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3일 주일 설교 (요한이서 두 번째 강해) 제목: 길벗이십니까? 본문: 요한이서 1:4-6 서론)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영혼의 타락이 시작되는 것이다,”(김기석,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꽃자리, 2013, 102쪽) 6년 전에 김 목사께서 쓴 13권의 책을 리뷰했을 때 그가 남긴 촌철살인 몇 가지를 리스트-업 하라고 한다면 저는 이 구절을 열 손가락 안에 넣고 싶을 정도로 추천하고 싶은 명문입니다. 이 글을 만난 뒤에 너무 행복해서 『시골 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에 이 문장을 擔持(담지) 하면서 끝맺는 말에 행복한 마음에 이렇게 기록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김 목사로 인해 나는 달려갈 힘을 얻는다. 힘에 부치기는 하지만 다시 또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한 목회자의 귀한 영혼의 울림이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 (이강덕, 『시골 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 동연 간, 78쪽) 내 글을 본 김기석 목사께서 출간을 앞둔 제게 이런 추천의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는 일종의 전작주의자인 모양이다. 이런 사람은 말리기 어렵다. 책의 말미에 덧붙인 참고도서 목록만 봐도 얼마나 치열한 인식욕의 소유자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인식욕이 아니다. 그는 참의 길을 맹렬하게 탐색하는 진리의 순례자이다. 그가 열어가는 인식의 세계를 통해 많은 이들이 낯설지만, 황홀한 세상과 만나 현실의 인력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멋진 글 벗과 만났다는 사실이 참 즐겁다.”(위의 책, 8쪽) 선배에게서 내가 느끼는 감정의 소회는 같은 생각으로 지성적 영성의 성찰을 갖고 하나님이 걸으라고 하신 천로역정의 길을 똑바로 걷고 있다는 길벗 의식이었는데, 선배는 부족한 사람에게 같은 영성으로 가지고 천로역정의 길을 걷고 있는 글 벗이라는 동지 의식을 보여준 글을 보며 감사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천로역정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길은 꽃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입니다. 이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데, 같이 가고 있는 글 벗, 혹은 길벗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들이 혹 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삶의 정황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여러 감사 조건이 있는데, 그 감사의 내용이 감사인 줄 모르고 너무 당연하게 내게 주어진 것이라고 무감각해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향하여 김 목사는 비수를 던집니다. “당신의 영혼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서 저자 장로는 수신자들에게 이렇게 직설합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이 구절에서 눈여겨 보아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진리대로 행하는 자”라는 해석입니다. ‘행하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페리파튠타스’ (περιπατοῦντας)의 어원적인 뜻은 ‘두루 돌아다닌다.’, ‘둘레길을 걷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해석한다면 ‘진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탈하지 않고 걷다.’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원이나 지경으로 이탈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4절 본문을 어원적으로 주석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걷고 있는 자’들이 너희들의 자녀들 중에 있다는 것을 내가 보니 참으로 기쁘다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 KJV가 원어에 가깝게 4절을 번역했습니다. “I rejoiced greatly that I found of thy children walking in truth, as we have received a commandment from the Father.”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진리 안에서 걷고 있는 그대의 자녀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대단히 기쁘다.” 요한이서 저자는 요한 공동체 안에 있었던 믿음의 동지 중에 자녀들마저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감격적으로 느껴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이서 저자가 왜 감격했을까요? 