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야고보서 강해 5) 제목: 착각하지 맙시다. 본문: 야고보서 1:12〜15 서론) 나희덕 시인이 쓴 시들 중에서 그녀의 시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시만 모아 엮은 시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라는 제하로 출간된 시집입니다. 지난 주간에 시집을 열다가 화들짝하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적시해 놓은 서시에 카운터펀치를 맞은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서시(序詩)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나희덕,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수오서재, 2024, 13쪽) 1987년에 서울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파트 타임 사역자로 목회를 시작했으니, 올해가 목회자로 사역한 지 꼭 38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이 말은 서툴던지, 그렇지 않던지 설교라는 이름으로 말씀을 전한 지 38년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38년간, 강단에서 얼마나 많은 설교를 했을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설 명절 기간, 양진이가 인사를 하기 위해 저를 찾아왔을 때, 권숙진 권사가 우스갯소리를 하나 던졌습니다. 양우 아빠가 내게 질문했어요. “여보, 목사님 설교가 매주 달라?” 물었답니다. “그럼, 당연히 다르지. 매주 다 달라.” “대단하다. 당신 교회 목사님!” (ㅎㅎ) 목회자는 설교하는 직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설교 준비는 평생의 짐이지만,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역의 절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대부분의 정상적인 신학을 공부하고 정상적인 궤도에서 정상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들에게 설교 사역은 최고의 축복임과 동시에 최대의 압박이라는 마치 칼날의 양면과도 같은 애증의 대상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서시를 만났을 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습니다.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고 소리친 시인의 토설을 읽다가 시인이 죽은 글, 죽은 시, 죽은 소설, 죽은 문학에 빠져 독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지 못하면서도 군불 때기에 급급한 자신을 비롯한 글쟁이들을 향하여 냉정하게 죽비로 내리친 序詩라는 촌철살인이 목사로 살면서 38년간, 설교 사역을 감당해 온 내게도 여지없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심비(心碑)에 새겨지지 않는 설교, 영혼을 타격하지 못하는 설교를 함으로써 성도들을 삶의 현장으로 끌어내서 아름다운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로 살도록 종용하지 못하게 하는 공허한 설교를 백번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시인의 서시가 나를 아프게 했습니다. 크리스천 철학자 강영안 교수가 일전에 본인의 책에서 강하게 강조했던 문장이 오롯이 제 기억에 있습니다. “나의 삶을 통해 성경을 읽고, 성경을 통해 나의 삶을 해석한다.” (강영안, 『읽는다는 것』, IVP, 159쪽) 강 교수의 이 촌철살인은 결국 “내가 말씀을 읽는 게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성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성경이 제시하는 방식은 단 한 가지임을 제시합니다. 요한복음 16:13절은 보고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말씀이 나를 읽게 하라는 메시지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진리의 성령이 나를 장악하여 그분이 주도권을 잡고 나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셔서 나로 하여금 분연히 예수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나를 읽게 하는 것이며, 성경을 통해 나의 삶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설교 사역을 감당하면서 어떤 목회자가 거룩한 욕심이 없겠나 싶지만, 2월 두 번째 주일에 나누게 될 본문 성경이 세인 지체 모두를 읽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묵상하는 성경이 여러분의 삶을 해석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착각하지 맙시다.’로 설정했습니다. 이 말은 오늘 텍스트는 나와 그대가 자칫 잘못하면 왜곡할 수 있는 위험성이 다분한 본문임을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어떤 면이 그런지를 추적해 보십시다. 먼저 본문 12절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우리나라 개역 개정판 성경은 지금 읽은 그대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문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이 있어라, 시험을 참는 사람들이여!” 원문대로 접근하면 이런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작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대와 그가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전혀 행복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야고보서 기자는 그런 상태의 그대와 나를 향하여 얼토당토않게 복이 있기를 축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이렇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던 근거는 대단히 명확합니다. 12절 하반절에 그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잘잘법’ 강사로 잘 알려진 김학철 교수는 ‘생명의 면류관’에 대한 아주 명징한 주석을 내놓았습니다. “생명은 구약성서에서 오로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면류관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명예의 표시이다. 곧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시험을 신실하게 이겨내어 온전함을 이룬 사람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허락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야고보는 ‘생명의 면류관’으로 표현하였다.” (김학철, 『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야고보서, 39쪽) 생명의 면류관은 하나님이 당신을 허락하시는 은혜라는 김 교수의 주석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니 야고보서 저자가 수신자들을 향하여 “복이 있어라. 