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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4년 9월 1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열아홉 번째 강해): 증거가 있습니까? (1)2024-08-31 14:52
작성자 Level 10

202491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열아홉 번째 강해)

 

제목: 증거가 있습니까?

본문: 요한일서 5:1-5

 

서론)

 

휴가를 떠나기 전에, 어디를 방문하고, 어디에서 식사하고 등등 나름의 계획을 짰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 그 계획에 맞추어 정확하게 진행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실례를 경험했습니다.

원래 의도된 스케줄이 아닌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감자옹심이와 옹심이칼국수를 하는 곳이었는데,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식당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놀란 것은 우리 부부가 들어와 자리에 앉은 이후, 제법 적지 않은 손님들이 식당으로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그리 유명한 식당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곳이었는데 왜 이렇게 손님이 많은 거지? 의아했는데 이 궁금증은 식사를 하면서 풀렸습니다.

감자옹심이와 옹심이칼국수는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음식입니다.

음식을 먹다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가성비에 비해 음식이 너무 맛이 있었습니다.

감자옹심이와 옹심이칼국수인 주메뉴뿐 아니라, 서브 음식들 역시 저희 부부의 입을 대단히 만족시켰습니다.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음식점에 손님이 왜 이렇게 많은지를 말입니다.

그 식당이 잘 되는 원인은 맛이었습니다.

아내가 식당을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에 이 도시에 다시 오면 이 음식점은 또 방문하자.”

원인 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고의 원칙이고 법칙입니다.

주전 568년에 유다 공동체가 망했습니다.

다윗에게 약속했던 왕조의 영원함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고,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멸망이라는 재앙을 당한 유다 공동체의 수많은 이들이 바벨론이라는 낯선 땅으로 끌려가 식민 지배의 통치를 받으면서 고통의 극치를 맛보았고 치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유다 공동체는 주전 538년에 극적으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기적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획하신 시나리오대로 움직인 결과물입니다.

이런 역사를 경험한 시편 126편 기자는 그의 노래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신앙을 고백합니다.

시편 126:14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포로로 살다가 극적인 구원을 경험한 시인은 그때의 감격을 고스란히 고백합니다.

포로로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에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고 술회합니다.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혀에는 찬양이 넘쳤다고 고백합니다.

이 일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작품이었기에 하나님이 이루신 그 큰일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다고 회상합니다.

시인은 이 놀라운 일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유다에게 행하셨던 기적 뒤에 이 시의 말미인 56절에서 이 유명한 영적 신앙고백을 선포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너무 유명한 고백이기에 이 구절에 은혜를 받는 데에서 머물고 실상 이 고백 안에 담겨 있는 시인의 신학적 담론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어 교우들에게 알려드립니다.

시인이 56절에 남긴 이 유명한 신앙고백 안에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유다 공동체를 향해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우리는 아픔을 경험했다. 우리의 경험은 다시는 경험하지 말아야 할 치욕이자 아픔이었다. 그러기에 우리 공동체는 이 쓰라린 아픔의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나는 내 사랑하는 유다 신앙 공동체에게 전한다. 다시는 야훼 하나님께 등돌리거나 등지지 말자. 이런 분명한 신앙적 의지를 굳건히 지키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열매들을 거두게 된다. 잊지 말자. 다시는 하나님께 등지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씨 뿌림을 지속하자. 그 결과의 선한 열매는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거두게 될 것이다.”

시편 126편의 시인은 패망의 원인을 경험한 장본인이었기에 그 경험을 토대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자고 역설한 셈입니다.

원인의 치열한 이행 없이 아름다운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도둑놈 심보입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임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아들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게 되었고, 그 결과 주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바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은혜의 주인공이 되었음도 배웠습니다.

이 은혜보다 완벽한 승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완벽한 은혜를 받은 자인 우리들이 정말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주인공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그대로 원인이 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간증임을 보고하려면 그 증거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까?

그 증거를 증명하고 보이려면 한 가지 증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본문 23절이 분명히 그 증거를 정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라는 것을 선포하려면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 저자는 그것을 이렇게 밝힙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못을 박습니다.

두 번에 걸쳐서 저자는 역설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증거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자의 증거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계명을 지키는 삶에 대해 천착해야 할 분명한 명분을 저자는 강력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계명을 지킨다는 이 명제에 대해 숙고해야 합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요?

출애굽기 20장에 소개된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일까요?

구약에서 제시된 613가지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저자가 말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한 신학적 외연을 확장하면서 조금 더 나아가보려고 합니다.

이 담론에 대해 접근하기 위해 대단히 적절한 복음서 내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9:16-22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 유대 지역 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어느 한 지역에 도착하셨을 때 어떤 한 사람의 돌발적인 방문을 받게 되셨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에게로 와서 다짜고짜로 영생의 방법을 질문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영생을 질문한 이 사람의 정체를 어떤 사람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하면서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지만, 19:22절에서 이 사람은 재물이 많으므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유대 지역의 유지였음을 암시합니다.

더불어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8:18절에서 누가복음 저자는 한 가지의 정보를 더 부여 하고 있습니다.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는 예수님을 돌발적으로 방문한 이 사람의 직업이 관리(아르콘)였다고 보고합니다.

