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8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스무 번째 강해) 제목: 증거가 있습니까? (2) 본문: 요한일서 5:5〜13 서론) 지난 6일 대통령 배우자에게 의심되는 사건으로 세간에 주목 대상이 되었던 이른 바 ‘디올백 수수 의혹 사건’에 대해서 검찰수사심의위원회에서 청탁금지법상 공직자 배우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고, 디올백이 직무 관련성과 대가성이 없어 대통령 배우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맺고 무혐의 처분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날, 대통령 배우자에 대해 검찰수사위원회가 결론에 도달한 것은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뿐만이 아니라 알선수재, 변호사법 위반, 뇌물수수, 증거인멸, 직권남용까지 6개 혐의에 대해 심의를 진행한 결과 모든 혐의에 대해서도 불기소 처분을 결의했다는 뉴스가 보도 되었습니다. 검찰이 이렇게 결론을 내린 이유를 종합적으로 설명드린다면 증거 불충분이 그 근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세속 재판의 가장 중요한 판단 근거는 증거가 뒤받침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 입니다. 문제는 이런 증거가 실질적 증거의 유무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향방에 따라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점이 대한민국의 아픈 현실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증거는 이렇게 조변석개하는 증거가 아닙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증거는 하루아침에 권력의 향방에 따라 유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명징하고 분명한 증거라는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영적 자존감을 가질 수 있으며, 또 가져야 합니다. 본론)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이야기를 하나 전달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주께서 마태복음 24장부터 언급하신 종말의 때에 있을 일들을 설명하시는 담론 중에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구절입니다. 제자들이 알고 싶어한 종말의 때가 일어날 일들을 24〜25장에 소개하시면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오른편에는 양들을, 왼편에는 염소들을 배치할 것을 시사하신 내용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오른편에 배치될 양 같은 존재들은 하나님 나라의 입성하게 될 구원 받은 백성들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복은 참 귀하고 귀한 일이었습니다. 주께서 양 같은 존재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34절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감동적인 상급을 약속받은 이들이 감격하여 우리들이 이런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주께 질문합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마 25:37-39) 이 질문을 받은 주님이 곧바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1) 이 구절을 정리하면 이런 구도가 형성됨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백성들을 구별하신 그 이유는 그들이 작은 형제들에게 베푼 따뜻한 환대가 구원받게 된 동기 때문이라는 구도입니다. 그러면 이런 공식도 동시에 정해집니다. 적어도 이 땅에서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성도로 살아가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타자를 환대하는 삶이라는 점입니다. 적어도 성경은 적어도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반드시 나타나는 증거가 있음을 언급합니다. 마태복음 25장 담론에서는 그 증거를 환대하는 삶이라고 증언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다루어야 합니다. 왜?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나타내야 할 또 다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들은 세상을 이긴다는 메시지를 나누면서 적어도 그렇게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갖고 있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성도들은 극단적인 이기적 자아를 내려놓는 증거를 보이는 사람들임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본문 5절이 이 점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렇게 개진한 요한일서 저자는 이어 조금은 깊이 파헤쳐 들어가야 할 메시지를 곧이어 본문에 남깁니다. 본문 6〜10절을 소개합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표준 새 번역 성경으로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물과 피를 거쳐서 오신 분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다만 물로써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셨습니다. 성령은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증언하시는 이가 셋인데,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십니다. 이 셋은 하나입니다. 땅에서 증언하는 셋이 있습니다. 곧 영과 물과 피입니다. 이 셋은 일치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증언도 받아들이거늘, 하나님의 증언은 더욱더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증언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신 그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난해한 것 같은 이 구절을 더 깊이 해석해 드리려고 합니다. 부연하겠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 와서 구속사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했고, 죽음도 경험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육체의 탄생을 경험한 것은 물론, 세례를 받으심으로 영적인 탄생도 경험하신 분임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경험함으로 구속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역을 소개한 요한일서 저자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6절에 남겨 놓았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언한 존재가 성령님임을 밝힌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에서 이루신 구속사 사역의 정점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결정적 역할을 감당하신 분이 성령님임을 저자는 분명히 한 것입니다. 7〜8절은 성령님이 증언하신 내용을 함축적으로 요약해 줍니다.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주석이 필요한 부분이라 교우들에게 조금 깊게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언해 주는 주체가 성령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본문 텍스트의 결정적인 증언이 바로 이 점이라는 데에 조금도 이견을 달지 않습니다, 하지만 8절은 조금은 더 세부적 이해가 필요해 보입니다. “성령, 물, 피”라는 이 세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서형석 박사는 자기의 주석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령은 육신의 정욕을 이기는 증언자로, 물은 눈에 보이는 세례 요한을 통하여 안목의 정욕을 이기는 모델로, 피는 예수를 통하여 이길 수 있는 증언으로 묘사되었다.” (서형석, 『연세신학백주년기념주석-요한1,2,3서』, 141〜142쪽) 그렇다면 이 세 가지의 콜라보가 우리 독자들에게 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 답을 본문 9〜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믿음을 나아가게 한다는 선물입니다. 이렇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하는 역동적 주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십니다. 기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믿음이기에 이슈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정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주군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기적, 그 자체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될 당시 초대 교회의 근간을 위협하는 이단이 영지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적으로 부인했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영지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 신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전면 거부했습니다. 