시험을 참는 자들아”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저와 여러분은 그동안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13절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 구절은 의미심장합니다. 13절의 주체가 어떤 경우에는 바로 ‘나’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대단히 습관적으로, 상습적으로 범하는 질 나쁜 행태가 있습니다. 시험을 받을 때마다 그 시험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몰고 가는 행태입니다. 주지하다시피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욥, 모리아 산으로 이삭을 끌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성경 내증의 실례를 들어서 하나님이 시험의 주체이기에 내가 시험에 빠진 상태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려는 대단히 비신앙적 행위들을 버젓이 범하고 있는 신자들을 너무 많이 봅니다. 이런 이들을 향하여 야고보서 저자는 마치 쐐기를 박는 것처럼, 13절에서 단언해 선포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너무나 단호하기에 낯설기까지 한 야고보서 저자의 선포는 조금도 물러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악에게서 시험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13절을 받는 우리들은 질문해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렇다면 하나님, 욥은요?, 아브라함은요?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시험을 허락하셨지요? 앞뒤가 안 맞네요. 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해 타당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분명함을 동시에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이 뽑아서 시험을 허락한 자의 공통 분모는 그들의 끝을 승리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드라마틱한 프로젝트를 전제한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한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구속사의 시발점이 되게 하기 위한 포석이 전제된 시험이었고, 욥에게 시험을 허락한 의도는 욥기 저술과 편집 시기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있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와 맞물린 역사적 배경을 전제하고 있기에 무너진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알리기 위한 하나님의 희망을 전제한 시험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철저한 당신의 도구로 삼기 위한 전제가 그들에게 시험이 주어진 이유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야고보서에서 전하고 있는 시험의 전제는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계획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시험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연이어 저자는 이렇게 포문을 열었습니다. 본문 14〜15절에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구절을 영어 성경 Living Bible 버전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Temptation is the pull of man’s own evil thoughts and wishes. these evil thoughts lead to evil actions and afterwards to the death penalty from God.” 직역하면 이런 의미가 됩니다. “시험은 인간 스스로 자신을 사악한 생각과 욕망으로 끌어당기는 일입니다. 이 악한 생각은 사악한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이라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결국, 시험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질 나쁜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사람이 받는 시험은 순전히 자신의 욕망으로 인함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야고보서 저자는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렇듯 아주 나쁜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의 결과물 때문에 사람에게 시험이 오게 되고, 그 시험은 또 다른 나쁜 행위 즉 죄로 확대되고, 결국 그 결과 인간은 영과 육의 죽음을 경험하게 됨을 선언한 것이 오늘 본문 15절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갖고 있는 시험에 대한 인식의 대부분이 착각이라는 점을 다시 올바르게 정의한 본문이 오늘 설교 텍스트입니다. 어떤 교회에 남자 성도가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적 상태가 절망적인 것을 안 성도는 선고를 받은 날 이후부터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새벽예배부터 시작해서 각 예배에 성실히 참여하며 하나님께 치유의 은총을 간구했습니다. 그렇게 1년여 하나님을 붙드는 삶을 경험한 이 형제는 주치의 의사도 깜짝 놀라는 육체의 변화가 생겼는데, 장기에 퍼진 말기 암세포가 사라진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례입니다. 불과 1년 만에 시한부 인생이 완전히 새롭게 거듭난 육체를 경험했으니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총이요 기적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교회에서 간증의 대명사가 된 이 형제는 그로부터 약 1년 뒤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사실입니다. 