1세대뿐만이 아니라 2세대까지도 영지주의와 로마 황제 숭배가 팽배했던 그 참담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앙의 길을 같이 걷고 있는 길벗이라는 공동체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이서 저자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소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적지 않은 영의 대적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영의 대적들은 만만치 않은 무기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 굴복하면 주어지는 각종 세속적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시대에 부응하는 젊은이들에게 당연히 매력덩어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추측하건대, 상당히 많은 기독 공동체 안에 있었던 젊은이들이 배교하고, 팍스 로마나로 이탈했음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런 정황은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과 동일합니다. AI가 신이 되어 버린 오늘, 아니 마치 AI가 신의 행세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오늘,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운운하는 것은 개그처럼 보일만한 시대이기에 젊은이들에게 종교는 개인의 기호 문제이고, 취사선택의 문제이지 삶의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몇 년 전에 바티칸에 있는 베드로 대성당 쿠폴라 계단을 통제하는 바티칸 관계자 몰래 여러 차례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젊은이들을 촬영한 영상을 EBS 채널을 통해 우연히 본적이 있습니다. 쿠폴라 계단을 오르려면 돈을 내야 하는데 젊은이들은 담당자의 눈을 피해 공짜로 여러 차례 오르락내리락한 것입니다. 끝내는 발각이 되었는데 불법을 저지는 이유를 묻자, 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쿠폴라 계단을 한번 오를 때마다 복권 당첨 확률이 높아진다는 소문 때문에 이렇게 했습니다.” 오늘 믿음의 2세대가 교회를 나오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전인격적 관계로 인해 그분이 주시는 주체할 수 없는 은혜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목에 붙들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모습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까? 후자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후자의 모습으로 나오는 우리 교회 자녀들도 상당수 일 텐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페리퍄튠타스’ 즉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테두리 안에 있는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본문에서 요한이서 저자가 기뻐했던 그대로 믿음의 길벗으로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인쳐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포기는 내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사랑하는 자녀는 물론, 내가 주목하고 있는 이들이 믿음의 길벗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라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고 걸어가도록 내가 최소한 해야 하는 영적 마지노선을 오늘 주일에 그어볼까 합니다. 어떻게 그을까요? 이어지는 본문 5〜6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요한이서 저자는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1) 사랑하기의 연대입니다. 5절에서 요한이서를 작성한 저자 장로는 수신자를 밝힙니다. “큐리아” (κυρία)입니다. 우리 성경으로 ‘부녀들아’로 번역된 이 단어는 단순히 아버지와 딸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무디 스미스는 이렇게 ‘큐리아’ 즉 ‘부녀’를 주석했습니다. “다시 장로는 부녀를 부른다. 이 헬라어 단어는 신약에서 예수를 부를 때 종종 사용하던 명칭인 ‘주’ 즉 ‘큐리오스’ (κύριός)의 여성형이다. 요한이서 장로가 여기서 이 말로 가리키는 바는 교회일 것입니다.” (무디 스미스, 『현대성서주석-요한1,2,3서』, 202쪽) 이 주석을 적용하여 해석한다면 요한이서 저자가 요한 공동체 안에 있는 지체들이 1세대이든, 2세이든 관계없이 진리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이탈하지 않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공동체 안에 있는 지체들이 사랑으로 연대할 것을 강조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연대는 갈라치기 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편 가르기 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누구의’ 교회를 만드는 사랑이 아니라, ‘누구나’의 교회를 만드는 사랑입니다. 갈라디아서 3:28-29절에서 바울이 엄숙하게 선포한 메시지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사랑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 말씀 그대로 모든 이가 사랑하는 삶을 만드는 것이 함께 신앙의 길을 걷는 길벗들이 헤ㅐ야 할 일입니다. 2) 계명을 행하는 삶입니다.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상투적으로 이 레마를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개신교인들이 흔히 범하는 믿음 제일주의라는 도그마에 빠져 계명을 행하라는 말에 튕겨 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목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역 동선입니다. 백 번을 강조해도 전혀 과대하지 않은 가르침이 사도행전을 시작하는 프롤로그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절을 꼭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동선을 칼로 마음을 베는 마음으로 적시하며 시작하는 서언을 명시했는데 의미심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순위는 행함이 일순위였다는 점입니다. 가르치고 행하신 것이 아니라, 행한 것을 가르치셨다는 점은 오늘 사역하는 목사인 저는 물론, 우리 세인 교회 지체들에게 막중한 영적 부담감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신앙의 촌철살인입니다.