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4일 수요예배 설교 (요한복음 강해 6) 제목: 예수 그리스도 본문: 요한복음 1:15-18 서론) “메신저가 신통치 않다는 이유만으로 불편한 진리를 묵살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무슨 교회에 갔는데 설교자가 너무 단조롭게 질질 끄는 통에 지루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대개 이렇게 되받는다. 그렇다고 해도 내용이 틀렸던가요? 지루하게 전달되었을망정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 있지 않았습니까?” (팀 켈러, 『예수, 예수』, 두란노, 163-164쪽) 팀 켈러 목사가 이 갈파를 전 세계 독자들에게 전했던 때가 2017년이었습니다. 이제 7년이 지났습니다. 더불어 이 예리한 메시지를 선포했던 팀 켈러도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말한 장본인도 이 땅에 없고, 시간도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메시지는 여전히 2024년에도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강력하게 요청되는 현재진행형의 물음입니다. 가장 강력하게 다가오는 문장은 바로 이것입니다. “메신저가 신통치 않다는 이유로 불편한 진리를 묵살해서는 안 된다.” 메신저는 신통하지 않더라도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징합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메시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주 수요일 설교를 통해서 말씀이었던 예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음을 나누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사건은 구속사의 완성이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대 프로젝트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권위를 내려놓은 엄청난 예수님의 결단이 동반된 사역임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시 세례자 요한으로 그 초점이 바뀝니다. 요한이 전지적 시점에서 성육신하여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증언하는 메시지가 본문입니다. 15절을 먼저 나누겠습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이 구절은 무엇을 전제한 것일까요? 다음 강해에서 볼 30절 말씀을 미리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15절에서 발언한 메시지가 똑같이 연이어 30절에도 나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신약학자 C,K, 바레트는 이 대목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15절이 없어도 14절을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라고 해서 15절이 삽입문이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성서를 대변한다. 15〜17절은 예수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토대가 되는 구약성서의 위치를 분명히 하고 자 한 것이다.” (C,K, 바레트,『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 257쪽) 이 주석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풀어 설명하겠습니다. 상당수 신약학자들은 15절은 원래 요한복음 원문에는 30절에만 있었던 구절인데,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후대에 또 다른 편집자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첨가 삽입된 구절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설명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15절이 없이 14절과 16절은 연이어 붙여 해석하는 것이 도리어 더 자연스럽다는 것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결국 후대의 편집자가 삽입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바레트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진도를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된 권위를 갖고 있던 원래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창조 사역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랬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말씀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가장 나약한 모습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여러 차례 설교를 통해 증언했듯이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사를 완성하는 도구가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죽어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말도 안 되는 역학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을 만한 그 어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14절의 증언 그대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후에 지속되는 강해를 통해 보겠지만 29절 증언에 의하면 주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를 요한복음 저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렇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16〜17절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6〜17절을 공동 번역으로 읽어보면 감동이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볼까요? “우리 모두는 그분의 충만한 은혜, 끊임없이 베푸시는 선물에 의지해 살아간다. 