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2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스물두 번째 강해) 제목: 뜻대로 본문: 요한일서 5:13〜17 서론) 청년 시절에 철야 기도회에 참석하면 담임목사님이 곧잘 부르셨던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성가고, 또 하나는 찬송가입니다. 먼저 찬송가를 소개하면 197장입니다.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어제나 오늘도 언제든지 변찮고 보호해 주시네/주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줍소서/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써 오늘도 충만케 합소서. 얼마나 뜨겁게 찬양하며 은혜를 사모했는지 모릅니다. 이번에는 복음성가입니다. 중독성이 강한 복음성가였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뒤돌아서지 않겠네.” 이 복음 찬양은 외국곡입니다. 이 찬양의 원가사가 이렇습니다.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no turning back/no turning back.” 번역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주님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뒤돌아 서지 않겠습니다.” 청년 시절, 이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매주 금요일 예배에서 결심하고 또 결심하는 은혜의 시절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찬양을 부르면서 내심 복기하고 상기했던 질문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 이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혈기 왕성했던 청년이었기에 뜻에 대한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고 나니 제게 언제나 이 질문은 더 치열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 세인 공동체가 다루어야 할 테제입니다. 본론) 학자들의 지론에 따르면 요한일서는 요한일서 5:13절까지로 정의합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일서라는 이 편지를 작성한 저자가 맨 처음 요한일서를 문서로 남겼을 때 존재하던 원문은 5:13절에서 마감되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학자들이 개진한 지론이 설득력을 띠는 것은 요한일서 5:13절과 요한복음 20:31절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요한복음 20:31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기록 자체가 오늘 본문 5:13절과 너무 흡사하지 않습니까? 신약학자들은 요한복음 21장의 기록이 요한복음을 1〜20장까지 기록한 원저자와는 전혀 다른 그 누군가에 의해서 후대에 기록해 덧붙여졌다고 해석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다시 본문 요한일서로 돌아갑니다. 오늘 교우들과 함께 텍스트로 읽은 요한일서 5:13〜17절을 함께 묶은 이유는 13절까지가 요한일서 저자의 매듭짓는 메시지이고, 14〜21절은 후대에 또 어떤 익명의 요한 공동체와 뜻을 같이한 종교적 영성이 있는 지성인이 덧붙인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독서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 공동체의 메시지와 뜻을 같이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 존재했던 지성인이 덧붙인 메시지는 14절부터 접근하는 것이 옳습니다. 14〜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 유명한 구절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 너무 상식적인 답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자적인 이해를 뛰어넘어서 이렇게 질문하면 본문 14절은 멈칫하게 만드는 본문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기도를 파헤쳐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답하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대목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뜻’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가 ‘델레마’ (θέλημα)라는 흥미입니다. 우리가 흔히 딜레마에 빠졌어! 라고 표현할 때 쓰는 그 단어 딜레마가 ‘뜻’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델레마’을 어원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헬라어 단어에서 ‘di’는 두 번이라는 뜻입니다. ‘lemma’는 어떤 ‘제안’이나 ‘명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결국 합성어인 ‘델레마’를 문자적으로 풀면 '두 개의 제안'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인가? 저것인가? 놓고 고민하게 하는 상태가 ‘델레마’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진퇴양난’ 정도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큰 숙제를 하나 떠안게 됩니다. 인간이 ‘델레마’를 경험하는 것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델레마’를 느낀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가? 에 대한 제 문제에 대한 답을 내는 것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답에 접근하기 위해 C.S. 루이스의 걸작인 『순전한 기독교』에 나오는 몇 마디를 인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세상과 구별된 존재이며, 세상의 어떤 것들은 그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86쪽) 하나님의 델레마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의 영역과는 구별된 존재이십니다. 어떤 구별됨일까요? 세상과의 다름입니다. 반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대단히 유감스럽게 창조주인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 반대의 길을 추구하며 그것을 좋아하기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거역하고 반항하는 피조물을 심판하시면 일이 끝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루이스의 그 유명한 촌철살인의 말을 하나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옳은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중략) 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이 자유의지입니다. 악을 가능케 한 것도 자유의지이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 또한 자유의지입니다.” (위의 책, 80쪽) 이렇게 설명을 한 루이스는 단락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가지고 있는 것만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102쪽)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딜레마입니다. 자유의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속성대로 그 자유의지를 활용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지이자 하나님의 뜻일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실상, 세상이 그렇게 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며 딜레마입니다. 그렇다면 이상의 해석을 통하여 오늘 우리 세인 교회 교우들은 하나님의 딜레마 중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즉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뜻은 나와 그대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전제할 때 오늘 본문의 이해는 순조로워집니다. 14〜1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왜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요한일서 저자가 확신했을까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면 그 관계로 인해 영적인 쌍방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한 자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러니 기도의 응답은 물론, 우리도 분명히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의 기도에 집중하시며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선명한 확신입니다. 탁구장에 나가서 파트너와 경기를 합니다. 하다 보면 이 게임은 보나 마나 이기는 게임이 될 거라고 확신하는 매치가 있습니다. 물론 경기력이 뒷받침되는 것이지만 상대방의 심리를 이해하는 경우는 백전백승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말이 될까요? 전술적 교감이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말입니다. 사람도 어느 정도의 타인의 심리를 파악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내 심리를, 내 속마음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내가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옳지 않다는 것도 주님은 아십니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그럼에도 내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할 때, 하나님은 결코 응답하실 수 없다는 아픔을 딜레마에 빠지십니다. 