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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9월 29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스물세 번째 강해): 만지면 죽는다.2024-09-28 15:23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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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9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스물세 번째 강해)

 

제목: 만지면 죽는다.

본문: 요한일서 5:1821

 

서론)

 

그림 하나 보겠습니다.


(그림 소개)

 

저의 젊은 시절, 한참이나 핫(hot)했던 닭살 돋는 묵상에 나오는 삽화 중 하나입니다.

이 삽화의 제목은 재 건드리면 죽어…』입니다.

이 삽화에 관한 글을 원문 그대로 소개합니다.

초중고교 시절 학교에서 젤 싸움 잘하는 애를 가리켜 일진이라고 했다. 이 일진 애들은 자잘한 싸움에 간섭하지도 않으면서(더러는 약한 애들 삥뜯는 비열한 종족도 있었지만), 대부분 이를 준수하며 지키는 심판관 역할을 했다. 따라서 서열도 이들로 인해 정해졌다. 더 재밌는 것은 이러한 일진은 몇몇 애들의 비호 세력이 되어주기도 했다는 거다. 싸움은 지지리 못하지만, 공부를 잘 해서 커닝을 시켜주거나, 맛있는 반찬을 싸 오거나, 더러는 너무 심약한 아이들을 딱한 마음에 보호해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싸움은 못 해도 그들의 세력을 등에 업어 일진은 못 되고 이진이 되는 놈들도 있었다. 그럼 자기보다 덩치 크고 센 녀석들도 때려 줄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세력을 등에 업고 사탄을 밟아 이겨 승리를 쟁취하는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김선호, 닭살 돋는 묵상, 생명의 말씀사, 2002, 240-241)

이 글을 소개하는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작가는 성경 구절 하나를 삽화에 적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중의 하나인, 요한일서 5:18절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 구절을 메시지번역으로 음미해 보십시다.

우리가 알기로,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아무도 죄, 곧 죽을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마귀도 그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이 주는 위로가 얼마나 큰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악한 자는 만지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못 박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요한일서 마무리 강해를 통해서 왜 악한 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만지지 못하게 하시는 지를 연구하며 은혜를 공급받아 보려 합니다.

 

본론)

 

본문 18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범죄 하기를 경성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요한일서 저자는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들을 죄짓게 하는 사탄의 세력이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고 18절에서 증언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본문 19절을 읽겠습니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우리를 세상의 악한 자의 그룹에서 배제시키기 위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기까지 한다고 세밀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니 악한 사탄의 세력이 어찌 하나님의 사람을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도 은혜 위의 은혜인데 본문 20절은 감동의 극치를 느끼게 해 주는 구절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무슨 말입니까?

유진 피터슨 메시지번역으로 20절을 이해해 보십시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실로 멋진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만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그 또한 우리를 위해 일하게 하셨음을 선언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오셔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와 그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나와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의 절정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절정을 유진 피터슨 목사가 번역한 표현은 최고라는 점을 저 또한 동의합니다.

실로 멋진 선물입니다.”

이렇게 멋진 선물을 주신 참 하나님이시고, 참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속하고, 예수께 속한 우리 모두를 향하여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요한일서를 총 마감하는 마지막 구절에서 소개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너무 마땅한 명령이자, 또 순종해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아마도 요한일서의 부록을 기록한 저자가 명시한 우상은 영지주의라는 우상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영지주의자의 드센 공격이 있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사탄에게 붙들린 악한 자들의 준동이 거세지만 흔들리지 말 것을 요한일서 저자는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주목하고 있는 그대와 나를 사탄이 건드리지 못하게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본문 이해를 중심으로 이제 우리는 요한일서를 마감하는 강해의 레마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아딧줄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철저하게 붙들리십시다.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소속된 객체는 소속한 주체에 의해 보호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역으로 해석해 보면, 소속한 객체를 보호하지 않는 주체는 이미 주체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대한기독교 나사렛 성결회라는 교단에 속해 있습니다.

교단에 개교회는 1년 한 번 상회비라는 의무금을 납부합니다.

이 의무금은 국가로 빗대어 말하면 국민이 마땅히 내야 하는 세금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왜 상회비를 납부합니까?

소속되어 있는 객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단은 개 교회에서 이런 상회비를 받는 기관이기에 개 교회의 행정, 개 교회 목회자의 목양, 그리고 외부적으로 공격받을 수 있는 일체 시도에서 개 교회의 목회자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와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이 일을 행하지 않으면, 자격 미달입니다.