관리로 번역된 헬라어 명사 아르콘을 영국 애버딘 대학의 신약부 교수인 하워드 마샬(I.Howard Marshall) 교수는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의회원 중에라고 구체화시켰는데 이는 회당 지도자이거나 산헤드린의 일원임을 가리킬 것이다.” (하워드 마샬, 국제성서주석- 누가복음 Ⅱ』, 한국신학연구소, 423)

마샬 박사의 이론을 근거로 한다면 한 가지의 공통점이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부자로 소개된 어떤 사람은 부와 더불어 명예나 권력까지 함께 소유하고 있는 종교적 지도자이든 아니면 선택된 평신도이든 분명히 지도층의 사람일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 사회의 지도급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소수의 선택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관리가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 청년 관리의 요구에 주님이 제일 먼저 확인하신 것이 구약 계명을 지켰는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청년은 주님이 하문한 내용에 대해서 어린 시절부터 계명을 준수했다고 자신있게 답했습니다.

주님도 그의 답변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영생의 방법을 요구한 청년 관리에게 남은 한 가지를 재차 요구하셨습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1:21)

주님이 요구하신 최종 명령에 청년이 반응한 내용을 이어지는 마태복음 21:22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캐나다 밴쿠버 기독교 세계관 대학원 교수인 최종원 교수가 이 텍스트에 등장한 재물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내놓았습니다.

여기서 재물이란 예수께 복종할 수 없었던, 그래서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단 마지막 남은 자아였다.”(최종원, 교회, 경계를 걷는 공동체, 비아토르, 87)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가 많이 머뭇거렸습니다.

지금 교우들에게 말씀드리려는 대목 때문입니다.

21세기 주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현대적 감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도무지 내려놓지 못할 것 같은 내게 남은 마지막 자아까지 포기하는 것이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마지막 남은 자아는 고사하고, 내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명령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는 마음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적나라한 자화상인 게 사실이니 오늘의 레마를 내게 적용하라는 담임목사의 압박에 끔쩍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가 오늘 제게도 고민거리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성서에서 요구하는 메시지에 줄타기하는 것을 목사의 양심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에 성령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선포하고자 합니다.

주께서 하문하신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21세기 현장 안에서 적용한다면 이것입니다.

내게 남아 있는 내 심령의 자아를 주님 앞에 내려놓는 일입니다.

본회퍼의 걸작인 나를 따르라를 읽다가 도무지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엄위한 명제를 만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밑줄 그어놓은 제 책 나를 따르라의 문장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혜에 관한 말씀은 불순종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위로가 되고, 그가 자기 자신에게 제공하는 사죄가 된다. 그리하여 설교는 공허하게 되고, 이제부터 설교를 듣지 않게 된다. 비록 그가 수천 번 자신의 죄를 용서하더라도, 진정한 사죄는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사죄가 전혀 선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신앙은 값싼 은혜를 먹고 산다. 불순종은 항상 불순종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본회퍼,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6768)

이런저런 이유를 그럴듯하게 제기하지만, 본회퍼는 단호하게 일갈합니다.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 내려놓지 못하는 신자들은 값싼 은혜에 만족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값싼 은혜에 천착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의 흉내는 낼 수 있지만,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값싼 은혜에 만족하는 자는 종교인으로서의 자신에 만족할 수는 있지만, 주님의 제자로 설 수는 없습니다.

교우들이 중보해 주셔서 정기 휴가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묵었던 숙소는 설악산 자락이 보이는 리조트 4층이었습니다.

4박을 묵었던 숙소에서 지내면서 이틀 비가 내리는 날씨를 경험했습니다.

아침에 숙소에서 창문을 열면 창밖으로 골프장이 보입니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냥 서 있으면 온몸이 홀딱 젖을 수 있는 세찬 비가 내리는 새벽녘이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골프장에 그 궂은 날씨에도 적지 않은 골퍼들이 라운딩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순간 문득, 비를 맞아가면서 골프를 치는 이들에게 도대체 골프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든 생각이 이렇습니다.

그를 미치게 만든 그 무엇이 골프다.

교우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미치게 만드는 분이십니까?

바울이 고백한 이 선언이 여러분의 고백이라고 동의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3)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킬 주군이십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만에 하나, 위에서 던진 두 질문에 신실한 마음으로 아멘 한다면 우리는 나의 자아마저도 주님을 위해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 이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안디옥 지방에 살던 이들이 불러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글을 읽다가 한참을 멈추어서 영롱한 그의 생각에 함몰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그분에게 피신할 권리가 있는가? 그분의 기쁨의 물을 마실 권리가 있는가? 그분이 친절함을 계속 베푸실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내가 그분 가까이 있기를 원하시며, 심지어 매일, 아침마다 그분의 말씀을 내 손에 그리고 내 눈 사이에 표지를 삼기를 원하신다. 나는 하느님께서 내게 예언자 호세아를 통해 나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기억할 것이다.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 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 이것을 받고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다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하느님을 찾는 사람, 한국기독교 연구소, 191)

이 영적 성찰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정도로 주군과 심오한 영적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대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내 자아까지도 주군을 위해 내려놓는 자기 포기입니다.

사랑하는 제천세인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그 증거를 보이십시오.

그 증거는 나를 내려놓는 자기 포기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 발 앞에 무릎 꿇고

 

주 발 앞에 무릎 꿇고 그 사랑에 나 안기네

어떤 말도 그 어떤 소리도 그 발 앞에서 잠잠해지네

주 나의 사랑 그 발 앞에 앉아

내 모든 기도는 사랑의 노래가 되네

주의 옷자락 만지며 주의 두 발을 씻기며

주님 그 발에 입 맞추며 나의 왕관을 놓으리

주의 옷자락 만지며 주의 두 발을 씻기며

주님 그 발에 입 맞추며 나의 왕관을 놓으리