그래서 기도 이전에 그런 이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뜻대로 구하라” 오늘의 언어에 맞게 적용합니다. “나와 관계를 바르게 설정하라” 흔하지 않은 일이지만 이런 경우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나면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성공적으로 이끌고 갈 확률 99%입니다. 왜 1%를 남겨두었는지 아십니까? 극히 저의 주관적인 경험이지만, 내비 양은 서울이나 대도시 한복판에 가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특히나 골목 상권을 목적지로 정하면 내비 양이 코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혼돈에 빠집니까? 사람이 만들어낸 기계 공학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라는 분명한 영적 내비게이션에 목적지와 방향성을 설정해 놓으면 AI 내비게이션을 간혹 틀려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본문 16〜17절을 읽어볼까요? 읽다가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무슨 말입니까? 현대인의 성경 버전으로 재음미해 보십시다.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보게 될 때 그것이 죽을 죄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죄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나는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의롭지 못한 모든 것이 죄이지만 죽지 않을 죄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예컨대, (영원한 죽음으로 이끄는 “죽을” 죄를 짓는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짓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도우시고, 죽을죄를 짓지 않은 그 죄인에게 생명을 베푸실 것입니다. 죽을죄라고 할 수 있는 죄가 있는데, 나는 그것을 두고 간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 행하는 것은 다 죄입니다. 그러나 죄라고 해서 다 죽을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자비하신 분이 아닙니다. 죽을 죄와 그렇지 않은 죄를 구분하실 정도도 세밀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이 어찌 당신과 바른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외면하시겠습니까? 적어도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고, 더 치밀하게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나는 하나님이 살피는 특별한 존재이며 귀중한 존재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14권의 영어 성경 번역을 찾아보았더니 공(共)히 ‘뜻’을 한 단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His Will” 즉 ‘그분의 의지’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그대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원하는 의지를 갖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도전에 다다랐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내 뜻을 포기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28-30절을 소개합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남편을 여섯 명이나 경험했던 여인의 민낯이 어떠했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과거를 감추고 또 감추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그녀가 사마리아 수가 성에서 주군이신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만남의 후 결과를 요한복음 저자가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로 정오에 물을 뜨기 위해 나온 그녀가 가지고 온 물동이를 버렸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아픈 트라우마에 아랑곳하지 않고 드러내 놓으면서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사마리아 성에서 선포하고 있음을 요한복음 저자는 보고합니다. C.K. 바레트는 자신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물동이를 버린 사건을 이렇게 주해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완전히 절연하고 있다.” (C.K. 바레트.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 한국신학연구소, 384쪽) 내가 갖고 있었던 아픔의 쓴 뿌리는 언제 없어지는 것일까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면 사라집니다. 성경적 증언 하나 더 덧붙이려고 합니다. 사사기 14:3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삼손이 나실인으로, 사사로 부름을 받고 블레셋에 내려가 처음으로 행한 일은 어처구니없게도 그곳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하겠다는 일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삼손에게 부모들이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삼손이 자기의 뜻을 반대하는 부모에게 뜻을 굽히지 않고 윽박지른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저는 『신 사사시대 읽는 사사기 Ⅱ』에서 이 구절에 대한 성서적 해제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for me’의 삶이 아닌 ‘for Lord’라는 성별 된 삶이다.” (이강덕, 『신 사사시대 읽는 사사기 Ⅱ』, 동연, 53쪽) ‘나를 위한 삶’을 사는 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설정은 요원하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한 삶’을 사는 자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즉 내 뜻을 포기할 때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삼손보다 3,100년 후대의 사람인 이강덕 목사는 믿음의 선배 삼손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존재했음이 더 불행이었던 사사” (위의 책, 18쪽)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내 뜻을 위해 사는 사람 모두는 이런 평가를 받을 확률이 높은 사람입니다. 주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 지체들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나희덕 시인의 시 한 편 감상하면서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호모 루아 (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호모 루아에서』, 문학과 지성사, 24〜25쪽) 호모 파베르이기 전에 호모 루아, 입김을 가진 인간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세균과 독소가 들어 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오래전 모산 동굴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어요 우리는 허공에 하얀 입김을 피워올리며 밤새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의 투명성을 믿던 시절이었어요 노래의 온기가 곰팡이를 피우리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몸이 투명한 동굴 옆새우들이 우리가 흘린 쌀뜨물에 죽었을지 모르겠어요 입김을 가진 자로서 입김으로 할 수 있는 일들 허공에 대한 예의 같은 것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도 유리창의 성에를 흘러내리게 할 수도 후욱, 촛불을 끌 수도 있지만 목숨 하나 끄는 것도 입김으로 가능해요 참을 수 없는 악취 몇 마디 말로 영혼을 만신창이로 만들 수도 있지요 분노가 고인 침으로 쥐 80마리를 죽일 수 있다니, 신의 입김으로 지어진 존재답게 힘이 세군요 그러니 날숨을 조심하세요 입김이 닿는 순간 부패는 시작되니까요 시인의 시를 처음 만났을 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어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와 숨결만이 이런 독소를 뿜어내겠습니까? 더 심각한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은 그 어떤 가치보다 위대한 것이기에 결코 양보하거나 물러설 수 없다고 생떼를 부리는 한 줌의 재와 같은 것이 내 뜻입니다. 내 뜻의 사수는 신앙생활의 암 덩어리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내 뜻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의 의지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설정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는 저와 여러분의 주군이십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 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쓰러질 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아심일세 어두운 밤 어둠이 깊어 날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일세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아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 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