그랬기에 요한일서 저자는 이런 사상을 단호하게 배격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증언하는 성령님의 지원에 힘입어 주님은 성령의 증언, 세례자 요한의 증언, 그리고 예수님 스스로 완벽한 콜라보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선포한 것입니다. 서부동 성당 문 앞에 플랜카드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천주교에게 지키는 성령 강림 축일에 맞춘 플랜카드로 여겨지는 데 그 안에 담긴 성경 구절은 고린도전서 12:3절인데 오늘 본문에 정황 해설에 적절한 성경 구절이라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저는 이 말씀에 대해서 전적으로 아멘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믿어지는 일은 그냥 우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해 주는 역동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 될 수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런 부류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리스도이라는 증거는 대단히 단순하지만 중요합니다. ※ 내 심령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고 있으면 나는 그리스도입니다. 반면 내주하고 있지 않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스스로 자문하시고 자답해 보십시오.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거주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하는 증거는 성령님의 내주함입니다. 성령님에 대해서 하고 싶은 멘트는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절제하면서 오늘 주일에 내 안에 성령님이 내주한다는 의미에 집중하는 메시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에스겔 10:18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저는 개인적으로 예언서 에스겔에 기록된 구절 중에 가장 가슴 아린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절에 의지하여 해석하면 여호와 영이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을 떠나시는 장면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그토록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셨던 성전을 하나님은 떠나셔야 했을까? 고전적인 성서 주석가인 메튜 헨리의 해석 앞에서 설교자인 나도 마음이 절절해짐을 느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소에서 떠나시는 것을 본다.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오래도록 거하시던 곳이었으므로 이것은 슬픈 광경이었다. 여호와의 영광은 성전 문지방에 임했었다(겔 10:4절). 그러나 이제는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에스겔이 지금 환상으로 보고 있는 그룹들 위에 머물렀다(18절). (중략)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 뜰에서 자기들의 하나님 이름을 더럽혔었다. 이윽고 그룹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다. (19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전을 곧 떠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돌아오도록 중재하는 자가 혹시 없을까 하고 보시려는 듯 떠나기를 싫어하시며 여러 번 멈추어 서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화나시게 하는 백성이라도 그들로부터 떠나시기를 더디하신다. 그러므로 그가 노여워하시며 떠나시고자 할 때에라도 그들이 회개하고 기도하기만 한다면 자비하심으로 그들에게 돌아오려 하시는 것이다.” (매튜 헨리 주석, 에스겔 10장) 하나님께서 성전에 거할 수 없도록 더럽혀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죄악으로 하나님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음을 예언자 에스겔은 선포합니다. 제가 이 구절을 접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신학적 함의가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이동성”입니다. 분명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자 바람입니다. 하지만 에스겔의 보고를 참고할 때, 알 수 있는 경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때 성령께서는 언제나 나를 떠나실 수 있다는 경종을 에스겔서가 알려줍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내주하시면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음을 단호하게 오늘 주일 예배에 선포합니다. 김기석목 사께서 오래전에 저술한 참 좋은 신앙의 시금석과도 같은 책에서 기막힌 해제를 내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곳에는 그리스도의 사건이 현재화한다. 그래서 무기력한 생명을 일으켜 세우고 인위적으로 나뉘었던 것을 하나 되게 한다. 영들을 분별하는 시금석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성령)이다.” (김기석, 『오래 된 새 길』, 포이메마, 210쪽) 이재철 목사도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그대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이미 그대에게 임하신 성령님을 날마다 의식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재철, 『새신자반』, 홍성사, 174쪽) 목회 현장에서 30년 이상을 목회하고 그럭저럭 섬기는 교회가 안정되면 담임목사에 닥치는 가장 위험한 위기는 날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조명과 성령님의 인도함에 따라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진 습관과 스킬에 따라 사역하는 일입니다. 저 역시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스스로 이런 위기를 극복하게 된 동기는 글로 쓰고 성찰하는 묵상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부터입니다. 새벽예배를 인도하고 집에 들어가 아주 간단하게 아침 음식을 먹고 서재에 나와 약 1시간 정도 치열한 성서 묵상과 개인 영성 훈련에 몰입합니다. 이때 제게 나타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영적인 선물은 성령님과의 교제입니다. 그냥 교제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의 교제입니다. 묵상 사역을 하는 가운데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성령의 소리는 이것이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나를 만나려고 하는 일이 나는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교회를 개척하고 난 뒤에 제 사역의 가장 큰 기쁨은 성령님과 가장 가깝게 교제하며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제게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어제 새벽예배 시간에 참석한 교우들과 나누었지만 금요일 새벽에 제게 다가오신 말씀은 느헤미야 4:22절이었습니다. “그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이 구절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다가온 말씀은 “예루살렘 안에서”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권한 말씀이 제게 성령님의 소리로 임한 감격을 어찌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만 토요일 새벽 예배 시간에 교우들에게 이렇게 성령의 음성을 전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나약하고 불완전해도 교회 공동체를 떠나지 말고 그 안에 머무르십시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성령님의 조명을 지속하여 공급받는 자가 그리스도임을 말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내주하고 계십니까?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가 세상을 이깁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교훈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해 주는 역동적 주체가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인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답하기 전에 여러분의 심령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시는지를 확인하고 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실한 진정성을 갖고 아멘 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 땅의 동과 서 남과 북 가득한 죄악 용서하소서 모든 우상들은 무너지고 주님만 높이는 나라 되게 하소서 이 땅의 지친 모든 영혼 주 예수 사랑 알게 하소서 저들의 아픔과 눈물 씻는 주님의 보혈 이 땅 치유하소서 성령의 새 바람 이 땅에 불어오소서 주의 영 그 생기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이 땅에 하나님 영광 거하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열방에 하나님 영광 비추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