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율법 학자들이 예수께서 와서 영생 비법을 질문합니다. 질문 의도는 그들이 몰라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예수의 권위를 짓밟고 종교적 권위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악한 저의를 갖고 질문한 율법 학자들의 시험 문제였습니다. 주께서 그 저의를 아시고 율법에 기록된 내용이 무엇인가를 유도하며 다시 되뇌어 질문하자 율법 학자들이 신명기 6장의 쉐마임을 얼떨결에 밝힙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께서 저의가 악한 질문을 던진 자들에게 직격탄을 날리신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본문을 소개합니다. 누가복음 10:25-28절을 주목합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를 행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길벗으로 살아내는 자의 가장 중요한 삶의 강령입니다. 소설가 한강이 『소년이 온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녀의 신비로운 또 다른 소설, ‘흰’을 2018년에 만났습니다. 작가는 이 세상에 자기의 눈으로, 정서로 느끼는 흰 것에 대해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흰』의 탈고를 마쳤고 세간에 내놓았습니다.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 인용한 글은 작가가 본 흰 것 중의 하나인 ‘초’를 보고 쓴 글입니다. 한강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흰』, 40쪽) 떨어지는 촛농을 보고 있노라니 점점 작아지는 초 자신의 작아짐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는 작가의 천재적 감성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를 독서하며 성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희생이었고,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자기가 작아지고 사라지지 않는 한, 빛을 발할 수 없는 촛불이 갖고 있는 운명론적인 자아 인식을 작가가 글로 표현한 것입니다. 작가는 이런 작아짐과 자기 사라짐을 각오하는 자만이 내 삶을 그대에게 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유일한 존재임을 선언한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께서 사셨던 그 삶을 살아내는 이들입니다. 그가 행하셨던 그분의 삶을 따라 살아가는 예수님의 길벗들입니다. 이 길벗의 길은 예수께서 사셨던 삶의 길에서 부담스럽고 불편해도 살아내며 이탈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길벗이십니까?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길벗이십니까? 아니, 여러분 옆에 천로역정의 여행을 함께 하는 길벗이 있으십니까? 지난 주간, 수요일 예배에 참여한 지체들이 은혜의 피드백을 보내주었습니다. 전라도에서 믿음의 길벗으로 동역하는 권사님이 수요예배를 영상으로 시청하고 이런 피드백을 보내 주셨습니다. “목사님 말씀 잘 받았습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나도 하나님을 이용하여 나만의 안전과 기쁨을 얻어 낸 적이 없는가를 마음의 찔림을 받고 하나님만 생각하며 드려지는 예배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나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한 주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지난주 수요일 저녁에 선포했던 오스왈드 챔버스가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밝힌 권고를 듣고 다시금 다잡이한 믿음의 길벗이 보내준 글을 읽다가 목사로 살아가는 이로써 보람을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듣고 나서 사랑하기의 연대, 그리고 그렇게 살기를 결단하여 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예배에 참여한 자가 아니라, 또 하나 무대에서 연출되고 공연된 쇼 엔터테인먼트에 방청객으로 참여하여 자기만족을 위한 종교 활동에 동참한 자에 불과합니다. 이런 종교인으로 내 삶을 연속한다면 이 얼마나 아픈 일이며 비극이겠습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사랑의 연대를 각오하시고 그렇게 살기를 다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벗이시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번 주간, 그렇게 사랑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6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선언합니다. “사랑은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하나로 줄여 말하면 이렇습니다. 사랑 안에서 삶을 경영하라. 이것은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것입니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 요한이서 1:6절)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곳에서 주를 예배하리라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 주를 찬양하리라 누구도 헌신하지 않는 그곳에서 주께 헌신하리라 누구도 증거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 주를 증거하리라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곳에서 주를 예배하리라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 주를 찬양하리라 내가 밟는 모든 땅 주를 예배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덮어지게 하소서 내가 선 이곳 주의 거룩한 곳 되게 하소서 주의 향기로 물들이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