이것을 관계라고 말합니다.

관계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아딧줄과 같습니다.

아딧줄은 바람의 방향을 맞추기 위하여 돛에 매어 쓰는 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결국 아딧줄은 배와 그 배에 탄 인간이 항해할 때 목표나 좌표를 상실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생명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아딧줄입니다.

사탄이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는 대전제는 내가 아딧줄되신 주님에게 붙들려있을 때입니다.

사도행전 18:5절을 소개합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바울이 사역하던 고린도 지역의 정황을 누가가 의미심장하게 보고한 구절입니다.

아덴과 아레오바고 지역에서 바울은 예상하지 못한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헬라 철학으로 무장한 이들을 변화시키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름 착잡한 마음을 갖고 바울은 고린도로 사역의 동선을 옮겼습니다.

고린도로 내려간 바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외로움은 극한 외로움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이 외로움을 감지하셨고, 그를 위해 데살로니가,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등등에서 사역하던 바울의 동역자인 실라외 디모데를 고린도도 내려가게 하심으로 바울에게 힘을 실어줍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외롭게 사역하는 바울을 만났습니다.

몹시 힘들어하며 고통스러워할 것으로 예상했던 바울 사도의 사역을 고린도에서 지켜본 이 두 사람은 놀라운 일을 경험하기에 이릅니다.

바울이 복음 사역은 매우 단호했고, 조금도 주저하거나 움츠리지 않는 담대함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고린도 지역에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만이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의 사역지였던 고린도는 로마의 속주였기에 마땅히 그 곳에서의 그리스도는 로마의 황제뿐이었습니다.

이것을 부인하거나 부정하는 자는 반역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로마의 황제가 그리스도가 아니라 구주 예수만이 그리스도임을 선포했으니 이 얼마나 담대한 행보입니까?

바울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사도행전 18:5절에 기록된 한 단어에 주목하여 답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입니다.

붙잡혀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쉬네꼬는 문자적으로 소를 사방에서 몰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상태그러니까 완전히 포위된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포위되었을까요?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유일한 아딧줄임을 믿었기에 그것을 붙들었기에 그는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9:78절을 복기해 보겠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현대 크리스천들의 맹점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하늘 소리에 대해 둔감하거나 아예 귀를 닫는다는 말도 됩니다.

변화산상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요구했던 자기 생각은 이 아름다운 곳에 초막 셋을 짓겠다는 일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생각 즉 하늘 소리는 달랐습니다.

아들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 하늘의 소리였습니다.

성도가 아딧줄을 붙드는 일은 내 소리대로 움직이는 행동이 아니라, 하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아딧줄이라고 믿는다면 도대체 신앙생활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붙잡은 것은 바울 스스로 판단할 생각의 줄이 아니라, 아딧줄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56절을 소개합니다.

나는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 지체에게 자신이 얼마나 완벽한 유대인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 메시지를 전한 뒤에 이어서 무엇을 연이어 전합니까?

이어지는 빌립보서 3:79절에서 놀라운 신앙고백을 전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56절에서 표현한 내 개인의 이력서를 포기한 이유는 더 위대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가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견지하고 난 뒤에 내게 주어진 참 된 의로움이라고 강하게 고백합니다.

분명히 바울은 자신의 신앙적 입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아딧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되면 내가 갖고 있는 일체의 것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울은 아딧줄 되신 주님을 붙들며 일생을 살았던 신앙의 선배였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정채봉 시인의 시말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어!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윤동주 외 59, 매일, 신 한잔, 북로그컴퍼니, 40)

 

시인은 를 생각하는 를 멋진 시어로 표현했습니다.

시에 잠기다가 문득 이런 소회가 임했습니다.

가 행복할까? ‘가 행복할까?

혹자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에 의해서 그렇게 그리움의 대상이 된 만큼 행복한 이가 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는 존재를 생각하며 모든 일의 역동을 느끼는 라면 나는 기꺼이 가 되겠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랑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이가 더 행복하게, 받는 이보다 주는 이가 더 행복한 것처럼 나는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의해보고 다짐해 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참 감사를 느껴야 하는 존재임을 다시금 각인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아딧줄 되신 주님이 이렇게 세상을 향해 선포하셨으니 말입니다.

, 내가 사랑하는 〇〇〇 건들면 죽어!”

주님은 당신에게 속해 있는 나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만에 하나, 주께 속해 있는 나를 사탄이 건드리면 그냥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일찍이 알았던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며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시편 121:17절을 우리도 노래해 보십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