우리가 기본적인 것은 모세에게서 받았지만, 이 풍성한 주고받음, 이 끝없는 앎과 깨달음, 이 모든 것은 메시아 예수를 통해 받았다.” (『메시지』, 요한복음 1:16-17) 오늘 본문 마지막 18절에서 요한복음 저자는 이렇게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결정타입니다.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 주심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우리 모두에게 보이셨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만난 자라는 점까지 요한복음 저자는 독자들에게 각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과 은혜를 충분히 찾아낼 수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가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은혜라는 감동입니다. 제가 읽은 한 개인의 전기 중에 가장 인상깊게 남은 책은 인도의 위대한 선교사인 스탠리 존스가 자신의 사역 보고를 첨가해 낸 『순례자의 노래』입니다. 저는 이 책을 2010년에 구입하여 읽었는데, 제 서재에 뽑혀 있는 책을 열면 너무 큰 감동의 촌철살인들을 만났기에 밑줄 친 흔적으로 페이지가 너저분할 정도로 감동의 자국들이 남아있습니다. 스탠리 존스는 미국에서 가장 복음적인 신학대학이라고 하는 에즈베리 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 선교 본부에서 인도 선교사로 파송됩니다. 인도에 도착한 그는 최하층민과 불가촉천민들을 대상으로 선혈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며 수많은 이들을 예수께서 인도한 위대한 사역자가 됩니다. 그렇게 사역한 그는 공을 인정받아 간디 평화상까지 수상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깁니다. 하지만 제가 스탠리 존스에게 열광한 이유는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유명 인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평생 천착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명성과 집요함에 나 또한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어느 날, 스탠리 존스가 한 대학가에 있는 모 교회 주보를 우연히 주워 읽었는데 그날 교회 주보 광고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눈에 띄었답니다. “교수 아무개가 오늘 교회에서 예수의 문제에 대해 강의할 예정임”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예수가 문제라고? 천만에 그분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셔. 그분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지금도 해결해 주시고, 앞으로도 또 해결해 주실 거야.” (스탠리 존스, 『순례자의 노래』, 복 있는 사람들, 31쪽) 스탠리 존스는 책에서 또 다른 하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고등학교 학생 몇 명이 교지에 싣겠다고 하면서 내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들이 던진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러했다. “당신이 갖지 못한 것 중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한 뒤에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가진 것 말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소유한 예수, 하나님, 하나님 나라만이 내가 바라고 필요로 하는 전부입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나는 그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내가 가진 것만을 더더욱 원했을 따름이다. (위의 책, 40쪽) 오래전에 저는 명목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머리로 예수를 알고 있었던 철저한 주지적 신자였습니다. 그러니 단 한 번도 가슴과 심장으로 주님을 만난 적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 사람이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 리 만무입니다. 일반대학을 입학했는데, 저는 대학을 계속 다닐 수 있는 여건들이 사라졌습니다. 돌이켜 보면 경제적으로 대학을 지속해서 다닐 수 있는 통로를 하나님이 봉쇄하신 것이었습니다. 인생을 비관하고 막 살기로 마음먹은 어느날, 단 한 번도 저의 전인격 속으로 찾아오신 적이 없다고 믿었던 주께서 때가 차매 제게 오셨습니다. 오신 주님은 제게 그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단다. 오래전에 염소와 송아지와 같은 동물을 죽여 제사를 드려야만 내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던 때가 있었단다. 그런데 그 일이 얼마나 번거롭고 복잡한지를 알고 이제는 그런 중간 과정이 없이 내가 내 사랑하는 아들을 너를 위해 보내기로 했단다. 사랑하는 아들아, 하지만 네가 지은 죄에 대한 분명한 대가는 치러야 하기에 너 대신, 내가 보낸 아들을 죽게 하였단다. 내 아들이 너를 위해 대신 죽은 거야. 그리고 이제 내 아들이 너를 위해 대신 죽었기에 너를 구원하기로 했단다. 아들아. 너를 위해 죽은 내 아들을 믿어주겠니?”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9:12절에서 이렇게 역설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오셔서 전인격적으로 말씀해 주신 이 말씀을 받았을 때, 저는 도저히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이후,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부합한 인생을 살기 위해 목사로 헌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되셔서 제게 오신 그 놀라운 사건은 제 인생 최고의 은혜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 되심은 제게는 압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스도 되신 예수께서 제게 오신 성육신의 감동은 제게는 은혜의 극치였습니다. 