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1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7) 제목: 이렇게 살 수 있기를 본문: 요한복음 1:19-28 서론) “사람은 천성이 자기중심적이다. 그리고 그 편이성(便易性)을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최고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 한국기독교연구소, 110쪽) 부인할 수 없는 현자의 성찰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그리스도인들도 포함) 임한 가장 절망스러운 비극은 불편한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참지 못하는 님비 주의(nimby)에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 내가 편리하고 이득이 되는 영역에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극단의 이기성이 잠식해 있다는 것이 시대의 비극이자 절망입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대로 편이성이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그른 것으로 가늠되는 시대는 그게 곧 지옥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성찰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내게 적용하는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자들이 바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성서 일과 묵상 텍스트를 시편 37:3절로 정하고 말씀을 적용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개역 개정판 번역입니다. 오늘 제 묵상 노트에 묵상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 구절을 표준 새 번역 성경은 원어 성경이 가깝게 번역했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우리말 성경은 히브리어 ‘에무나’를 ‘성실’이라는 단어로 풀었습니다. ‘אֱמוּנָֽה’(에무나)는 한 단어로 다 담아내기에는 불편함이 있는 단어입니다. 그 의미가 다양하고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극히 개인적인 사견으로 ‘에무나’를 풀이한다면 나는 이 뜻이 와 닿습니다. “꾸준함” 결국 이렇게 오늘 성서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꾸준하게 살아라.” 이제 이순을 훨씬 넘긴 세월을 살다 보니 강하게 느껴지는 소회가 있습니다.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은 머리가 좋은 사람,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꾸준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질되는 동물입니다. 그러니 변하지 않는 꾸준함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속성인 게 맞습니다. ‘끝까지’, ‘꾸준히’ 믿음의 뚝심을 보이는 자가 결국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사람을 여지없이 소개합니다. 본론) 애논 골짜기에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이 매우 불편했고, 또 그 요한을 언짢게 여겼던 유대인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 질문합니다. 본문 19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도대체 네가 누구이기에 이런 월권적인 종교적 행위(세례 베품)를 하느냐고 따져 물은 것입니다. 질문을 받은 세례자 요한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기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20절) 세례자 요한의 답변을 들었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바로 그 답변을 꼬투리로 잡고 자신감을 얻어 요한에게 공격적으로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너는 엘리야냐? 선지자냐? 도대체 누구냐?” 우리에게 일거리를 준 자들(바리새인)에게 가서 네가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도록 정체를 밝히라고 윽박지릅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하고도 명확한 답으로 자신을 드러납니다. 본문 23절을 봅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요한은 자신의 신분을 주의 길을 곧게 하도록 하기 위해 앞서 보냄을 받은 자라고 밝힙니다. 요한의 이 고백은 이사야 40:3절에서 제2 이사야를 통해 예언되었던 말씀에 대한 성취였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결국 세례자 요한은 자기 신분에 대해 조금도 각색하거나 덧붙이지 않고 정직하게 자기를 드러냅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토로, 나는 선지자도 아니라는 외침, 그리고 나는 엘리야가 아니라는 것까지 그는 종교적 MSG를 첨가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은 상대적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위축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게 된 셈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꼬투리를 잡은 공격자들이 고삐를 늦추지 않고 연이어 세례자 요한은 몰아세웁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무슨 권위로 이런 종교적 행위를 하느냐는 항의였습니다. 막다른 골목이 다다른 것 같은 곤란한 상황에 몰렸지만,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이 유명한 메시지를 남깁니다. 이어지는 본문 26〜27절을 읽겠습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극히 개인적이기는 하지만 저는 이 구절을 만나면 만날 때마다 전율하는 감동을 얻곤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정제된 자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소스라치는 감동 말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언급한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 그대로 현대인들의 속성은 자기에게 임한 편이성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상례인데 세례자 요한 그 반대의 길로 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편이성이 아니라 도리어 불편하고 부담되는 상황으로 자기를 과감히 내려놓는 길을 택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위대한 신앙의 길을 택할 수 있단 말인가에 대한 감동으로 전율하게 하는 구절이 오늘 본문 26절과 27절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다. 그분이 바로 너희들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다. 그분이 바로 새로운 엘리야다. 그분이 바로 구약에 등장했던 선지자들의 예언을 완성한 예언자들의 결론인 구주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저자는 세례자 요한을 명시한 이후, 본문 마지막 절에서 이 일은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증언함으로 본문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28절입니다.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그렇다면 이상의 세례자 요한의 고백을 전제로 오늘 수요예배를 통해 저와 여러분이 간직해야 할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 냉철한 자기 인식이야말로 신앙의 승리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라는 교훈입니다. 역대상하를 기록한 역대기 역사 기자들은 열왕기하를 기록한 신명기 역사서 기자들에 비해서 남 유다의 열왕들에 대해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그러니 당연히 웃시야에 대한 평가도 매우 좋은 편입니다. 