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3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12) 제목: 믿음으로만 본문: 야고보서 2:21〜26 서론) 누가복음 14:28〜32절을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새집을 지을 계획이라면, 집을 다 지을 수 있을지 비용을 계산해 보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기초만 놓았는데 돈이 다 떨어졌다면, 너희는 아주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이 사람이 끝내지도 못할 일을 벌였구나’ 하고 손가락질하며 너희를 비웃을 것이다. 또 너희는 병사 일만 명으로 병사 이만 명을 가진 왕을 당해 낼 수 있을지 판단해 보지도 않고 전쟁에 나가는 왕을 상상할 수 있겠느냐? 만일 당해 낼 수 없다고 판단하면, 밀사를 보내 휴전을 맺지 않겠느냐?”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내용이 무슨 뜻입니까? 저는 이 비유의 진의(眞意)는 누군가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상응하는 대가와 준비가 필요함을 역설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았을 때 성적이 우수하게 나오는 학생은 공부를 많이 한 학생이어야 합니다. 진리입니다. 요행수는 없습니다. 이전에 들었던 고전적인 예화가 있습니다. 신학생이 교회에서 충성하느라고 시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조직신학 시험을 치렀는데 시험문제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논하시오.』였습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신학생은 시험 답안에 이렇게 썼습니다. “성령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못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교수님은 답안지를 보고 그 학생에게 F 학점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의 답안지에 이렇게 메모해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지만 못하시는 게 하나 있다. 공부하지 않은 자에게는 F 학점 그 이상을 주시는 걸 못 하신다.” 수고하는 대가를 지불(支拂)하지 않는 아름다운 결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론) 믿음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적 교리이며 가치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 곳곳에서 외치며 선포했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명제는 흔들 수 없는 기독교의 최고 가치이자 명제임을 저도 믿습니다. 인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죄인이 의인 되는 유일한 방법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입니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저는 오늘 설교에서 두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아브라함이요, 두 번째 사람은 라합입니다. 본론) 먼저 아브라함을 소개합니다. 본문 21〜23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제게 이 구절은 대단히 신선하게 다가왔고, 동시에 또 해묵은 난제를 해결해 주는 단비와 같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감동과 은혜를 이 구절에서 받았습니다. 21절을 흔히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폭으로 읽는다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런데 야고보는 21절에서 마치 혁명과 같은 발언을 남겼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친 걸 믿음이 아니라, 행함의 행위였다고 선포했으니 말입니다.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거부하는 듯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아브라함의 행위를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보았다는 야고보의 발언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독자인 저와 여러분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다시 또 한 번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도대체 뭐가 맞는가? 이 질문입니다. 천만다행으로 녹록하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야고보 기자가 22절에서 아주 선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했다’는 대목입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치 이 구절을 축자적으로 해석하면 이런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믿음과 행함의 지분이 각각 50%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50% 필요하고, 행함이 50% 필요하다는 해석으로 빗나가는 경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함께 일하고’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 ‘쉬넬게이’(συνήργει)는 믿음과 행함의 분리를 상상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즉 믿음에는 행함이 반드시 따른다는 말이면서, 믿음의 열매는 반드시 행함이라는 도구를 통해 완성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함과 믿음은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6절을 참고해 보십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바울에 의하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갈라디아서 5:6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이 믿음 말고는 없다고 선언한 강력한 바울의 일갈이 믿음이라는 단어가 행함을 반대하는 단어가 아니라, 행함과 함께 가는 것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중요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22절의 발언에서 하나 또 주목해야 하는 것은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는 선언입니다. ‘온전하게 되다’로 번역한 단어 ‘에텔레이오세’ (ἐτελειώθη)는 문자적으로 ‘몸이 정화된 완벽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결국, 믿음 하나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완벽하게 대변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누구든지 행함이 뒤따를 때 갖고 있는 믿음이 온전해진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항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말한 행함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이라고 정의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또 한 사람은 라합입니다. 본문 25절을 소개합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우리가 전통적 시각에서 라합을 이해하다 보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접근이 조금 불편해짐이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라합을 가나안에서 매춘을 일삼는 여인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앞에 소개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병렬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소유자로 라합을 인용하는 게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서적인 동의입니다. 그런데도 야고보 기자는 왜 생뚱맞게 라합을 이토록 예민한 장면에서 무대 위로 올렸을까요? 아마도 삶의 외형이 망가진 이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면 그의 삶이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녀가 보여준 행함이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본문 25절에 기록된 하나의 단어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접대하여’ 입니다. 