교우 한 명과 교제하는 데 그가 이렇게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어제 내게 오셔서 나를 휘감아주신 그 놀라운 주님의 사랑이 목에 겨워 그 감동이 식기 전에 내가 사랑하는 지체에게 그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 감동을 전해주었는데, 지체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그랬구나, 나도 그분을 알아. 나도 이미 그분은 너무 잘 알아. 이미 경험했어.” 그 지체가 제게 그렇게 반응할 때 나는 느꼈습니다. “이미 지식으로 체화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에게 스며들 공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슬펐습니다.” 설교 서두에 피력한 팀 켈러 목사는 연이어 책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기며 매너리즘에 빠짐 명목적 신자들을 향해 비수를 날립니다. “예수 때문에 나다워질 수 없다면 나는 기독교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어리석음이 지배한다.” (팀 켈러, 위의 책, 96쪽) 비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2000년 전에 세례자 요한을 뒤흔들어 놓았고, 요한복음의 저자까지 뒤흔들어 놓았던 예수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나의 심장을 타격하는 은혜는 2024년 7월 24일 오후 8시에도 여전히 임하는 현재진행의 은혜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구습과 습관에 의해 내팽개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는 절친한 중풍병을 앓고 있는 친구를 살리기 위해 예수께서 계신 처소로 찾아간 친구들은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것을 알고 그 집의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와를 뜯어내고 침상에 누인 친구를 예수께서 보시도록 그분 앞으로 달아 내리는 엽기적인 일을 시도합니다. 네 명의 친구들이 이런 무모한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시도한 이유는 딱 한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앓고 있는 내 친구를 예수께서 보시고 고쳐주시기를 기대하는 유일한 은혜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3〜4절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왜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까? 왜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앞서 달려 예수께서 지나가는 동선에 먼저 도착했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50〜52절을 봅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주목하십시다. 바디매오처럼 예수께로 뛰어나갈 준비가 있습니까? 주님을 보고 싶다는 은혜의 사모함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더불어 오늘도 여전히 말씀으로 내게 오십니다. 그분의 은혜는 살아서 오늘도 역사하고 있음을 믿고 사모하십니까? 그런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는 인격적으로 오셔서 오늘도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동기 목사 아들이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데 여름휴가를 내서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친구 목사 사모님은 저하고는 페북 친구이고 인스타그램 맞팔로워이기에 어떤 일이 있으면 SNS에 올린 영상이나 글 때문에 근황을 알곤 합니다. SNS에 올라온 영상을 보고 있노라니 앞으로 제 미래인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참 재미있게 시청합니다. 친구 목사는 외손녀 한 명, 친손자, 손녀 각 1명씩 총 3명과 함께 여름휴가를 제주도에서 보냈는데 그 근황을 사모님이 실시간으로 중계방송을 해서 안방에서 흥미 있게 시청했습니다. 친구 와이프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들 때문에 너무 행복한데 스쳐 지나가는 친구의 얼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죽을 맛이다. 언제 가니? 빨리 미국으로 가라.” 왜 아니 그럴까 싶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손자들을 무등 태워 노니 그 허리가 온전할까 싶습니다. 킁킁대는 소리가 영상을 통해 들립니다. 위로하기 위해 어제 통화했습니다. 친구가 말합니다. 아들 내외가 다음 주에 미국으로 들어가는데 하루가 천년 같다고. 친손자, 손녀도 30분만 반갑습니다. 그게 솔직한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저와 여러분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 전과 2000년 후나 여전히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은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또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심 자체가 저와 여러분에게는 은혜의 극치입니다. 이 은혜를 사모하는 아름다운 지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아침 안개 눈앞 가리듯, 나의 약한 믿음 의심 쌓일 때, 부드럽게 다가온 주의 음성,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라. 빗줄기에 바위 패이듯, 나의 작은 소망 사라져갈 때, 고요하게 들리는 주의 음성,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외로움과 방황 속에서,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위로하시는 주님, 나를 도우사, 상한 나의 마음 감싸 주시네. 십자가의 보혈로써, 주의 크신 사랑 알게 하셨네. 주님께 감사하리라, 언제나 주님께 감사해. 기도 제목 ⓵ 내일부터 실시되는 다음 세대 여름 사역이 은혜롭게 진행되도록 ⓶ 세인 공동체에 강력한 성령의 은혜가 압도하도록 ⓷ 30/40 부부들을 구원하여 다음 세대가 다시 살아나도록 ⓸ 부교역자 리더십이 승계되도록 ⓹ 지역 셀 사역이 지속적으로 승리하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