역사의 한 획을 긋게 한 주인공 베드로의 탄생을 가져오는 계기를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 데리고 온 시몬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이름을 하달하셨습니다. 본문 42절 마지막 구절입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묵상하면서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받게 됩니다. 안드레는 학생 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이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듯이 벳세다에서 일어난 오병이어 기적의 마중물을 된 자가 누구입니까? 빌립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빌립은 계산하는 신자들의 표상입니다. 이해타산적으로 믿는 자의 대표적 심볼입니다. 요한복음 6:5〜7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그러면 빌립과는 다른 대척점에 있던 제자가 누구였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시몬을 예수께서 데리고 온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대표적 주자였습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 6:8〜9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빌립에게 떨어진 명령을 안드레가 귀를 기울여 주어담았습니다. 안드레는 5,000여 남자들이 모여 있는 운집한 회중들에게로 나아갔습니다. 혹여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놀라운 일을 일으킬 만한 마중물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결국, 어린아이의 점심 도시락이었던 오병이어를 설득해 주님께 드렸고, 안드레의 이 믿음이 20,000명을 먹이고 12 광주리에 담아 넣을 정도로 남을 것이 있도록 만든 기적의 씨앗이 되게 한 것입니다. 안드레를 통하여 무엇을 교우들과 나누려고 합니까? 2)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는 자는 의미가 있는 삶을 살아낸다는 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대전제가 있습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내는 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입니다. 흉내 내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겉멋 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갑각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계산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머리만 뜨겁고 심장으로 전혀 반응하지 않는 싸늘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내 것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으니 내 땅에는 발을 디디지 말라고 경계선을 쳐둔 이기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내 제자였지만 진정한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방향을 바꾸어 가는 제자들을 박수쳐 주며 격려했던 세례자 요한처럼, 초창기에는 랍비 그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던 예수를 그의 삶을 보고 메시아로 혁명적 전환을 일으킨 안드레처럼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땅에 있는 이들에게 영적인 감동을 주며 결국에는 그 엄청난 하나님의 조명하심이라는 의미를 남기는 자들은 안드레와 같은 믿음의 혁명을 일으킨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화요일 새벽에 보았던 성서 일과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극찬했습니다. 왜 칭찬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1:6〜7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신실하게 본받는 자들입니다. 여타 다른 여백은 없습니다. 신실하게 주를 본받는 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미가 있는 영적 삶을 살아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윌리엄 보든은 억만장자의 후계자로 태어났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예일대학교와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를 만난 뒤에 그가 차지할 수 있는 세속의 후광을 완전히 버리고 생명이 위태로운 이슬람교도들의 땅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역을 준비하다가 안타깝게도 25세의 나이에 척수막염에 걸려 세상을 떠납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그가 죽은 후, 그의 성경책에 기록한 문장이 모든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고, 그를 존경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가 갖고 있었던 색바랜 성경책 여백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남김없이(NO RESERVES), 후퇴 없이 (NO RETREATS), 후회 없이(NO REGRETS)” (카일 아이들먼, 『NOT A FAN』, 288〜291쪽) 윌리엄 보든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학생 정신이 충만한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학생 정신이 있는 자는 영적 의미가 있는 후회 없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빼앗기지 마십시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오 거룩하신 주님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몸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님이 당하신 고난 이 죄인을 위함이니 범죄 한 날 위해 주 욕을 보셨네 나 무엇으로서 그 은혜 보답하리까 무한하신 주의 사랑 고맙고도 크도다 내 평생 사는 동안은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