헬라어 ‘ὑποδεξαμένη’(휘포테카메네)는 문자적으로 ‘환대한다.’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라합은 자기 조국을 점령하기 위해 온 첩자들을 환대할 수 있었을까요? 예민한 질문이기에 학자의 도움을 받아 보기로 합니다. “라합은 당시 일단의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이름을 듣고 믿었던 믿음이 그녀의 목숨을 걸어도 좋을 만큼 생생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증명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할 수 없는 첩자들을 대접한 것이다.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들을 외모로 보지 않고 믿음으로 그들을 대했다. 바로 행함이었다. 그러므로 라합은 믿음의 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런 믿음에 따라 행함으로 그 믿음의 진정성을 인정받은 경우, 곧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경우였다.”(채병삼, 『야고보서 이해, 지붕 없는 교회』, 이레서원, 206쪽) 이런 믿음이 동반된 행함을 보였던 라합이었기에 가나안이라는 이방 신전의 땅에서 몸을 팔며 살아야 했던 자기의 슬픈 삶을 반전시켜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유일하게 구원을 받아 살아남게 돤 남은 자가 되었고, 그녀는 룻의 남편인 보아스의 어머니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족보에 올라가는 영적 기염을 토한 주인공으로 등극하기까지 했음을 성경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절의 보고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그렇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사순절 네 번째 주일에 심비에 아로새길 교훈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믿음을 믿음 되게 하는 본질이 바로 행함이라는 교훈에 천착하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게 강력한 본문 이해라는 인사이트를 준 문장을 주석에서 찾았습니다. “본문에서 야고보가 질문한 내용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슨 소용인가가 아니라, 네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이다.” (크레이크 l, 불롬버그 & 마리암 카멜 공저, 『존 더반의 신약 주석- 강해로 푸는 야고보서』, 디모데, 151쪽) 엄청난 성찰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강조한 본문 기록의 방점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비난한 것이라기보다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행함이 나타난다는 것을 증언함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주식회사 ISSAC 토스트 대표이사인 김하경 대표의 삶과 사업을 다룬 『백억짜리 아침 식사』라는 프로그램에서 방송되어 주목하며 시청했습니다. 제가 김하경 대표가 출연한 방송을 눈여겨 시청한 건 그녀가 신실한 크리스천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2021년, 김 대표가 기독 실업인(CBMC) 대회 강사로 나와 아주 소박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간증을 이어갔던 유트브 영상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자기 성공담을 간증하며 소개했습니다. “저는 사업을 하면서 경영의 기법, 경영의 노하우, 경영하는 스킬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의 원칙은 반드시 지키며 경영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경영의 마인드가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가를 물었고, 사회 법규에 맞는가를 물었습니다. 맞으면 실행했고, 맞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유익을 주는 아이템이라고 해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삶을 시편 23:1절에 맞추고 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제게 이론으로 형용할 수 없는 복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지난주에 방송되었던 분량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주식회사 이삭의 직원 복지가 정말로 아름답구나!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각종 복지 내용이 소개되었습니다. “결혼 지원비 500만 원, 자녀 출산 시 한 명당 천만 원, 자녀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육아수당 15만 원, 5월 가정의 달에는 50만 원, 생일에 50만 원, 여름 휴가비 100만 원, 진급 축하에는 금 한 돈, 4계절마다 인센티브, 난방비 지원금 25만 원, 겨울 외투 지원비, 건강식품, 의료비, 한우 등등” 방송을 시청한 많은 사람들은 이 복지 내용에 방점을 찍었겠지만, 저는 김하경 대표가 남긴 이 한마디에 울컥할 정도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복지를 크게 생각하면 부담이 생겨서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냥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함께 만든 떡을 나누어 먹는 겁니다. 그게 복지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준 그녀에게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본문 26절을 마지막으로 읽겠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너무 유명한 구절입니다. 하지만 곱씹을 때마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뼈를 때리는 영혼의 죽비처럼 들리는 야고보 저자의 엄청난 굉음으로 저는 받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담임목사 셀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날 지체들과 함께 보았던 텍스트는 『오래된 새 길- 7과 8과』였습니다. 7과는 ‘간음하지 말라’ 즉 7계명에 대한 성찰이었고, 8과는 ‘도둑질하지 말라’ 즉 8계명에 대한 신학적 조망이었습니다. 지체들이 은혜받은 내용들을 나누던 중, 이미혜 집사가 심비에 새겨진 문장을 한 곳 소개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라는 성서의 명령에 공감하면서도 자신이 가난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다.” (김기석, 『오래된 새 길』, 포이에마, 61쪽) 이 글에 마주친 이 집사께서 이렇게 자기 성찰을 나누었습니다. “목사님, 이 문장이 제게 강하게 임했습니다. 정녕 나는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내 욕망에 더 집중하며 살았던 것을 인정합니다. 내 삶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내가 아닌, 타인을 보듬고 집중하는 삶을 살아보려고 합니다.” 믿음은 구원의 절대적 조건이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혜 집사가 결단한 “타인을 조금 더 보듬고 집중하는 삶을 살아보련다”는 고백을 응원하고 지지하며 중보해 줄 것입니다. 이 응원이 어찌 이미혜 집사에게만 집중되는 일이겠습니까? 세인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이가 이런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선언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24절입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게 아닙니다. 행함이 함께 가는 믿음이 의롭게 된 이들의 증거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순종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당신의 그 사랑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찬송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당신의 그 헌신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불타는 사명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