놀라운 점은 이 형제가 사망한 장소가 암 선고 이전부터 은밀한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정부(情婦)의 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남자는 육체의 치유를 경험한 이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망각하고 옛 구습에 자행했던 죄악의 터널로 다시 들어가 오늘 야고보서 기자가 적시한 그대로 영적 사망은 물론, 육적 사망까지 동시에 당하게 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펜데믹 3년간 신앙의 동지들에게 써 내려간 편지글을 모아 펴낸 김기석 목사 책에서 이 문장을 만났습니다. “신앙이 깊어지려면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끊음), 더러운 것은 씻어내고(씻음), 지향(指向)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김기석, 『사랑은 느림에 기대어』, 비아토르, 24쪽) 이런 과정을 연속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영적 여행의 토대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과정을 올곧게 걷고 있음에도 하나님의 시각에서 당신의 자녀를 더 단련함으로써 신실한 주의 자녀로 세우기 위해 조각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성도들에게 시련의 형태로 임하는 경우를 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성도들은 그것을 시험이라고 발음하지 않고 쇠 불릴 ‘연’ 쇠 불릴 ‘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연단(鍊鍛)하심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순전히 자기 욕심에 끌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함몰된 자가 당하는 고통을 연단이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시험이라고 정의합니다. 연단과 시험을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착각 중의 착각이지 않겠습니까? 창세기 22:11절을 소개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우리나라 성경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급히 부르실 때, 응답한 아브라함의 답변을 단순하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 Living Bible 버전은 엄청난 영적 울림을 주는 단어 하나를 삽입해 놓았습니다. 소개합니다. “At that moment the Angel of God shouted him from heaven, Abraham! Abraham!” “Yes, Lord! he answered.” (네, 주님, 그가 대답했다.) 저는 이 번역 성경을 묵상할 때마다 전율하는 감동을 느낍니다. 아들을 묶어 그를 죽여 번제로 드리려는 그 순간, 아브라함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를 부르는 소리는 불과 3일 전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한 바로 그 목소리였습니다. 그런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이 겪어야 했던 3일 간의 갈등과 고통은 이론으로 형용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극단의 긴장감과 원망스러움 등등이 복합된 3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표현 불가의 시간을 경험한 뒤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모리아 산에 올랐습니다. 그에게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원망의 대상이었던 하나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라기 보다는 상대조차 하기 싫은 극도로 혐오스러운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Living Bible 버전은 이렇게 단어 하나를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Yes, Lord!” 듣기 싫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아브라함은 이렇게 호칭을 붙였습니다. “네, 주여!” 담임목사가 무엇을 교우들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에 주어진 하나님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분명한 시험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시험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었음에도 아브라함은 그 시험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시험을 주신 바로 그분이 나의 ‘주’가 되시는 자기의 영원한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설교를 통해 정말로 귀중한 보물과도 같은 은혜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 성도에게 주어지는 복의 절정은 하나님이 당신을 나에게 허락하시는 복에서 흔들리지 않는 복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에게 임하는 가장 이름답고 위대한 복은 너에게 나를 허락하노라고 말씀하시는 복입니다. 12절을 다시 복기하겠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김학철 교수는 생명의 면류관은 시험을 이긴 자들에게 하나님을 허락하시는 은총이라고 해석했음을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받는 가장 위대한 강복은 하나님 당신을 나에게 조건 없이 허락하시는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당신을 개방하시는 복이야말로 생명의 면류관이자 가장 위대한 강복이지 않겠습니까? 자기 죄악의 절정인 욕망으로 인해 시험을 당하면서 그 시험을 준 이가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자와 나를 조각하시고 연단하셔서 나를 정금(精金)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 신앙의 대상이 되게 하기 위해 내게 시험을 주는 이가 하나님이라고 믿는 자는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에 하나 이런 착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착각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그분과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일등칸 인생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그분은 끝자리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끝자리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너무도 끝자리를 원하셨으니까요.” (샤를 드 푸코, 『샤를 드 푸코 선집』, 분도출판사, 26〜27쪽) 그러자, 이렇게 고백한 푸코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사랑하는 세인 교회 성도 여러분! 일주일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에게 말씀과 내용으로 감동을 주신 일을 경험한 일이 있으십니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당신을 허락하신 것이 최고의 복임을. 그러나 또 잊지 마십시오. 내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박하여 여러분을 옥죄고 있기에 내게 임한 여러 시험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결국에는 여러분의 영육을 살해하는 욕망의 찌꺼기임을. 그래서 그런지 오늘 주어진 12절은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위로의 메시지로 충분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시련을 정면으로 맞서서 견뎌 내는 사람은 대단히 복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찬양합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