역대하 26:7〜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신지라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이뿐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역대하 26:13-15절의 기록도 웃시야에 대한 평가로는 극찬의 수준입니다. “그의 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라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적을 치는 자이며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여기까지는 역사 기록자들이 웃시야에 대해 매우 좋았습니다. 하지만 역대하 26:16절은 웃시야에 대한 우울한 그림자를 보게 하는 결정적인 구절입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유다의 영토도 확장되는 번영이 일어나자 웃시야는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 점점 상실해 가는 둔감한 자가 되고 맙니다. 당시 야훼의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를 총괄하는 제사장은 아사랴였습니다. 유다 제국은 야훼 하나님 신앙으로 나름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제사장이 약 80명에 이를 정도로 야훼 신앙의 절정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잘 나갈 때가 도리어 위험한 시기이며 조심해야 하는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웃시야는 이런 속담의 제물이 되고 맙니다. 유다의 모든 번성과 부흥이 자기로 인함이라고 착각하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었던 제사 집례마저 자기의 권한으로 만들고 싶어 하며 제사장들의 영적 권위에 도전합니다. 웃시야는 제사를 드리는 성전에서 그 제사의 주도권을 제사장들에게서 빼앗으려고 물리력을 동원합니다. 물리력과 공권력을 이용하여 성전에서 향단에 분향하는 월권을 자행한 것입니다. 아사랴는 냉정하게 왕을 책망합니다. 역대하 26:17〜18절은 이렇게 웃시야를 고발합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아사랴의 경고가 이 정도라면 웃시야가 회개하고 물러서야 했는데 그는 자기의 권력을 휘두릅니다. 이어지는 역대하 26:19〜21절은 증언합니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음을 보고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 이상이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게 된 웃시야를 보고한 역사가들의 보고입니다. 이 성경적 내증을 인용하기로 마음먹고 설교 원고를 써 내려가는데 갑자기 제게 조명된 감동은 역대하에 기록된 웃시야 왕에 대한 담론을 그의 죽음으로 마무리하지 말고 이사야의 소명까지 이으라는 성령 하나님의 강력한 권고였습니다. 처음에는 의아해했지만 왜 성령이 그렇게 종을 뒤흔들었는지 원고를 써 내려가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언서 이사야 6장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사야 6: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사야가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이사야 소명의 텍스트입니다. 웃시야가 죽자 야훼께서는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성전으로 이사야를 부르신 주님은 그로 하여금 환상을 보게 하십니다. 주께서 앉아 계신 보좌의 환상이었습니다. 그 환상은 대단히 거룩한 환상이었습니다. 보좌를 중심으로 야훼의 천사들이 그 거룩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환상을 보고 있던 예언자는 갑자기 자기를 보게 됩니다. 자기를 보았던 예언자 이사야는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오염된 자이며, 더러운 자인지를 직시하게 됩니다. 이사야는 두려움에 휩싸여 이렇게 야훼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사 6:5) 나는 철저한 죄인이라는 인식, 그래서 이 죄를 갖고서는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분명한 자기 고백을 한 것입니다. 구약학자들은 이 구절을 일러 이사야의 첫 번째 자기 인식이라고 해석합니다. 결국, 자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이해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이사야를 당신의 철저한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역사가들의 성경 배열이 아주 절묘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웃시야가 자기가 누구인지를 망각함으로 비극적 생을 마감한 자로 기록한 내용을 기점으로 이사야는 자기기 누구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안 순간부터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의도적 배열 말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며 자기중심적으로 일체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자가 야훼 하나님 신앙을 온전히 따라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나 스스로 나를 정화할 수 없으며, 그러기에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며, 나는 나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자가 어찌 신앙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거짓과 위선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은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 몰랐을 때, 사울 즉 ‘큰 자’로 자기를 자랑하며 살아갔습니다. 빌립보서 3:5〜6절입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하지만 그가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작은 자’인 바울로 살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자기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이해하며 인식했던 바울은 이렇게 신앙의 고백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철저한 자기 인식을 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조금도 월권하지 않으며 자기가 지켜야 할 금도를 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주님은 세례자 요한을 일러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이보다 더 큰 이는 없다”라고 그의 삶을 극찬한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스스로 진리의 추구자라고 묘사한 어느 방문객에게 스승이 말했다. “당신이 찾는 것이 진리라면, 모든 것에 앞서 한 가지를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방문객이 곧바로 응대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넘치는 열정이지요.” 스승은 반색하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자기(내가)가 잘못인지도 모른다고 끊임없이 인정할 용의가 있어야 합니다.” (앤서니 드 멜로, 『일분 지혜』, 김기석, 『오래된 새 길』, 포이에마, 75쪽, 재인용)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례자 요한의 분명한 자기 인식을 드러낸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감히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감히 이런 용기를 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나도 세례자 요한처럼 살아보고 싶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세상의 것 의지할 수 없으니 감사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기쁨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기도 제목 1) 하나님,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용기와 믿음을 주십시오. 2) 하나님, 세례자 요한처럼 나를 부인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3) 하나님, 세인 교회 공동체가 건강한 부흥을 이루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